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기타

20-04-14 11:34

2020 부활절/ 부활의 산 소망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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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4.12./ 부활의 산 소망

  

베드로전서1:3-9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5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6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으로 말미암아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도다
7너희 믿음의 확실함은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할 것이니라
8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우리 주님의 부활의 날을 맞이하여 예배하러 나오신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사람은 저마다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에 사람은 살아갑니다. 아무리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삽니다. 암에 걸려도 낳을 수 있다는 소망과 의지를 가진 사람은 삽니다. 그러나 소망이 꺾이면 죽습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은 소망에서 비롯됩니다. 소망은 미래에 될 어떤 일을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현재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다가올 미래에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현재는 부족하지만 곧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동안 어떤 소망들을 마음에 품고 사셨습니까?

우리는 미래에 이루어질 소망을 품고 현재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합니다.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현재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공부에 전념합니다. 부모들은 좀 더 넒은 평수에 아파트에 살기위해 현재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합니다. 또 자녀들의 미래에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해주고자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저축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가진 소망들이 한 가지씩 우리 삶에 이루어질 때 삶에 보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저축하여 넒은 평수의 신축 아파트에 입주할 때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의 자녀가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하여 목표한 대학에 합격했을 때 기쁠 것입니다. 직장의 직급이 올라가고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게 되면 만족감도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들이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다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소망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이제 며칠 후면 세월호참사가 6주년이 됩니다. 배안에 타고 있었던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미래에 이루어질 자신들을 꿈을 꾸며 살았던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소망은 불확실한 미래이지만 죽음은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나의 현실이 아니라 남의 일처럼 여기며 삽니다.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내가 죽는 다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며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음이라는 현실이 너무나 심각하기에 그것을 현실로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우리 삶을 짓누르기에 생각에서 밀쳐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죽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일찍 죽는 것도 아니고 젊다고 늦게 죽는 것도 아닙니다.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지만 죽는 것은 순서가 없습니다. 나는 오늘 죽을 수도 내일 죽을 수도 있습니다. 10년 후에 죽을 수도 30년 후에 죽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만 삶을 소중히 여기며 의미 있게 살 수 있습니다.


