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23. 결혼을 귀히 여기라
히브리서 13:44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기독교 윤리 두 번째 시간입니다.지난 시간에는 ‘나와 이웃’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윤리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핵심은 사랑, 환대, 연대였습니다. 오늘은 ‘나 자신과의 관계’에서 실천해야 할 윤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특별히 결혼 윤리를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려 합니다.
첫 번째는, 결혼을 귀히 여기라는 명령입니다.
히브리서 13장 4절은 분명히 말합니다.“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결혼은 본질적으로 귀하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결혼의 가치는 심각하게 훼손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개인주의와 자기중심적 문화현대 사회는 개인의 자유와 선택을 극대화합니다.
그 결과, 결혼은 ‘자유를 제한하는 제도’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헌신보다는 자기만족과 자아실현이 우선시되면서,
결혼의 본질인 **‘서로에 대한 책임’과 ‘희생’**이 부담스럽게 느껴집니다.
2) 결혼에 대한 부정적 경험과 이미지가정폭력, 이혼의 증가, 불성실한 결혼 생활 등은
많은 이들에게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습니다.주변의 불행한 결혼을 보며
“차라리 결혼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성의 상품화와 왜곡미디어와 사회 전반에서 성(性)은 왜곡되고 상품화되고 있습니다.그 결과 ‘결혼 안에서의 성적 순결’이라는 개념은 점점 무시되고 있습니다.동거, 혼전 성관계, 성적 자기 결정권 등이 당연시되며,결혼은 더 이상 **‘성의 거룩한 울타리’**로 인식되지 않습니다.
4) 경제적 이유주거 비용 상승, 양육비 부담, 취업 불안 등 현실적인 문제들로 인해결혼은 감당하기 어려운 선택이 되었습니다.이러한 부담은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이 모든 현상은 성경적 결혼 질서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만약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결혼을 귀히 여기고, 결혼 윤리를 충실히 지켰다면, 지금과 같은 혼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결혼이 귀한 것이라고 말합니다.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께서 친히 제정하신 최초의 제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많은 질서와 제도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결혼은 하나님이 직접 만드신 창조 질서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제도에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담겨 있습니다.예를 들어, 제철 과일과 채소가 몸에 좋은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가공식품을 지나치게 섭취하면 건강을 해치고 만성질환을 유발합니다.
산에 머물면 몸과 마음이 치유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은 본래 인간에게 유익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반대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도시 속에서는 스트레스가 쌓이고 쉽게 지치게 됩니다.햇볕을 쬐며 걷는 산책이 헬스장 운동보다 더 좋은 이유도 바로 그 방식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은 모두 선하며, 감사함으로 받으면 그 자체가 축복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며, 그 안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담겨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에서,당시 유행하던 금욕주의적 거짓 가르침을 반박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디모데전서 4:3–4 (개역개정)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이 말씀은 당시 어떤 이들이 결혼조차도 부정한 것으로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결혼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결코 버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혼을 통해 우리를 축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결혼은 단지 남녀의 결합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통로입니다.
하나님은 결혼한 남녀를 축복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통해 태어나는 자녀들까지도 축복하십니다. 이 축복은 한 세대를 넘어 대를 이어 계승됩니다.
그리고 이 축복 계승의 출발점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형제와 자매의 결혼입니다.이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 질서요,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가 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바로 결혼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남들도 하니까”, “나이 되었으니 해야 하니까” 하는 식의 생각은결혼의 본질을 놓치는 잘못된 접근입니다.
결혼은 귀한 것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놀라운 계획과 축복이 담겨 있습니다.그러나 결혼이 흔한 일상으로 전락하고, 그 가치를 가볍게 여기게 될 때,이혼이 흔해지는 사회적 현실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결혼을 귀하게 여긴다면,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순종해야 합니다.그 뜻에 순종할 때, 우리는 가정 안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혼을 바르게 시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믿음의 형제나 자매를 만나야 합니다.시작이 중요합니다.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과 시련을 겪게 됩니다.
물론 결혼은 사랑으로 시작됩니다.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황홀한 감정이나 설레는 마음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집니다.감정은 결혼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결혼 생활을 지탱할 수 있는 기반은 아닙니다.
