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송구영신 예배
로마서 8:28 (NKRV)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022년 한해의 마지막 날 이렇게 모였습니다.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계십니까?
감사한 마음일 것입니다. 후회도 있겠지요. 기뻤던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힘들었던 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교회적으로 감사한 것은 현장예배가 회복되어 이렇게 모여 예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하지 못했던 야외예배, 수련회, 성탄행사 등을 할 수 있었고 그때마다 감사와 기쁨이 넘쳤습니다. 두 분의 장로님과 권사님이 세워졌고 조직교회로서의 기틀을 다지는 한해이기도 했습니다. 그 가운데 시행착오와 갈등도 있었습니다.
성도들 가운데는 건강의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셨습니다. 자녀들의 정서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아이들의 신앙과 학업 때문에 눈물로 기도하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인간관계들 속에서 갈등과 어려움을 느끼는 분들도 있고, 자신의 부족과 연약함 때문에 힘들었던 분들도 있습니다.
올 한해 감사한 것도 많았지만, 또 힘들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왜 우리 인생은 이토록 힘들고 어려운 것일까요? 예수 믿고 만사형통할 수는 없는 것일까요?
처음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을 때 그 기쁨이 영원할 수는 없을까요?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인생의 여정 가운데 과연 꽃길은 있을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는 순간 모든 것이 변하고 달라질 것 같았는데 그 기대와 소망은 잠시뿐입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예수 믿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그래도 뭔가 달라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여전히 가정내의 갈등이 있고, 몸이 아파 우울한 날은 지속되고, 자녀들이 부모의 기대를 저버려 절망하는 일들이 반복됩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지켜보며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안타까움 속에서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삶의 고난 속에서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까?
왜 우리의 고난은 여전히 지속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그 해답을 찾아가길 원합니다.
1.예수를 믿는 것은 성육신의 삶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좀 어려운 말이지만 일단 머리에 새겨놓읍시다.
성육신이 무엇입니까?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분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의 전능하심으로 우리를 천국으로 곧장 인도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악과 고난이 창궐한 이 땅에 보내시고 인간이 겪는 모든 고난을 겪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체험한 고통의 절정은 십자가 죽음이었습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을까요? 꼭 십자가의 방식이어야 했을까요?
그분의 전능의 능력으로 자 너희들 내가 다 용서해 줄게 이제 내 나라에 와서 평안히 쉬어라 이렇게 하실 수 없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십자가라는 우리가 보기에 미련한 방식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성육신은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에서 비롯된 구원의 방식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고, 그 구원의 방법은 의로워야 하기에 하나님이 자신이 죄인의 자리에서 서서 심판을 받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으로 인해 예수님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죄인들과 함께 거하시며 인생의 모든 고난과 아픔을 겪으셨던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부활후 승천하기 전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20:21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람이 되어 이 땅에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성육신하신 것처럼, 우리도 성육신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통과 고난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 보내어 예수께서 체험한 모든 것들을 체험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구원하여 곧장 천국으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분의 목적은 우리를 신성한 성품으로 빚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후서 1:4 (NKRV)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신성한 성품, 즉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자가 되게 하고 싶은 것입니다.
“참여한다”는 단어가 “코니노노스”입니다. “코이노니아”에서 파생한 단어입니다. “코이노니아” 가 무엇입니까? 교제입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와 교제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성품이 신성해야 합니다. 품격이 떨어진 사람과 교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참된 교제는 격이 맞아야 하거든요.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신성한 신격으로 성장시켜 우리와 교제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이 바로 성육신의 방식입니다. 즉 우리를 세상 속에 보내 그 속에서 모든 악과 고난들을 체험하며 그 속에서 훈련과 연단을 받아 하나님을 닮은 성품으로 세우신 다는 것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그들은 곧장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여보내실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광야 40년을 떠돌게 됩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기로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결정을 주동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나머지 사람들로 들어가게 하실 수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광야에서 40년을 떠돌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신명기 8:2–3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엇을 깨닫게 하려 하심입니까? 사람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심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목적이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이루며 사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로마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4:8
8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 삶의 목적이 오직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내 욕망과 내 뜻을 우리는 삶이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내가 없고 오직 내 안에 예수만 살아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육신에 동참하는 삶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를 여전히 악이 판치며 고난이 끊이지 않는 인생 속에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힘든 것입니다. 형통한 날도 있지만 절망의 순간도 있고, 기쁨의 순간도 있지만 슬픔의 순간도 있는 것입니다.
그 절망과 슬픔의 순간 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발견합니다. 형통한 날보다 고난의 순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합니다.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주님의 능력의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만일 우리 삶에 고난이 없었다면 교만한 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난 속에서 우리를 연단 하셔서 신성한 성품들로 빚어가시는 것입니다.
2.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신성한 성품, 즉 예수님을 닮은 자들이 되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누리는 것이라면, 이것에 대한 구체적인 성품은 믿음 소망 사랑입니다.
