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기타

21-04-07 11:57

2021. 부활절 - 사랑하는 자의 죽음과 부활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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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의 죽음과 부활

 

요한복음 11:25–26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그는 주님이 사랑했던 자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죽었으니 모두가 당황스러웠습니다. 어떤 질병인지는 모릅니다. 그의 죽음은 급작스러웠습니다. 누이었던 마리아와 마르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십니다. 무덤을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 하심으로 죽은 생명을 살려내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가 부활이요 생명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은 시간을 지체하심으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십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와 마르가 그리고 나사로 가정을 사랑하셨습니다. 

3절에 보면,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아니다” 

동생 나사로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마리아는 즉시 사람을 예수님께 보냅니다. 마리아는 주님이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고 전하게 합니다. 이들 가정은 주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마리아 가정뿐만 아니라 주변사람들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주님의 사랑받는 가정에 죽음의 위기기 닥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오시면 해결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뜻밖의 반응을 보이십니다. 즉시 나사로에게 가지 않으시고 이틀을 지체하십니다. 

6절을 보시면,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의 이러한 행동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가정 아닙니까? 빨리 가서 그를 고쳐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날 목회자가 예수님처럼 행동했다면 큰 시험에 들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닥친 위기에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희 질병의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자녀들이 겪는 문제를 즉시 해결해 주십시오. 하나님, 우리 가정의 경제적 어려움을 즉시 해결해 주십시오. 그러나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보낸 사람이 혼자 돌아왔을 때 마리아의 마음은 무너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함께 오지 않았나요?” 

“예수님께서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오신 답니다”

이 말을 들을 때 여러분이라면 어떻겠습니까?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시기에 그러신가?” “내 동생이 지금 죽어 가는데 왜 오시지 않는가?” 한 가닥 기대는 절망으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체하심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한 목적과 계획을 가지고 이 사건을 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 

4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사랑하는 자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들은 예수님은, 그의 죽을 병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임을 알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될 것을 아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심으로 앞으로의 일들을 진행해 가십니다. 

 

예수님은 이틀을 지체하시고 베다니로 가십니다. 그 사이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17절에 보면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이 이틀을 유하시고 오셨으니까 오는데 이틀이 소요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즉시 오셨어도 죽은지 이틀이 됩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틀을 더 유하셨을까요?

17절의 무덤에 있은지 나흘이라는 표현은 완전한 죽음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시 사람의 죽음을 의학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는 죽은 줄 알고 있다가 살아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죽은 지 하루가 지나면 입관을 합니다. 조선시대에는 삼일을 기다렸다가 입관했습니다. 그것은 다시 살아날 가능성 때문입니다. 의학적인 사망판정을 하지 못하던 시대에 사망을 완전히 판단하는 것인 삼일째입니다. 사흘째는 완전한 사망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이때를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살리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자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삶에 닥친 문제 앞에서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 그 또한 하나님의 뜻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과 다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이 우리의 기대와 다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선한 뜻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있음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즉각적인 응답이 없을 때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제일 잘 아십니다.

마태복음 7:11 

“11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엊그제가 셋째 형원이의 생일이었습니다. 결혼하고 18년 만에 배 아파 낳은 아이입니다. 왜 하나님은 그동안 아기를 주시지 않았을까? 남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이 왜 우리 가정에는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을까? 그러나 이제는 압니다. 하나님은 형원이를 만나기 전에 희수와 의성이를 가슴으로 낳게 하셨습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일입니다. 주일 아침에 의성이만 먼저 데라고 왔습니다. 방순애집사님께서 자주 간식을 챙겨주시는데 마카롱케익을 세 개 준 것입니다. 의성이가 먹지 않고 있다가 형이 오자 함께 나눠먹은 것입니다. 그 모습이 기특해보였습니다.  희수가 묻습니다. 

“의성아, 너 이거 안 먹고 형 올 때까지 기다린 거야?”

“어”

“왜”

“우린 가족이잖아!”

    

의성이 입으로 우린 가족이잖아 라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래 너희는 가족이지. 각자가 다른 배에서 태어났지만 우리는 한 가족이지,’ 

하나님께서는 희수와 의성이를 키우면서 연약한 아내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조금만 추워도 온몸을 떨었던 아내가 더 이상 추위를 타지 않았습니다. 만성적인 불안감도 사라졌습니다. 만일 결혼하고 아이가 바로 생겼다면 망가진 몸과 마음으로 행복하게 키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아시고 18년 동안 아이를 주시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 과정 가운데 희수와 의성이를 만나 가족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지체하실 때 다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2. 주님은 사랑하는 자의 아픔에 비통해 하십니다. 

예수님은 베다니 근처까지 오셨습니다. 마리아의 가족은 베다니에서 부유층에 속했습니다. 당시 사람이 죽으면 먼저 향품 처리하여 돌무덤에 안치합니다. 이후 7일간의 장례식이 진행됩니다. 19절에 보면 많은 유대인들이 애도하려고 모였습니다. 서양의 경우 장례식에 유가족들은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애씁니다. 그들의 문화는 과도하게 슬퍼하지 않는 것이 예의입니다. 그러나 유대사회는 슬피우는 것이 예의입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는 곡소리가 멈추지 않도록 했습니다. 유대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장례식에는 전문악단이 고용되었고 장례식 내내 슬픈 음악을 연주했습니다. 아무리 가난한 가정도 플롯연주자를 고용하였습니다. 마리아 가족은 여유가 있으니 악단전체가 연주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곡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도 있어서 장례식 내내 곡소리를 내었습니다. 이를 통해 유가족이 슬픔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예수님은 베다니 근처에서 아련하게 들리는 장례연주소리와 곡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마르다는 즉시 달려 나갑니다. 

