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성탄절.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예수님
요한복음 1:14–18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5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언하여 외쳐 이르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자께서 오심을 기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우리의 구세주께서 2천 년 베들레헴의 한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저자는 사도 요한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 요한서신과 요한계시록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요한복음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임을 증언합니다. 자신이 3년 동안 믿고 따랐던 예수가 사람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임을 알게 되었고 이를 증언하기 위해 펜을 든 것입니다. 그는 마지막에 글 쓴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0:31
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는 주 후 85~9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의 노년 때입니다. 젊을 때 쓴 것이 아니라 인생의 말년 쓴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실 때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운명하시기 전 요한에게 어머니 마리를 부탁합니다.
요한복음 19:26–27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께서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한 것은 요한이 가장 오래 살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요한은 주 후 100년경 사망한 것으로 추정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평생 증거했던 예수님을 기록으로 남겨 많은 사람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펜을 들어 요한복음을 써내려 나갑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 그 예수님을 기억하면서 이렇게 요약하여 서론에 기술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말씀’은 원어로 ‘로고스’입니다. 로고스는 철학적인 용어로 만물의 근원을 말합니다. 헬라철학은 만물은 로고스로부터 생겨났다고 믿었습니다. 로고스는 만물의 창조주이며, 만물을 운행하는 법칙이며 지혜입니다.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그러한 신적 존재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요한은 헬라 철학에 영향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는 그 로고스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 로고스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와 같은 사람이셨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입니다. 50퍼센트는 하나님이고 50퍼센트는 사람이 아닙니다. 100퍼센트 하나님이시고 100센트 사람입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사람이십니다. 이것은 우리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요한은 복음서에서 자신을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라고 소개합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때 예수님의 곁에 기대어 있을 정로도 살갑게 대했습니다.
요한복음 21:20
20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그런 그가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 이렇게 반응을 보입니다.
요한계시록 1:17
17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요한은 예수님의 인성을 대할 때는 친밀했지만 신성을 대할 때는 그 영광을 바라볼 수 없을 정도로 경외심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보았던 사람 중에 바울도 있습니다. 그는 예수 믿는 자를 붙잡아 고문하고 죽이는 일을 했던 사람입니다. 그의 생각에 십자가에 죽은 예수라는 청년을 하나님으로 믿는 것은 이단 중에서 이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 처형으로 죽은 것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죄와, 자신을 메시라로 주장하며 민중을 선동하여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려는 민중선동 죄로 죽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신명기의 말씀대로 나무에 달려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자를 구약성경에 예언한 메시아로 믿는 자들을 매우 불경하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메섹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붙잡으러 가고 있었습니다. 다메섹에 거의 도착했을 즘 예수님을 만납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때의 일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22:6–7
6가는 중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에 오정쯤 되어 홀연히 하늘로부터 큰 빛이 나를 둘러 비치매
7내가 땅에 엎드러져 들으니 소리 있어 이르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승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눈을 들어 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빛으로 둘러 있습니다. 바울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력한 빛을 발산했던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요한복음을 기록하며 그 예수님, 완전한 사람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신 분을 기억합니다. 그 분은 로고스, 즉 하나님이 육신,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이 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까?
오늘 우리가 이것을 기뻐하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그냥 하나님으로 계시면 안 되는 것입니까? 왜 굳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되지 않더라고 성자 예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는 반드시 심판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모두 죄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 아래 있습니다. 그 심판 때문에 결국 죽게 되고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길 원하셨습니다. 그러려면 누군가 심판을 대신 받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는 심판 받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에 대신 죄를 대신 담당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석가모니, 간디, 등 그 어떤 성인이라 추앙받는 사람들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인류 바깥에서 구원자가 와야 하는 것입니다.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기 위해 물 바깥에서 구조의 손길이 와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죄인을 구하기 위해서는 죄가 없는 인류 바깥의 존재가 인류 안으로 들어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는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공의는 사람의 죄의 심판은 사람이 담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짐승이나 다른 피조물로는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할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 사람의 죄가 사해지지 않습니다. 내 죄를 용서받기 위해 수천 마리의 흠 없는 양을 드려도 사해지지 않습니다. 사람의 죄는 사람이 담당해야 하고 그 사람은 죄가 없어야 합니다.
따라서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이어야 하고, 그 존재는 죄가 없어야 합니다. 또한 온 인류의 죄를 담당해야 하므로 신적 존재여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심판받으시기 위해 사람이 되기로 하셨습니다.