외국에 살 때 게라지세일을 자주 가곤 했습니다. 자신에 집에 안 쓰는 물건들을 차고에 내놓고 파는 것입니다.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이민 오신 어르신이 돌아가셔서 평소 쓰시던 물건들을 정리하는 게라지 세일을 한 것입니다. 이분이 이것저것을 둘러보다 고급스럽게 생긴 박스가 있어 열어보았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훈장이며 상장이며 감사패가 있더랍니다. 평생 많은 분들에게 존경을 받던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 박스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10불이랍니다. 
그분 인생의 업적들,  자랑거리들, 한때는 많은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고 그 흔적들이 담겨진 상자의 가치가 불과 10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저희 가족들은 집안에 아버지의 모든 사진첩이 사라진 걸 발견했습니다. 액자에 남겨진 사진을 제외하고 모든 사진첩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태웠거나 버리신 것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앞두고, 인생의 역사 같았던 그 추억의 사진들이 자녀들에게 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인생의 추억도, 한때의 명예와 평판도 모두 헛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전도서에서는 말합니다.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우리는 죽음 앞에서 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것인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꿈을 꾸며 붙잡고 있는 소망들조차도 헛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허무한 인생을 참 소망의 빛으로 밝힌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참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3절을 보시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라는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진 모든 소망들이 헛된 소망, 죽은 소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살아있는 소망, 참된 소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어떠합니까?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 동안 붙잡았던 소망들은 다 썩습니다. 썩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한때 젊음의 그 아름다움도 시들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생에 품었던 꿈과 야망들은 어떻습니까? 더럽지 않습니까? 내가 품은 소망이 얼마나 이기적이었습니까? 그것을 얻기 위해 누군가는 희생해야 되었던 것입니다. 내 인생에서 이룬 업적들을 어떻습니까? 다 쇠하는 것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썩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소망은 산 소망입니다.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사건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 번째로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는 것은 성도들이 부활할 것에 대한 첫 열매가 된 다는 의미입니다. 첫 열매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무에 첫 열매가 열리게 되면 그것은 이후 계속해서 열매가 열릴 것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이 부활할 것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죽음에서 살아날 것을 보장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현실인 것처럼 부활도 현실입니다. 우리 인생은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삶에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그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마다 사도행전을 공부하고 있는데요, 사도들이 전했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도들의 변화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군병들에 의해 붙잡혀 끌려 갈 때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뿐입니까? 주님을 따르던 모든 제자들이 다 도망쳤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을 때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 도마는 부활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말을 결코 믿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노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도 후에는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그들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도마에게도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못 박힌 손과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예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합니다. 이후 그도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위협과 모진 고문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까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믿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예수가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지만 부활했다고 믿는 신앙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법정에서 그 진위여부를 따진다고 해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습니다.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할 수 있는 것은 물적증거와 정황증거입니다. 물적증거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빈무덤입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예수님의 시신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많은 종교들은 무덤의 크기를 자랑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기독교는 무덤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정황증거는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제자들의 변화입니다. 그들이 죽음을 불사하고 예수의 부활을 전한 것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정황증거는 예수의 부활을 믿었던 사람들이 수 천년동안 지속되었던 안식일 예배를 접고 주일에 모여 예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부활의 날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제가 어릴 때 구정을 세지 않고 신정을 세려고 시도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몇 해 노력하다가 결국 다시 구정을 세고 있지 않습니까? 그만큼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날을 바꾸기란 거의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 평생 안식일에 모여 예배했던 그들이 주일에 모여 예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까요? 그것은 실제로 예수님께서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증거가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삶이 변화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다고 고백을 합니다. 그들이 바로 우리 아닙니까? 우리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삶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다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역사성, 사실성 때문에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여 예수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3:2–3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부활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십니다. 아마 죄도 없으신 그분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죄를 허물을 대신 감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비참함 가운데 허덕이며 살다가 결국 죽어 영원한 지옥 심판을 받게 되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누구기에 하나님은 이토록 나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보내시고 나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그 사랑에 순종하여 기꺼이 십자가의 길로 가신 예수님의 사랑 또한 우리는 측량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그동안 살아오면서 목숨을 내어 걸만큼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이 있습니까?
자신의 것을 다 희생하여 나를 사랑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우리가 나 자신을 잘 알지 않습니까? 내가 그만큼의 사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자입니까? 나조차도 실망하고 싫어할 때가 많은데, 그런 나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태초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그 사랑이 나에게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를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뒤안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얼마만큼 여러분에게 신실하셨습니까? 나는 주님 품을 떠나기도 했고, 때로는 많은 실망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신실하셨습니다. 허물 많은 베드로를 찾아오시고 용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찾아오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을 주셨던 주님께서 믿음이 없는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했지만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신실하셨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 죄를 사하시고 자신의 자녀 삼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얼마만큼 존귀하여 여기시는 것입니까?
사랑의 완성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소망은 우리와 함께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마음껏 그들에게 나누어주며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하나님의 소망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죄를 스스로 감당하기고 작정하셨고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를 통하여 죄 용서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마침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은 언제나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소망을 하나님 스스로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죽음가운데서 부활시킬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우리 눈에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나 애통함이 전혀 없는 새하늘과 새땅에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만유 안에 만유가 되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할 것입니다.

 

창조 때의 영광이 회복되어져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찬양과 경배할 날이 속이 올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활시킬 것입니다.

그 소망이 바로 우리의 소망인 것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생명을 바쳐 나를 사랑하신 그 분을,
여러분! 꼭 만나 뵙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그것 뿐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
아직까지도 우리가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소망하고 있다면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믿음의 눈을 들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한결같은 신실함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던 주님.
그 품에 안기는 것이 우리의 산 소망입니다.

그 소망 가지고 어려운 세상 힘 있게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