결혼은 현실입니다. 신앙 안에서의 결혼이라면, 그 조건 역시 분명합니다.성도들의 결혼 조건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믿음의 형제, 믿음의 자매여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6:14 (개역개정)“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또한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명하셨습니다:
신명기 7:3–4 (개역개정)“3 또 그들과 혼인하지도 말지니 네 딸을 그들의 아들에게 주지 말 것이요, 그들의 딸도 네 며느리로 삼지 말 것은 4 그가 네 아들을 유혹하여 그가 여호와를 떠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진노하사 갑자기 너희를 멸하실 것임이니라”
믿음 없는 자와의 결혼은 단순한 개인적 선택이 아닙니다.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위험한 선택이며, 믿음의 계승을 막는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지 않은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께 구별된 사람입니다.그는 세상과 구별되어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삼손은 단지 한 개인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 더 나아가 오늘날의 성도들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삼손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은자신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삼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습니다.
그는 탁월한 지혜와 신체적 힘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블레셋 여인과 결혼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났습니다.그 결혼은 갈등과 복수로 이어졌고, 이후 이방 여인 드릴라를 사랑하다가결국 나실인의 서약을 어기고, 그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까지 탁월한 지혜와 능력을 지닌 청년들이결혼을 잘못 선택함으로써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습니다.
사실, 인생의 결정적인 선택의 순간에 그 사람의 믿음의 진정성이 드러납니다.결혼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원한다면,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결혼의 질서를 귀하게 여기고,그 뜻에 순종해야합니다.
이러한 결혼관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부모가 어릴 때부터 가르쳐야 할 가치입니다.
“너희는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믿음의 형제와 자매를 만나야 한다.”이 사실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결혼을 귀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좀 틀어지면 헤어지면 되지”라는 생각은, 단호하게 말해, 악한 생각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가볍게 여기는 죄이며,하나님께서 결혼 안에 담으신 축복과 계획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이혼을 가볍게 여긴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 마태복음 19:3–6 (개역개정)
3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5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6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결혼의 신성함과 하나님의 주권적 결합을 강조하셨습니다.결혼이 귀한 이유는 단지 사회적 제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신 관계이기 때문입니다.따라서 인간이 그것을 마음대로 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한편, 삼손과는 반대로 이방인이었지만,
믿음으로 축복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룻입니다.
이스라엘에 흉년이 들었을 때, 유다 베들레헴 출신의 한 가족이 생계를 위해 모압 땅으로 이주했습니다.그 가족은 엘리멜렉과 그의 아내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입니다.그러나 그 땅에서 남편 엘리멜렉이 먼저 죽고,두 아들도 모압 여인과 결혼한 뒤 차례로 죽었습니다.그 결과,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게 됩니다.
나오미는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두 며느리에게는 각자의 길을 가라고 권합니다.그 중 오르바는 눈물로 작별하고 돌아갔지만,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르기로 결단합니다.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의 이 고백은 단순한 정이 아니라,하나님을 향한 진심 어린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고향이 아닌 낯선 땅에서, 룻은 남의 밭에서 이삭을 주워 생계를 이어가며시어머니를 성심껏 봉양합니다.
그 밭의 주인이 바로 보아스였고, 그는 룻의 헌신과 믿음에 감동하여룻을 존귀히 여기고 마침내 결혼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그 결혼을 통해 룻에게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그들은 아들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의 아버지,이새는 다윗 왕의 아버지가 됩니다.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즉, 룻은 이방 여인이었지만,하나님을 향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 이름을 올린 복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이방 여인 룻이 믿음의 사람 보아스와 결혼할 때, 그녀가 다윗의 증조모가 되고,
그 후손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실 것을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겸손하게 믿음으로 시작된 그 가정이 하나님의 구속사에 쓰임 받는 위대한 가정이 된 것입니다.믿음의 가정은 시작은 미약해 보일 수 있지만,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시간이 지날수록 창대해집니다.
청년 여러분, 결혼을 귀하게 여기신다면 반드시 기억하십시오.결혼의 출발은 믿음의 가정에서 자란 믿음의 사람과 함께 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시작된 결혼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세워진 축복의 가정이 됩니다.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두 번째, 결혼한 후에도 계속해서 결혼을 귀히 여겨야 합니다.
세상에는 많은 관계가 있지만, 그중 부부 관계가 가장 우선입니다.부모-자식 관계보다, 친구 관계보다, 사회적 관계보다 먼저 되어야 할 관계가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왜냐하면, 부부 관계가 건강하면 자녀들도 건강하게 자라고,가정 전체가 하나님의 질서 가운데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 에베소서 5:31–33 (개역개정)
31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32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부부의 연합 안에 하나님의 비밀, 곧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가 담겨 있다고 선언합니다.결혼은 단순한 계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가 담긴 거룩한 언약입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전혀 상관없던 두 사람이 어느 날 한 가정을 이루어,
한 몸처럼 살아가며 자녀를 낳습니다.이보다 더 신비스러운 일이 있을까요?