우리 죄를 사하고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 하나님이 사람이 되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인의 자리에 서서 죄의 심판을 받기로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로고스가 육신이 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계획은 언제 세워졌을까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후일까요? 아니면 그들이 죄를 범하기 전일까요? 타락 전일까요? 타락 후일까요?
전에도 말씀 드린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그들이 타락할 것을 아셨습니까? 모르셨습니까? 전지하신 하나님이 모르실 수 없습니다. 그들이 타락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타락한 인류의 구원 계획은 타락 전에 세워진 것입니까? 타락한 후에 세워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세워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 타락했으니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하여 계획2을 실행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완전합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기 전에 이미 그들의 타락을 아셨고, 그들을 통해 태어나는 모든 인류가 죄로 물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러한 인류를 구원할 계획을 이미 창세 전에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3:15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뱀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너는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지만,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를 박살낼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원시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복음, 우리를 구원하는 복된 소식이 이미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선포된 것입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은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뱀이 후손은 사탄을 의미합니다. 여자의 후손으로 오셔서 사탄으로부터 상처을 입었지만 마침내 사단의 머리를 박살 내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입니다.
여자의 후손, 즉 자연적 출생을 통해 태어난 어떤 사람이 사단의 세력을 완전히 물리치고 승리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미 아담과 하와가 타락했을 때 하나님은 당황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계획된 구원 계획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옷을 벗었음을 깨닫고 부끄러움을 느끼던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그들의 죄를 가릴 수 있도록 어떤 짐승이 희생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앞으로 어떠한 희생물을 통해 인류의 죄가 가려질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시는 구원계획은 이미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 줄 아십니까?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모든 계획을 세워 놓으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는 것조차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습니다.
에베소서 1:4–5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언제 여러분을 택하셨다고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창세전이 언제입니까? 우주 만물을 창조하기 전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만들어지기 전입니다. 그때 이미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어떤 존재로요? 그분의 자녀로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미 창세 전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즉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구원할 계획이 세워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되신 하나님이 2천년 베들레헴의 마굿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우리의 구원자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 날이 얼마나 복되고 기쁜 날입니까?
누가복음 2:10–11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천사들이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라고 말합니다. 구세주가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보다 기쁜 소식이 있을까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할 구세주가 오셨습니다.
참 하나님이심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사도요한은 그 예수님을 기억합니다. 그분과 3년동안 함께 있으면서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
14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에게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충만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분이십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받을 자격이 없는 자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호의,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선물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새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큰 잔치를 베푸는 것. 은혜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지요.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계속해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 은혜는 중단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의 원천입니다. 끊임없이 은혜가 샘솟습니다. 그 은혜로 우리를 선택하셨고, 구원하셨고 지금 이 자리까지 이끄신 것입니다. 은혜가 아니면 우리 삶은 설명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해석할 때 몇가지 틀이 있습니다. 첫째, 인과율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사는 것은 과거에 했던 것에 대한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과연 그렇습니까? 똑 같은 상황에서도 그 결과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인과율로 우리 인생은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연입니까? 우리 삶에 일어나는 일들은 우발적으로 일어나고 우연의 연속입니까? 그렇지도 않거든요.
우리 삶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 삶을 주관하십니다.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선물을 주십니다. 인과율이 아닙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도 은혜로 받은 것이지 내가 잘해서 받은 것 아닙니다. 은혜입니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것 아니요. 은혜입니다. 우리 삶은 은혜로 밖에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 은혜가 어디로부터 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에게 은혜가 충만합니다.
요한복음 1:16
16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요한복음 1:16
16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복음 1:17 (NKRV)
17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우리가 신명기를 배웠지만 법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법은 지키지 않는 자에게 처벌만이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신명기의 결말부분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은혜를 말씀합니다. 너희가 우상숭배해도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용서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것은 법이 아닙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졌습니다. 율법은 내가 잘해야 구원받고, 내가 순종해야 복받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그렇지 않아요. 한 것이 없는데 복을 주십니다. 잘 한 것이 없는데 좋은 것들을 베푸십니다.
그래서 여러분, 은혜를 많이 받으셔야 해요.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길 기뻐하세요. 왜냐하면 은혜가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가 누구한테서 옵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옵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시공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것 자체가 고통입니다. 감옥에만 가도 답답한데 하물며 하나님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자기 포기이고 자기 비하입니다. 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 동기는 사랑이고요. 그 결과는 은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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