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 평화의 소식
누가복음 2:8–14
8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9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10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12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13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심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작년에는 함께 모여 음식을 나누고, 선물교환을 하고, 한복을 입은 성도님들의 신명나는 찬양으로 기쁨을 나누었지요. 또 바자회도 얼마나 즐거웠습니까? 그러나 올해는 이와 같이 조용한 성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많이 아쉽습니다.
그러나 함께 모여 성탄의 기쁨을 나누지 못한다고 해서 성탄의 의미와 가치가 퇴색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모이든 모이지 않던, 풍성한 행사를 하던, 그렇지 못하던 성탄은 우리에게 기쁨의 날이고 감사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구세주께서 이 땅에 오신 장면을 보면서 성탄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최근 여러분들이 들은 소식 중에 가장 기쁜 소식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소유의 아파트가 시세가 많이 올랐다는 것이 기쁜 소식일 수 있습니다.
건강검진에서 무언가 보여서 정밀검사를 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는 소식이 기쁜 소식입니다.
암으로 고통 받는 분이라면 치료제가 개발되었다는 소식은 기쁜 소식입니다.
수험생을 둔 부모님들께서는 수능성적이 잘 나왔다는 것이 기쁜 소식일 것입니다.
대학 합격의 소식은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쁨의 소식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소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는 소식입니다.
이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은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밤에 양떼를 치고 있었는데 천사가 영광중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그렇다면 이것이 왜 큰 기쁨의 소식일까요? 구주가 태어나신 것이 왜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될까요? 아니 온 백성에게 기쁨이 되는 것일까요?
현 시국에선, 코로나로 인해 온 세계가 신음하고 있는 이 때라면, 코로나 백신이나 치료가 개발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의 소식일 것입니다. 더 이상 코로나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은 곳도 마음껏 갈 수 있게 된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소식은 바로 그것입니다.
“코로나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여러분, 코로나로 인하여 더 이상 속박당할 필요가 없습니다. 백신과 치료제가 개발되었으니 이것만 먹으면 코로나의 위협으로부터 자유하게 됩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빨리 그 날이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코로나 바이스러스로부터 자유하게 된다고 하여도, 또 다른 변이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진화할 것입니다. 더 강력하고 교활하고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계속해서 우리를 위협할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예방접종을 하는데 보통 몇 개나 맞을 것 같습니까? 아마도 다 잊어버리셨을 거예요. 처음 BCG결핵으로 시작해서 B형 간염 3회, 뇌수막염 3회, 소아마비 3회, 폐렴구균 3회, 디프테리아/파상풍/백일해 3회, 수두 1회, 홍역/유행성이하선명/풍진 1회, 일본뇌염(생백신) 1회 , 일본뇌염(사백신)1회, 인플루엔자 독감주사 매년 맞아야 하구요, 고위험군에 한하여 장티푸스도 맞아야 합니다. 12세까지 이것을 다 맞아야 합니다.
이제 하나 더 추가 되겠죠. 코로나 백신입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요?
점점 늘어나겠죠. 줄지는 않습니다. 계속 늘어납니다.
당장에는 코로나 바이러스로 부터의 자유가 절실하지만, 그래서 백신도 치료제도 개발되겠지만, 또 다른 바이러스가 우리의 일상을 위협할 것은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 큰 기쁨의 소식은 코로나로 부터의 자유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한 것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그것을 해결할 때 비로소 우리는 자유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악과 고난의 현실입니다. 세상이 악합니다. 얼마나 악합니까? 점점 더 흉악해져 갑니다. 세상이 악한 것은 당일의 뉴스면의 사회면에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또 고난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당하는 고난. 질병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 사람과의 관계에서 겪는 고난, 그리고 죽음의 고통.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 까지 흉악한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며 살아갑니다.
여기서 벗어나고자 아무리 발버둥 치고 노력하지만,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왜 세상이 이리 악하고 고난이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왜 이런 것입니까? 무엇 때문에 세상은 점점 더 악해져가고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끊이지 않는 것입니까?
그 근본적인 문제는 바로 인간의 죄입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인류에게 자유는 없습니다.
죄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폭력, 절도, 사기, 살인 와 같은 것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죄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 모시기를 싫어하는 것이죠. 내가 내 삶의 주인 노릇하려고 할 때 그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그러한 마음의 상태로부터 시작하여 생각에서 말로 말에서 행동으로 확장됩니다.
그리고 마음의 상태로부터 시작된 죄가 생각에서 말로 말에서 행동으로 확장되면서 그 파괴력은 강력해집니다.
이러한 근본적인 죄, 자기중심성, 자기 독립의지는 인간을 비참한 지경으로 추락시켰습니다.
처음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유혹할 때 사단이 던진 질문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마치 하나님이 인간의 행복과 자유를 강제하고 구속하는 것으로 여기게 했습니다.”
