히브리서 강해 21. 시온을 향한 성도의 길
히브리서 12:14–29 (NKRV)
14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16음행하는 자와 혹 한 그릇 음식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없도록 살피라
17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그가 그 후에 축복을 이어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18너희는 만질 수 있고 불이 붙는 산과 침침함과 흑암과 폭풍과
19나팔 소리와 말하는 소리가 있는 곳에 이른 것이 아니라 그 소리를 듣는 자들은 더 말씀하지 아니하시기를 구하였으니
20이는 짐승이라도 그 산에 들어가면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령을 그들이 견디지 못함이라
21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느니라
22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23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24새 언약의 중보자이신 예수와 및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하는 뿌린 피니라
25너희는 삼가 말씀하신 이를 거역하지 말라 땅에서 경고하신 이를 거역한 그들이 피하지 못하였거든 하물며 하늘로부터 경고하신 이를 배반하는 우리일까보냐
26그 때에는 그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거니와 이제는 약속하여 이르시되 내가 또 한 번 땅만 아니라 하늘도 진동하리라 하셨느니라
27이 또 한 번이라 하심은 진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영존하게 하기 위하여 진동할 것들 곧 만드신 것들이 변동될 것을 나타내심이라
28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29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본문은 우리 인생이 시온산을 향해 가는 여정임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2:22 (개역개정)"그러나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 산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의 예루살렘과 천만 천사와..."
이는 상징적인 표현입니다. 시온 산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 곧 하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시는 영광의 나라를 뜻합니다.그 도성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서게 되는 것, 바로 그것이 우리 인생의 종착지입니다.
지혜로운 성도는 이 영광스러운 목적을 삶의 방향으로 삼습니다.그의 삶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지 않으며, 세상의 유혹에 시간과 물질을 낭비하지 않습니다.영광의 목적은 우리의 제한된 인생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목적 중심의 삶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합니다.고신대학교 전 총장이신 전광식 목사님은 다음과 같은 우려를 전하셨습니다.
첫째, 육체와 정신이 과부하에 걸릴 수 있습니다.목표를 세운 사람들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지나치게 몰아붙이는 경향이 있습니다."성공해야만 가치 있는 인생이다"라는 생각 속에서 늘 압박을 받으며 살아갑니다.결국 몸이 병들고, 마음이 지치며, 삶 전체가 무너지는 이들도 생겨납니다.
둘째, 가족과 이웃을 돌아볼 여유가 사라집니다.목표에 집중하는 동안 가장 소중한 사람들을 외면하기 쉽습니다.가정은 희생되고, 아이들은 외로움을 겪고, 배우자는 소외감을 느낍니다.이는 많은 성공한 사람들의 회고 속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슬픈 고백입니다.
셋째, 삶의 감성과 여백이 사라집니다.늘 바쁘고 늘 쫓기다 보면, 들꽃의 아름다움, 저녁노을의 평안함도 느끼지 못합니다.
삶은 메말라 가고, 인간미는 점점 사라지며, 결국 주님이 거하실 여지마저 사라집니다.
넷째, 성공은 교만을 낳고, 실패는 절망을 남깁니다.목표를 이루면 “내가 해냈다”는 자부심에 빠져 자기 우월감에 도취됩니다.반면, 목표를 이루지 못하면 자책과 무가치함 속에 절망하게 됩니다.심한 경우, 삶을 포기하고자 하는 마음까지 들기도 합니다.
다섯째,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이름 아래, 인간의 욕망이 자리잡을 수 있습니다.우리는 자주 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이 길을 택했습니다.”하지만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나의 욕망, 나의 성취, 나의 성공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내 야망을 신앙으로 포장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자기기만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위의 비판들은 그 목적이 세속적인 것일 때에 해당됩니다.만일 우리가 영광스러운 목적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면, 우리의 삶은 세속적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더 탄력 있게 살아갈 수 있으며, 더욱 견고해질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목적은 인생의 어려움과 난관을 돌파하는 힘이 되며, 절망 가운데서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적은 성공과 출세, 부와 풍요, 행복과 쾌락, 자아실현과 성취등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다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이 말하듯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오늘 본문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시온성에 서는 것이라고 말합니다.히브리서 4장에서는 이것을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마치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비유입니다.
히브리서 4:11 (개역개정)“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하지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광야 같은 인생길을 걸으며 약속의 땅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단지 들어가는 것만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 땅에서 펼쳐질 영광스러운 삶을 기대하며 사는 것, 그것이 참된 소망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에서 삶을 기대하게 하셨습니다.그 삶이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하나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신명기 6:10–11 (개역개정)“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향하여 네게 주리라 맹세하신 땅으로 너를 들어가게 하시고, 네가 건축하지 아니한 크고 아름다운 성읍을 얻게 하시며11 네가 채우지 아니한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집을 얻게 하시며, 네가 파지 아니한 우물을 차지하게 하시며, 네가 심지 아니한 포도원과 감람나무를 차지하게 하사 네게 배불리 먹게 하실 때에.”