더욱 놀라운 것은,이기적이던 내가, 나보다 남을 위해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때로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배우자를 위해 눈물 흘리고,내 시간과 에너지와 물질을 아낌없이 나누게 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이것은 단순한 심리나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바로 하나님께서 결혼 가운데 주신 은혜요, 신비입니다.
이기적인 내가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섬기게 됩니다.이것은 인간적인 도리나 본능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바로 결혼 안에 담긴 하나님의 신비요, 은혜입니다.
며칠 전 한 성도님과 장례식장에서 나눈 대화가 마음에 남습니다.그분은 30년 이상을 주말부부로 지내셨습니다.해마다 재계약을 해야 했기에 늘 불안했고,하청업체를 관리하는 일은 늘 스트레스의 연속이었다고 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단 하나,커가는 아이들 때문이었습니다.
지금은 퇴임하여 웃으며 말씀하시지만,그분의 삶은 평생 가족을 위한 헌신이었습니다.가족과 여행 한 번 가보지 못했고,주일이면 예배를 드리고 잠시 쉰 후 다시 출근해 토요일까지 일하셨습니다.30년 이상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아내들, 어머니들은 또 어떻습니까?아이를 낳는 순간부터 인생은 희생의 연속입니다.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자신의 필요는 뒤로하고,아이에게 더 좋은 옷을 입히고, 더 좋은 음식을 먹입니다.그리고 번 돈도 아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씁니다.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삽니까?그게 더 좋은 것입니다. 아이들이 잘 사는 모습 보는 게 더 행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입니다.
이타적인 삶이 기쁨이 되는 이 구조는 단순한 심리 현상이 아닙니다.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시고,교회가 그리스도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그 관계를하나님은 부부관계를 통해 경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결혼의 질서가 무너지지 않기를 원하십니다.어떤 질서입니까?
남편은 아내를 위해 희생하고,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순종하는 것.
이 질서가 회복될 때, 그 가정은 복을 받습니다.이것은 문화적인 주장이 아니라,성경적 원리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잘 보십시오.남편을 존경하고 순종하는 아내가 있는 가정은남편이 특별히 잘나서가 아니라,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기에 평안과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반면, 남편의 권위가 무너진 가정,특히 자녀들 앞에서 아버지를 무시하는 분위기가 있는 가정은언제나 불안하고 질서가 깨어진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단순히 잘 살기 위한 방법론이 아닙니다.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질서입니다.우리는 그 질서를 통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배우고,하나님 나라의 가정을 세워가야 합니다.
에베소서 5:22–24 (NKRV)22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3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24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여러분, 이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리입니다.세상은 이렇게 말합니다."왜 바보같이 살아? 왜 남편에게 순종해? 너도 너 인생 살아."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아내는 남편을 존경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라하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남편이 존경받을 만한 사람일 때 복종하라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에 순종하는 것이 먼저입니다.아무리 남편이 부족해 보여도, 그를 존중하고 복종해 보십시오.그 복은 반드시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임할 것입니다.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질문이 들 수 있습니다."목사님, 제 남편은 믿음도 없고, 하나님의 사랑도 모릅니다. 오직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에게도 복종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베드로전서 3:1–2 (NKRV)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이라도,말이 아니라 삶으로, 아내의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남편이 바뀌는 이유는, 아내의 잔소리가 아니라,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희생적인 사랑과 정결한 행실때문입니다.그 사랑 안에서 남편은 ‘다른 세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감춰진하나님의 구속적 질서와 은혜를 보여주는 진리입니다.우리는 부부라는 관계를 통해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복을 자녀들에게 전하게 됩니다.
에베소서 5:25 (NKRV)“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주셨습니다.남편은 아내를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희생의 사랑, 죽기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남자 성도님들께 묻겠습니다.만약 아내가 두 눈을 실명하게 되면, 여러분은 자신의 한쪽 눈을 줄 수 있습니까?자식이라면 가능하다고 생각될 겁니다. 내 핏줄이니까요.그러나 아내는 핏줄이 아닙니다.세상적으로 보면, 원래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고,
마음만 바뀌면 헤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가 원수였을 때,전혀 상관없는 죄인이었을 때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이 사랑을 배우는 곳이 바로 부부 관계입니다.남편은 예수님처럼 아내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여러분,아내가 병들었을 때, 나이가 들었을 때,죽을 때까지 책임지는 것이 남편의 도리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일입니다.그 사랑 안에서 우리는
머리로만 알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제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요즘 결혼식의 의미가 점점 퇴색되고 있습니다.
