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성탄절 설교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022년 성탄절 설교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23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사랑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곁에 있고 싶습니다. 결혼하는 것도 함께 있기 위해서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것이 삶의 기쁨이며 환희입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 중에 가장 큰 복은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복은 없습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도 임마누엘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그분의 자녀 삼은 신 이유가 임마누엘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날이 성탄입니다.
1. 창조 때의 임마누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마지막에 사람을 창조하신 것은 창조의 기쁨을 사람과 함께 나누길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딸을 시집보내는 어머니가 신혼집을 구하고 가전이며 가구며 모든 것을 갖춘 후 딸에게 선물로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신혼집으로 에덴을 준비하셨고, 아담과 하와를 혼인시킨 후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한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행복했습니다. 매일 매 수간 우주에 펼쳐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찬양했습니다.
시편 8:1–9
1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3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들을 내가 보오니
4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5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6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7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8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9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무엇보다 가장 기뻐하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성삼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기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하나님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것이었습니다.
부모가 되면 하나님 마음을 조금 이해하게 됩니다.
자녀를 낳아 키우는 목적은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자녀가 부모의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자랄 때 행복하다는 사실을,
부모의 행복과 기쁨은 자녀들이 행복할 때임을 깨닫습니다.
부모가 준비해 준 삶의 공간과 기회들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며 꿈을 펼칠 때 부모 된 보람을 느낍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사랑과 섬김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모든 것에 충만하십니다. 그런데도 우리와 함께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즐거워하십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동산에서 추방당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거부했습니다. 아버지 집을 나간 탕자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그들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막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집 나가려는 자식을 붙들어 놓는다고 떠난 마음을 돌이키게 할 수는 없습니다.
2. 타락 중에도 임한 임마누엘
그렇게 사람은 반역하여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불순종한 자리에서 심판을 명하심과 함께 구원에 대해 약속을 하십니다.
그것은 여자의 후손이 악한 사단의 머리를 깨뜨릴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창세기 3:15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신학자들은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악한 사단의 유혹으로 인해 사람이 반역하여 하나님을 떠났지만, 그래서 더는 사람들과 함께 거하지 못하지만, 여자의 후손이 태어나 악한 사단의 머리를 박살 내고 마침내 그의 자녀들을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임마누엘이 회복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음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몰아내자 부끄러움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자신들의 죄를 자각한 것입니다. 옷을 벗었음을 자각하고 나뭇잎으로 가렸습니다. 벗은 몸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면의 더러움이 수치스러웠습니다. 무엇으로 가려야 했습니다. 그렇다고 가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창세기 3:21
21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는 것은 어떤 짐승을 죽여 그들의 수치를 가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짐승을 희생시키셨습니다. 죄 없는 짐승이 희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집 나간 자식 마음을 붙들 수는 없지만, 수치를 당하게 둘 수는 없었습니다. 내 자식 아무리 못나고 잘못해도 부모는 품습니다. 집 나간 자식이 아무리 미워도 “밥은 먹고 다니냐?” 묻는 것이 부모입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죄인에게 임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비록 에덴에서 추방되었지만,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임마누엘의 은혜가 떠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들 가인과 아벨도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예배를 받지 않자 그 분노를 동생에게 풀었습니다. 자신의 동생을 죽인 것입니다. 그의 마음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었습니다.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으니 하나님이 받으실 리 없습니다.
동생을 죽인 가인, 그 분노를 사실 하나님을 향한 분노였습니다. 가인의 죄는 잔인했습니다. 그것이 충동적이든 계획적이든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귀한 생명이 형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그는 땅에서 저주를 받고 유리하는 자가 됩니다. 그는 두려웠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게 됩니다.
창세기 4:13–14
13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14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무슨 염치로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임합니다.
창세기 4:15
15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임마누엘의 은혜가 가인에게 임합니다. 하나님은 비록 가인이 범죄했지만 그의 생명을 보호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임한 임마누엘
이후 역사의 진행 가운데 태어나고 죽는 일들이 진행됩니다. 태어난 이들은 가인과 같은 죄인들이었습니다. 죄인들이 모이면 죄는 과격해지고 그 결과는 파괴적입니다. 노아시대 과격해진 죄의 역사로 인해 인류의 존속 자체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물로 심판하십니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습니다.
창세기 6:8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은 인류를 포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류를 살리기 위해 심판하신 것입니다.컴퓨터 프로그램이 엉켜 작동되지 않으면 초기화(리셋)해야 합니다. 마치 인류가 그러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인류를 버린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해 심판은 불가피했습니다. 이 또한 임마누엘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1)아브라함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를 통해 한 민족을 이룰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합니다. 아들을 주신다는 약속을 믿지 못하고 첩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기품있는 아내의 외모로 자기 생명이 위협받을 때는 누이라고 거짓말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2)야곱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속이고 삼촌 집으로 도망할 때입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답게 속이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약속을 하십니다.