이 말씀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나라가 어떤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약속을 붙들어야 합니다.흔들리지 않는 소망을 품어야 하며, 흔들리지 않는 목표를 바라보며 걸어가야 합니다.이 모든 것은 흔들리지 않는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를 향할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히브리서 12:28 (개역개정)“그러므로 우리가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여러분, 흔들리는 것에 우리 인생을 걸지 말아야 합니다.더 많이 가지기 위해,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더 인정받기 위해 쉼 없이 달려가다가 문득 깨닫게 됩니다.그토록 바라던 것들이 손에 들어와도, 마음은 공허하고 삶은 여전히 메마르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생의 마지막 순간, 뒤를 돌아보며 흔들리고 무너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살았음을 후회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십시오.흔들리는 세상 속에서, 흔들리는 목표에 삶을 걸지 마십시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인생이 헛되이 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한 번뿐인 이 땅의 삶이 의미 있고 가치 있기를 바라십니다.우리는 시온 산을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하나님의 도성인 하늘 나라를 향해 살아야 합니다.흔들리지 않는 나라, 영원한 나라를 품고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는 소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현실의 고통이 줄어들지 않고, 캄캄한 동굴을 걷는 듯한 삶 가운데, 조금의 빛도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절망합니다.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흔들리지 않는 나라에 들어갈 때 모든 것이 완성될 것이다. 그날까지 버티고 견
디라고 말입니다.
생각보다 인생은 짧습니다.고통스러운 현실도 짧습니다.히브리서를 받았던 성도들이 견뎌야 했던 고난의 무게는 지금 우리의 상황보다 더 무거웠습니다.그들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시온 산을 바라보라.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라.고난의 현실에 매이지 말고, 절망적 상황에 집중하지 말라."
이렇게 시온 산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현실의 삶에서 추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화평함과 거룩함입니다.
히브리서 12:14 (개역개정)“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세상은 자기 유익을 추구합니다.그런 사회에서 경쟁과 갈등은 불가피합니다.모두가 더 큰 이익을 얻기 위해 다투고 싸웁니다.그러나 성도는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화평을 이루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화평은 죄와 타협하는 화평이 아닙니다.죄를 침묵함으로써 얻는 평화가 아닙니다.사랑과 희생과 헌신으로 이루는 화평입니다.
예수님은 이 화평을 위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하나님을 대적하던 세상을 위해, 하나님과 죄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과 죄인이 화평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에베소서 2:14 (개역개정)“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 방법은 십자가였습니다.
골로새서 1:20 (개역개정)“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화평을 이루는 길은 오직 십자가의 길뿐입니다.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와 이익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화평이 찾아옵니다.이익만을 추구하는 기업, 교회, 가정에는 참된 화평이 존재하지 않습니다.화평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희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들의 헌신과 눈물, 그들의 양보와 수고가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합니다.
하나님은 죄악된 세상 속에 우리를 화평케 하는 자로 부르셨습니다.성 프란치스코의 기도는 이 부르심을 잘 보여줍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심이 있는 곳에 믿음을,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뿌리게 하소서.
주여,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우리가 희생할 수 있는 이유는, 주님께서 먼저 나를 위해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그 사랑을 받은 우리가 이제는 그 사랑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화평을 만드는 자들, 화평을 위해 자신을 드리는 자들이 복되다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9 (개역개정)“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대로 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시온 산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은 ‘화평’을 추구해야 합니다.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는 일이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신 삶의 방식입니다.그러므로 우리도 세상 속에서 화평을 이루는 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거룩함은 하나님의 성품입니다.그 본질적인 의미는 죄와 부정으로부터 철저히 자신을 분리시키고, 하나님의 소유로서 구별되어 살아가는 변화된 상태를 뜻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로마서 12:1–2 (개역개정)“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제물은 거룩한 제물입니다.우리 자신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 제물이기 때문에, 이 세대를 본받지 않아야 합니다.즉, 세상이 추구하는 삶의 방식과 철저히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거룩한 삶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시작됩니다.마음은 인격의 중심입니다.그 중심에 내가 아닌 하나님이 주인이 되실 때, 비로소 우리는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이는 곧 자기 중심적 가치판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뜻에 따라 삶을 분별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보기에 선한 것이 아닙니다.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 기뻐하시는 것,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그것을 기쁨으로선택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삶의 모든 순간, 우리는 선택합니다.그때마다 이 기준을 마음에 새기십시오."하나님께 드려진 제물로서 나는 지금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삶을 거룩한 산 제물로 인식했습니다.그는 자신의 죽음이 가까웠음을 직감하고,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6 (개역개정)“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여기서 전제는, 포도주나 독주를 하나님께 붓는 제사입니다.바울은 자신의 전 인생이 하나님께 드려진 제사였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내 인생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는 사실을.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제물’ 자체보다, ‘제물이 되는 우리’에게 더 관심이 있으심을.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신 이유는 단지 제물의 종류나 형식때문이 아닙니다.가인의 ‘삶’과 ‘인격’, 즉 제물인 가인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5 (개역개정)“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본문은 분명히 말합니다.“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하나님은 제물보다 제물을 드리는 자를 먼저 보십니다.가인이 하나님께 온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드리는 어떤 제물도 의미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삶을 거룩한 제물로 받기 원하십니다.우리가 드리는 헌신과 봉사, 예배와 섬김이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지려면, 먼저 우리 자신이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과 마음과 영혼을 정결하게 유지해야 합니다.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제물로서 부족함이 없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이렇게 축복하며 권면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3 (개역개정)“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또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몸은 하나님의 성전입니다.우리는 그 몸을 죄로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영혼은 하나님의 생기를 받은 존재입니다.우리는 그 영혼을 세상의 혼탁함에 물들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신부가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을 정결하게 준비하듯,성도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만날 그날을 간절히 사모하며,몸과 영혼을 날마다 정결하게 지켜야 합니다.