결혼식은 왜 하는 것입니까? 결혼식은 ‘언약식’입니다.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두 사람이 서약하는 자리입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그 어떤 상황에서도 당신을 사랑하고 책임지겠습니다.”이것을 공적으로 선포하고, 하나님과 사람들을 증인으로 삼아 서약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결혼을 ‘백년가약(百年佳約)’이라 불렀습니다.아름다운 약속, 평생을 함께하기로 맺는 언약입니다.저는 예전에 친구가 뉴질랜드에서 결혼할 때,결혼 서약 후, 법적 효력을 위해 변호사가 서약서에 직접 사인을 받는 장면을 본 적이 있습니다.그만큼 서약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결혼식은 ‘축제’가 아니라 ‘언약의 자리’입니다.그리고 그 언약의 중심에는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 신실함과 헌신이 있습니다.
결혼은 단순히 두 사람의 연합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맺은 언약입니다.
이 서약을 지키는 것이 결혼을 귀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남편 또는 아내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 결혼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며,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희생과 사랑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로 더럽혀진 우리를 자녀 삼으셨고,
우리를 그의 신부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결혼에 담겨 있는 신비입니다.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최악의 상황에서도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우리의 결혼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혼으로 묶으셨다면,
그 뜻에 순종하여 최악의 상황에서도 책임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책임을 다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축복을 주십니다.
**영화 <쉐도우랜드>는 유명한 기독교 변증학자이자 작가인 CS 루이스의 삶과 그가 겪은 사랑을 다룹니다. 영화는 루이스의 아내 조이와의 사랑과 결혼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조이는 방탕한 남편과 이혼한 후, 영국에 남아 있던 루이스를 만납니다. 루이스는 조이의 밝은 에너지에 매력을 느껴 그녀에게 끌리게 되고, 둘은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결혼은 처음에는 법적인 결혼에 불과했습니다. 루이스는 단지 법적인 책임만을 다하려 했고, 그들의 관계는 점차 더 깊어져만 갔습니다.
그러던 중, 조이는 암에 걸리게 됩니다.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할 것을 알게 된 조이를 위해 루이스는 다시 한 번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이번 결혼식은 병실에서, 목사의 주례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결혼식에서 서약을 다시 했다는 것입니다.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건강하거나 병들었거나,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남편의 도리를 다할 것을 약속합니까?”
루이스는 **“예”**라고 대답하며, 이후 조이가 죽을 때까지 사랑하며, 그녀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루이스는 목사 앞에서 다시 결혼식을 올렸을까요?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서약을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진정한 사랑은 하나님 앞에서의 서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결혼은 단순한 사람 간의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맺은 서약을 지킬 때, 결혼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신성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결혼 서약은 단순한 법적 약속을 넘어서,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한 서약입니다.
이 서약을 지키는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서로를 사랑하고 책임지는 일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우리 가정 안에서 실천하는 일입니다.
결혼을 '귀하게' 여기라는 말 속에는 정말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귀하다'**는 단어에는 **'보배롭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결혼은 단순한 인간 관계가 아니라, 우리 인생을 빛나게 하는 보배입니다.
우리가 젊을 때는 즐거움과 편안함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의미와 가치를 찾게 됩니다.
젊은 시절에는 결혼이나 출산, 육아, 가사일들이 귀찮고 부담스럽게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인생을 살면서 소중한 것들에 대한 깨달음이 생깁니다. 특히 결혼 생활을 통해 배우는 헌신과 희생, 그리고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되면, 그때서야 그 모든 경험이 결코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가끔은 우리가 업적을 남기지 못하고, 자녀들에게 큰 재산을 물려주지 못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족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진정한 보배임을 깨닫습니다.
그 시간들은 우리 삶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지지고 볶고 싸우며 힘든 순간들도 있었지만,
결국 가족과의 시간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것이었다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결혼을 ‘귀하게 여긴다’는 것은 단순히 일상의 의무를 감당하는 것 이상으로,
그 안에서 나누는 사랑과 책임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결혼은 그 자체로 우리 삶을 빛나게 하는 보배이고, 그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랑, 희생, 헌신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큰 가치입니다.
가정의 달 5월입니다.
우리에게 가족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희생과 헌신으로 우리를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리는 시간,
또한 자녀를 선물로 주시고 그들을 통해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 모든 은혜의 시작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신성한 결합, 곧 결혼의 신비에서 비롯됩니다.
결혼을 귀히 여기고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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