21절에 보면,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 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늦게 오심을 원망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고 나사로는 곧 죽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모든 것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서로 이 말로 서로를 위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뒤늦게 예수님을 만난 마르다 역시 동일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1:32 

32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그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죽음의 문제 앞에서 예수님의 함께 하심을 간절히 바랬던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보인 자세는 원망이 아닙니다. 그녀들은 깊은 슬픔 속에서 예수님을 의지했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르다가 말합니다. 

요한복음 11:22 

22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이 말은 그녀가 지금이라도 예수님이 죽은 나사로를 살릴 것이라는 기대로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곧 이어지는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살아나리라고 말씀하셨지만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1:24 

24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종말 때에 부활한다는 신앙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녀는 조금 후에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릴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비록 죽음이라는 슬픈 현실가운데 있지만 예수님을 깊이 의지하고 있음을 표현한 말입니다.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마리아가 도착했고 그를 따라 조문객들도 예수님 앞에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보자 마리아는 통곡하였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유대인 조문객들도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습을 보십니다. 그리고는 심령에 비통히 여시기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요한복음 11:33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들의 아픔을 비통해 하시고 불쌍히 여기십니다. 3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38절에도 예수님께서 다시 비통히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비통해 하심 그리고 그 눈물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영어성경은 이 부분을 깊이 슬퍼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원문의 의미와는 다릅니다. 독일어 성경은 이 부분을 잘 번역했습니다. 그것은 “격분했다”는 의미입니다. 

 

슬퍼서 우신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조금 후면 나사로를 살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분노의 눈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의 분노를 눈물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은 왜 이토록 격분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분노는 죄의 결과인 죽음의 현실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성령님과 함께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지구를 창조하시고 그 안에 에덴동산을 두시고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랑스런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스바냐 선지자는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아기를 안고 눈 맞춤 하는 엄마의 마음입니다.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게 하실 만큼, 하나님께 우리는 너무나 존귀한 자녀들입니다. 

 

그 사랑스런 자녀들에게 죽음이라는 고통이 닥친 것입니다. 이것은 죄의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영생의 복을 받아야 할 우리가 죄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통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현실을 보신 것입니다.  

 

죽음은 슬픔을 넘어 비통한 현실입니다. 죽음은 우리를 사랑하는 주님을 격분시킬 만큼 비참한 현실입니다. 우리는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죽음은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해도 비참한 것입니다. 

저희 할머니께서는 신장염으로 20년을 약을 차고 사셨습니다. 5리터가 되는 약을 매일 4번씩 뱃속에 넣어야만 했습니다. 돌아가시기 전에는 발이 괴사되고 다리를 절단해야 했습니다. 죽음의 현실은 비참합니다. 10년 전 아버지께서는 폐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돌아가시 전 아버지의 소원은 “숨 한번 시원하게 쉬고 싶다”였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비참했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죽음의 현실로 인해 고통당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현실은 보신 것입니다. 그리고 분노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에 격분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분노 때문에 우리가 구원 얻은 것입니다. 주님은 이 사망의 고통가운데 비참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서도 우리의 비참한 현실을 잊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의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죽이는 자들을 감싸고 변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분노 때문에 십자가의 고통을 참아내신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이 큰 위로가 됩니다. 예수님이 슬퍼 우신 것이 아니라, 분노하셨다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의 이 지독한 사랑이 너무 감사합니다. 이것 때문에 나사로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들의 죽음을 결코 보지 못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을 반드시 살려 내십니다. 

 

3. 예수님은 사랑하는 자들 반드시 살리십니다. 

예수님의 숨소리는 거칠어 졌습니다. 나사로가 안치된 무덤을 향하여 가십니다. 그리고는 격분한 목소리로 외치십니다. 

“돌을 옮겨 놓으라” 

마르다는 평소와 다른 예수님의 감정적 반응에 평정심을 갖고 말합니다. 

“주여 죽은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리고는 공적인 기도를 드리십니다. 예수님의 공적으로 기도하실 때 듣는 자들을 염두두십니다. 즉 그들이 이 기도를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41–42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우리는 이 기도를 통해 지금 진행되는 모든 일들은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즉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은 예수님을 믿게 하려는 목적으로 특별히 이루신 일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부활이후에 나사로의 모습이나 그의 가족들의 반응에 대하여 주목하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님에게만 초점이 있습니다. 

기도가 끝나자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죽은지 나흘이 된 나사로는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걸어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풀어 놓아다니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죽은 나사로는 살아났고 역사가운데 첫 번째로 살아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주어진 삶을 살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은지 얼마 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은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살아나셨습니다. 이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고 감람산에서 승천하여 하늘로 올라 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늘 보화에 앉으셔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주님이시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믿을 때 부활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1:25–26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죽음의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도 예수님은 이상하리만큼 자신에게 집중하게 하십니다.  보통 장례식에 가면 유가족을 위로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동생의 죽음에 비통해 있던 마리아와 마르다에게 자신을 바라볼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도 “나를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도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자신을 믿을 것을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은 예수님께 집중하고 의지할 때만이 극복할 수 있고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 죽음의 고통을 피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비참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비참한 인생의 고통이라도 예수님을 집중하면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의지하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해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나사로 사건을 통해 알려주시길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당하는 고통의 현실을 비통해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 누구의 위로보다 더 강력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 죽습니다. 그러나 분노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부활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 모두는 우리를 살리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