이러한 성품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성품이고 이것을 우리 안에서 창조해 내십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이고 그 분의 뜻이 이뤄지길 소망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희생과 섬김을 말합니다.
이러한 신의 성품을 우리 안에 창조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믿음을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까? 내가 믿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믿음은 은혜로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그때 우리는 죄인이었고 교만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셨고 신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믿음은 어떻게 자랐습니까? 믿음은 공부해서 자라지 않습니다. 삶의 고난 속에서 자랍니다.
내 지혜와 능력으로 도무지 해결 할 수 없는 삶의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주변의 의지할 것들을 찾아봅니다. 그때 우리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우리 안에 믿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믿음을 견고케 하시는 것입니다.
예화) 전에 의성이가 희수랑 놀다가 입술이 터지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냥 터진 게 아니라 뚫어질 정도로 심했습니다. 구급차가 왔고 제가 의성이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아이는 구듭차에 누워 제 손을 잡았고 저도 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응급실은 분주했습니다. 이것저것 검사 후에 수술이 진행되었습니다. 마취하고 입술을 꿰매기 시작합니다. 마취했지만 고통스러워했습니다. 누워있는 의성이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의성이는 붙잡고 있었던 제 손을 더 꽉 쥐었습니다. 그렇게 수술이 마무리되었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늦은 저녁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서도 아이는 제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의성이는 저를 좋아합니다. 그때 그 고통의 순간 자신이 붙잡은 아빠의 손을 잊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 신뢰는 삶의 고난의 순간 우리를 붙들어준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할 때 생깁니다.
로마서 1:17 (NKRV)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더 깊어지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가졌던 작았던 믿음이 삶의 여러 가지 고난을 경험하며 깊어지고 커진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소망은 어떠합니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소망의 성품으로 우리를 빚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소망의 성품이 무엇입니까? 오직 하나님만을 기대하고 소망하는 자들로 빚으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로 소망을 삼고 살았던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물질적 풍요를 소망하고, 좀 더 좋은 집, 고급 승용차, 아름다운 외모, 학력 등을 소망했던 우리가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자들로 변해갑니다.
그 과정 가운데 하나님은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로마서 5:3–4 (NKRV)
3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우리는 삶의 환난을 통과하며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인내하며 환난을 견딥니다. 그 인내가 우리를 연단 합니다. 철을 연단 하며 강해지는 것처럼, 인내하며 연단 되어 강해집니다. 전에는 조그만 어려움에도 두려워했는데, 이제는 담대해집니다. 삶의 어려움과 맞닥뜨려도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저는 올 한해 저 자신이 많이 연단 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만큼 힘들고 버거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연단의 시간을 거치며 저 자신이 좀 더 견고하고 단단해짐을 느낍니다.
이러한 연단들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소망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과정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환난과 인내 그리고 연단으로 이어지는 이 과정이 우리 삶에 필연적이지만 격을때마다 힘이 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속히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다리게 됩니다.
마치 군인이 제대할 날을 기다리듯 우리는 이 땅의 연단과 훈련이 끝나고 주님의 나라에 들어가길 소망합니다. 만일 이 땅에 고난이 없다면 우리를 결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영원히 살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환난 속에 인내하고 인내 속에 연단 되면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자들로 세워지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의 성품으로 빚어 가십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우리를 사랑의 사람들로 빚어가십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사랑, 그것은 희생과 자기 포기와 섬김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위해 끊임없이 희생하고 내가 마땅히 주장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며, 나의 유익이 아니라 상대의 유익을 위해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 삶에 고난이 허락됩니다.
사랑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품으므로 만들어집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5:46 (NKRV)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예수님께서 명하신 사랑은 나를 미워하고 조롱하는 자를 품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44 (NKRV)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말합니다.
마태복음 5:45 (NKRV)
45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하나님 자신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악인들, 즉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에게 까지도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사람들로 만들어 가시기 위해, 우리 삶에는 늘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들을 사랑해 보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우리에게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어떠한지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반대하는 사람들, 나를 무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 그들까지도 품게 하시면서 사랑의 사람들로 변화시켜 가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가정으로 우리를 묶으셨습니다. 가정으로 묶이면 도망가지 못하거든요.
내가 가장 감당하기 힘든 성품의 아이들을 키우면서 사랑을 배우게 하십니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성격의 배우자와 살게 하시면서 사랑을 배우게 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보십시오. 내 삶이 이렇게 힘든 이유는 바로 이러한 것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성품에 이르길 원하십니다. 이것을 당장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라는 삶의 정황들 속에서 고난을 겪으며 성장시키십니다.
로마서 8:28 (NKRV)
28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올 한해를 버티며 이 자리까지 오신 여러분,
수고 많았습니다. 우리 자신을 기특하게 여기세요. 참 잘했다. 칭찬해 주시고 위로해 주십시오. 한해 동안 인생을 살아가며 조금 더 주님의 성품으로 성장하셨을 것입니다.
내년에도 우리 삶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대하는 것은, 또 우리안에서 이 일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입니다.
빌립보서 1:6 (NKRV)
6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