창세기 28:15
15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그 약속은 성취되었습니다.
3)이스라엘
이후 하나님은 야곱의 후손들로 이스라엘을 구성하시고 한 민족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 삼으시고 함께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반역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심판은 하시지만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 증거가 성막입니다. 성막은 임마누엘의 증거입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범죄하고 하나님을 대적하기 이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기보다 가나안의 문화에 동화되었고 마침내 가나안화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고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게 됩니다. 그 결과 인간의 존엄성은 사라지고 잔혹하고 추악한 악행들이 가득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바벨론과 앗수르에게 의해 나를 빼앗기게 되었고 성전은 훼파되었습니다. 성전의 모든 기물이 약탈당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던 성전이 파괴되자 이스라엘은 절망했습니다. 임마누엘의 약속이 포기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7:14
1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의 약속이 반드시 성취되리라는 것입니다. 그 징조가 바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처녀가 임신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됩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처녀가 아이를 낳는 때는 없었습니다. 예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이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라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고 한다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기에 모든 질서와 원리를 초월하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처녀를 통해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이 이뤄진다면, 이 증조가 현실이 된다면 이사야 7장 14절의 약속, 임마누엘의 약속은 실제이고 현실이 될 것입니다.
4. 임마누엘의 성취
그런데, 2천 년 전 이 약속이 성취되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단 한 번밖에 없었던 사건이었습니다.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은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 약속하신 사단의 머리를 박살 낼 여자의 후손이 태어난 것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바로 예수입니다.
2천 년 전 마구간에서 태어난 예수는 임마누엘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뤄졌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었던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장에 아브라함의 계보가 등장한 것입니다, 누가복음 3장에서는 그 계보가 상향식으로 하나님께로 올라갑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태어나심은 하나님의 약속이고 의지였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아버지 품을 떠날 때, 그래서 인류가 결국 하나님을 등지게 될 때, 그들을 돌이켜 회개를 시키고 마침내 하나님의 자녀 삼아 그들 가운데 거하실 것에 대한 약속 그리고 그분의 의지가 마침내 이루어진 것입니다.
이사야 9:6–7
6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7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왕좌와 그의 나라에 군림하여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지금 이후로 영원히 정의와 공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아기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통치할 것을 말합니다. 그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영원토록 계실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이룬 것입니까?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이렇게 마태복음 1장은 임마누엘로 그 문을 엽니다. 하늘에 계셨던 그 하나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원해 오셨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도 왔다가 가지만 하나님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기 위해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이 땅에 계시면서 임마누엘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고통과 절망의 자리에 주님이 오시면 그곳은 기쁨과 환희로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포도주가 모자라 중단된 잔치가 시작될 수 있고, 질병과 귀신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치유와 회복의 은혜가 임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 계시면, 죽음으로 인해 절망한 자들이 부활의 소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비록 잠시였지만 임마누엘의 실체를 보여주시고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감람산에서 하늘로 승천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8:18–20
18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19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있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임마누엘로 시작된 마태복음이 임마누엘로 끝맺고 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은 지금 하늘보좌 우편에 계십니다. 그렇다고 임마누엘의 은혜가 멈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부재한 동안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하나님은 성령님입니다.
이제 곧 우리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에덴에 있었던 아담과 하와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 아브라함, 모세,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도 보지 못했던 하나님, 그 하나님을 우리는 볼 것입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사 자녀 삼기 위해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신 그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얼마 전
아내가 거실에서 우쿨렐레를 치며 찬양을 부르다가
눈물을 흘립니다.
찬양이 끝나자
커피를 마시던 제 앞으로 와서 이런 말을 해요.
중학교 시절
서너 명의 교회 친구들과 모여 찬양을 자주 했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아이는 피아노를
기타를 칠 줄 아는 아이는 기타를 치며 찬양을 불렀답니다.
그리고 찬양 후에는 항상 자신이 은혜받은 이야기를 했다고 해요.
그 시절, 부모님은 인테리어 사업으로 바쁜 나머지
자신을 돌봐줄 여유가 없었다고 합니다.
때로는 우울했고, 때로는 외로웠던 그 시절,
자신을 붙잡아 준 것은 교회였고, 친구들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자신을 붙들어주신 분은
내 곁에 계셨던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답니다.
그때 그렇게 함께 찬양을 불렀던 친구 중 두 명은 목사가 되었고,
자신은 사모가 되었답니다.
우쿨렐레를 치며 찬양을 부르다 그 생각에 눈물이 난 것입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앞으로도 우리 곁에 계실 것입니다.
사랑은 함께 있어 주는 것입니다.
절망과 고통의 땅, 죽음으로 끝나는 허무한 땅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