물고기가 물속에 있을 때 자유하듯이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 자유롭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말고, 순종하지 말고, 네가 네 인생의 주인으로 서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같은 유혹에 넘어갑니다. 그리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행복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으로 서게 되면 자유로울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자유자가 될 줄 알았는데 사단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노력해도 벗어 날 수 없는 사단의 지배아래 갇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선하게 살려고 노력해도 죄를 지으며 살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의 참된 자유를 상실하고 죄의 노예요 사단의 속박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에게 악과 고난의 삶이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함이 가장 큰 복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이 두려워졌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하는 것이 기쁨이었는데 이제는 서로 경쟁하며 착취하는,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동물적 삶의 방식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죽음이라는 참혹하고 냉정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때는 인류가 인간 이성을 개발하고 과학을 발전시키면 유토피아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법과 제도로 악을 제어하고 교육을 통해 도덕을 함양 시키고 의술과 과학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마침내 죽음까지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지금의 현실을 보십시오. 과연 인간은 선해졌습니까?
의술이 개발되어 평균수명은 늘어났지만, 늘어난 시간만큼 인간은 행복해 졌나요?
인류역사 가운에 지금처럼 최고의 교육과 과학과 의술이 진보한때가 있었습니까?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바이러스가 삽시간에 전세계에 퍼졌고 현재까지 사망자가 1백7십만명에 이릅니다.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노력한다고 이러한 죄와 그 결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요?
인류가 역사 가운데 죄의 문제를 해결한 적이 있는가? 없습니다.
교육이나 법과 제도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정부가 강력한 법과 제도를 통해 통제하려고 해도 죄는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흉악함과 파괴력이 증폭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절망적인 현실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악과 고난의 삶이 시작되었고, 이것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는 것. 이것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참혹한 현실입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란 이러한 절망적이고 참혹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 외에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기쁨을 줄 수 있는 소식은 없습니다.
성경에는 질병에서 고침 받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또한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건강해져서, 또는 살아나서 과연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요?
아닙니다. 주어진 현실은 여전히 괴로웠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악과 고난에서 벗어날 길은 없거든요.
인간에게는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할 수는 없는 것이죠.
따라서 인간의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인간세상 바깥에서 와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해 주시지 않으면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타락한 그 자리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창세기 3:15
15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죄의 문제를 여자의 후손을 통해 해결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만,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될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구약의 모든 성도들이 과연 이 말씀을 이해했을까요?
여자의 후손이라면 사람인데 사람이 어떻게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인데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그 실체가 점점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7:14
14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여인의 후손, 그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죠. 곧 태어날 여인의 후손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즉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기가 엄마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태어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처녀의 뱃속에서 잉태되어 10개월을 채우고 이 땅에 갓난아기로 태어나신 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의문이 듭니다.
왜 무엇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야 하는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면, 사람이 되지 않고도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사람이 지은 죗값에 대해서는 사람이 치루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책 때문에 다른 피조물을 형벌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또한 어떠한 피조물이라도 단지 피조물로서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진노의 짐을 감당할 수도 없고, 다른 피조물을 거기에서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참 사람이고 의로운 분이셔야 하며, 동시에 참 하나님이고 모든 피조물보다 능력이 뛰어나야 합니다.
이 길 외에는 없습니다.
이와 같이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참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아기로 태어나 죽을 때 까지 인생의 모든 악과 고난을 다 겪으시고 또한 사람으로서 죄인이 받을 형벌을 십자가에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또한 참 하나님으로서 죄의 권세를 이시고 부활하여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을 여신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베들레헴 땅에 처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거룩한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이 소식보다 더 기쁜 소식이 과연 있을까요?
천사들이 말합니다. 10절에 보면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목자들이 무서움의 이유는 천사가 영광중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신적존재 앞에 항상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것은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사가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더 이상 죄와 그것이 주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무서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섭습니다. 죽음이 무섭고, 이별이 무섭고, 외로움이 무섭습니다. 질병으로 인한 고통이 무섭고 코로나에 걸릴까 무섭습니다. 그러나 천사가 말합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1절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우리의 구세주가 2천년에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겪는 인생의 모든 고통을 다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하늘로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순절에 성령님을 보내주셨고, 주님의 영인 성령님께서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사단의 종노릇 하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무엇이 무섭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2:14
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그러기에 예수님의 탄생은 하나님께 영광이 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여러분과 저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가 모든 죄와 사망 권세에서 해방되어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코로나로 부터의 자유와 견주겠습니까? 이것은 모든 죄와 사망의 고통으로 부터의 자유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무섭지 않습니다.
인간의 극한의 두려움의 대상인 죽음을 정복했기 때문입니다. 죽음 넘어 에는 부활이 있고 부활이후에는 영생이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 악과 고난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의 축복,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축복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믿는 심령 속에 평화가 깃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태껏 이런 성탄절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이러한 때에 성탄의 의미가 더욱 강력하게 큰 기쁨의 소식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가장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임마누엘입니다.
그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평생을 살아가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