자, 이제 우리가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시온산을 향해 가는 성도들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반대로, 우리가 반드시 피해야 할 것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죄로 인해 공동체의 믿음에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15 (개역개정)“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라.”
여기서 말하는 **‘쓴 뿌리’**는 단순한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무너지고, 사람을 향한 사랑이 식을 때시작되는 죄의 뿌리입니다.처음엔 사소한 불평이나 섭섭함으로 보일 수 있지만,그것이 해결되지 않고 마음에 남아 있으면 결국 공동체 전체를 병들게 합니다.
누군가의 냉소, 누군가의 불신, 누군가의 상처와 미해결된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고 단단해져결국 다른 이들까지 오염시키는 악영향을 미칩니다.그래서 우리는 매일 우리 마음밭을 점검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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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하나님의 뜻보다 내 생각을 앞세우고 있지는 않은지,
사랑보다 판단이 앞서고 있지는 않은지…
사랑하는 여러분, 쓴 뿌리는 반드시 뽑아내야 합니다.그대로 두면 나도 병들고, 내 곁의 사람들도 병들게 됩니다.
성경은 이 원리를 민수기 16장의 고라의 반역 사건을 통해 경고합니다.고라는 레위 지파 사람이었지만,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을 시기합니다.
“왜 저들만 하나님의 일을 해? 우리도 거룩하지 않나?”
불만과 시기를 마음에 품은 그는 이를 해결하지 않고,다단, 아비람, 그리고 250명의 족장들과 함께 공동체적 반역을 일으킵니다.결국 그들의 반역은 하나님의 권위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이 되었고,하나님은 땅이 고라 무리를 삼키는 심판으로 그 죄를 단호히 다스리셨습니다.
왜 성경은 이런 죄를 ‘쓴 뿌리’라고 표현했을까요?뿌리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생명 전체를 좌우합니다.잘라내지 않으면 나무 전체가 병들고 죽게 됩니다.하나님은 긍휼과 자비의 하나님이시지만,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죄에 대해서는 단호하십니다.
오늘날 교회는 연약하고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비난도 받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교회는 주님께서 피 흘려 세우신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그 교회가
거룩하고,
정결하며,
든든히 세워지기를 원하십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쓴 뿌리를 경계하며,날마다 마음을 점검하고 공동체를 세우는 자로 서야 합니다.
히브리서 12장의 권면은 단지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닙니다.이 권면은 교회 공동체 전체에 주시는 말씀입니다.그래서 1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히브리서 12:14 (개역개정)“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여기서 **“모든 사람과 더불어”**라는 표현은 신앙은 철저히 공동체적인 여정임을 보여줍니다.신자는 혼자서 믿음을 완성하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주를 따르는 자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화평을 추구하기 위해, 각자가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도록 서로를 도우며 함께 자라가야 합니다.
한 사람이 열 걸음을 내딛는 것이 아니라,열 사람이 한 걸음씩 함께 내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장의 속도가 다를 수 있습니다.조금 느려도 기다려주고, 인내하며, 함께 시온 산을 향해 나아가는 것,그것이 건강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을 방해하는 **‘쓴 뿌리’**에 대해 늘 조심해야 합니다.공동체를 병들게 하고, 관계를 파괴하며, 결국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는 죄의 뿌리입니다.냉소와 비난, 분열과 불평에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그런 말을 반복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면, 지혜롭게 거리를 둘 줄 아는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우리는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시온 산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그렇기에 우리는 화평함과 거룩함을 추구해야 합니다.화평은 희생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고,거룩함은 세상의 방식과 구별된 삶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우리의 걸음을 막는 쓴 뿌리를 경계해야 합니다.내 안의 불신과 불평, 공동체를 향한 냉소와 비난을 뿌리째 뽑아야 합니다.우리는 주님의 피로 세워진 교회를 함께 지키는 자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우리 모두가 시온 산을 바라보며한 걸음씩 함께 나아갑시다.주님 다시 오실 날을 바라보며,오늘도 믿음으로 살아갑시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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