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증거와 소망
고린도전서15:3-11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11.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사 우리의 주와 그리스도가 되심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시간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를 살피고 그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2천 년 전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형으로 죽었던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한 것입니다. 과연 부활이 사실일까? 현대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부활은 단지 예수님을 추종하던 제자들이 만들어낸 신화적 이야기나 아니면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지만 부활했다고 믿는 확신과 신념의 문제는 아닐까요?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명확한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지 않았지만 부활했다고 믿는 신앙의 영역이 아니라, 실제로 이 땅에 오셨던 인간이 되신 하나님 그 분이 인간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무덤에 장사지냈으며 삼일 후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기독교신앙의 영역을 떠나서 세상의 법률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도 사실입니다.
법률적으로 증거라는 것은 사실인정의 근거가 되는 자료를 말합니다. 현장의 물적 증거, 목격자의 증거, 기록상의 증거들, 그리고 정황 증거를 채택합니다. 이를 토대로 어떤 사건의 진실여부를 가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법률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어떨까요?
첫 번째로 물적 증거로는 예수님의 빈 무덤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종교든 창시자의 무덤을 갖고 있습니다. 창시자의 무덤의 크기가 자기 종교의 권위를 나타내기라고 한다는 듯, 각 종교는 왕릉 같은 무덤의 위용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덤이 없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도둑질해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정황으로 보건데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유대인들도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습니다. 그러나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굴을 파고 그곳에 시신을 안치합니다. 그리고 무덤을 큰 돌로 막게 됩니다. 예수님은 매장되지 않고 돌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당시 아리마데 사람 요셉이라는 사람은 공회원이었며 부자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세마포로 싸서 돌무덤에 안치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로마 당국에서 파견된 군인들이 무덤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갈 것에 대비했던 것입니다. 당시 로마 군인의 풍습으로 16명 정도가 파견되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들의 경비는 삼엄했을 것입니다. 그들을 뚫고 시체를 훔쳐갈 수 있을 정도로 로마군인들의 기강이 헤이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갔다면 그 긴박한 시각에 세마포를 벗길 수 있는 여유 또한 없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역사적 정황증거들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변화된 모습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이 부활전과 후가 완전히 다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법정에 끌려가 심판받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 속에서 뿔뿔이 흩여졌습니다.
베드로
베드로의 경우를 보더라도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알아보는 소녀 앞에서 예수를 저주하고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담대하게 예수가 부활했다고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은 날부터 숨어 지내던 자들이 뛰쳐나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 때문에 결국 비참하게 죽음을 맞게 됩니다.
사람이 아무리 담대해도 죽음 앞에서는 정직해지기 마련입니다. 무슨 유익이 있어 그들이 그러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진짜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만났고 함께 식사했고 그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부인할 수 있었겠습니까?
도마
도마는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관찰하고 실험하여 검증 가능한 것만 믿는 실증주의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가 예수님이 제자들 무리 가운데 오셨을 때 그 자리에 있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다는 제자들의 말에 대해 “예수의 못 박힌 손과 찔린 창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죠.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어 보이시며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사도바울
사도바울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던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는 일에 열심을 내었던 자였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생각할 때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구약성경에 능통한 자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하여 열심히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명기 21장의 말씀처럼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 받은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자기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며 그를 추종하던 자들이야 말로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잡으려 가던길에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이 변합니다.
예수를 믿던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던 그가, 스데반 집사가 예수를 전할 때 그를 죽이는데 동조하였던 그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오늘 본문을 써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급작스런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그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로 교회의 출현을 들 수 있습니다. 교회가 생겨난 것은 예수께서 돌아가신 직후였고 생겨난지 채 20년이 되기도 전에 로마 황실에 까지 세워질 정도로 급속하게 성장했습니다. 교회가 어떻게 탄생되었는가? 그것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자들, 성경에는 예수님께서 12번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500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신 적도 있었고 바울이 고린도서신을 기록할 당시에 그들 중 다수가 살아있었습니다.
성경의 기록은 12번이지만 이것보다 훨씬 많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여인들의 증거는 사실로 취급되지 않았기에 이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증언을 사실로 믿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는데 그것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순절에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사도들을 비롯하여 120명이 모였습니다. 바로 그곳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하늘보좌에 앉으신 후 우리를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그들이 성령님의 인도와 보호 가운데 모이기 시작했고 부활의 주님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1500년 전 모세의 율법이 주어진 후에 늘 지켰던 안식일이 즉 토요일이 아니라, 일요일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그들은 그것을 주님의 날이라고 불렀고 이것을 줄여 오늘날 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주일에 모여 부활의 주님을 기념하고 예배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1500년이나 지속했던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지 않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우리나라도 1월 1일을 새해 첫날로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결국 안되서 신정과 구정을 둘 다 새지 않습니까? 사람이 지켜오던 관습을 한번에 바꾼다는 것은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1500년이나 지속되었던 종교의식을 하루아침에 버리고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의식을 시작한 것입니다.
할례와 성전제사를 통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그것을 다 버리고, 주일이면 회당이나 집에 모여 함께 떡을 때고 포도주를 마시며 주님의 죽으심을 기념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급진적인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으로 밖에 달리 해석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마지막으로 바로 우리들 자신이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문화와 배경과 개성, 다양한 직업, 경제수준을 가진 사람들이지만 동일한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저와 여러분 아닙니까?
2천년전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부활의 증인들의 기록을 이렇게 성경에 담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증언을 이 성경책을 통하여 듣게 됩니다. 그리고 증인들의 기록인 성경을 통해 우리는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그때 증인들이 그러했듯이 고난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그 부활의 증거인 것입니다.
예화)1972년 월남에서의 평화 협상 진전, 중국과의 국교 수립이라는 외교적 성과에도 불구하고 닉슨은 재임 기간 중 별로 인기가 없는 대통령이었습니다. 1972년 선거에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던 맥거번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자 닉슨의 불안감은 고조되었습니다. 그의 재선을 확신하지 못한 백악관의 참모들은 비열한 음모를 하나 꾸몄습니다.
워싱턴 시내 워터게이트 호텔에 자리한 민주당 선거운동 본부에 도청 장치를 가설하기로 한 것입니다. 전직 FBI 요원 고든 리디, CIA 요원 하워드 헌트가 총지휘를 맡았고, 배관공으로 위장한 정보부 요원들이 민주당 선거 본부에 도청 장치를 가설했습니다. 그러나 우연한 일로 이 도청 장비가 발각되고 범인들이 체포되면서 사태가 심각해졌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단순 주거 침입 정도로 여겨졌다. 그해 치러진 선거에도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고 닉슨은 예상 외로 무난히 재선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후의 재판 과정에서 닉슨이 이 사건의 뒤에 있었다는 것이 계속해서 의혹으로 제기되고 있었습니다.
1973년 대통령의 보좌관들이 모여, 닉슨 대통령은 애초 사건 자체를 알지 못했다는 조직적인 사건 은폐 음모를 꾸밉니다. 그 음모에 참여한 10여 명의 보좌관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로서 미국에서 최고의 명성을 날리던 변호사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법률 전문가들이었기에 어떻게 해야 사건을 완벽하게 은폐할 수 있고, 어떻게 진술해야 철저하게 은폐를 유지할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모두 닉슨의 열렬한 신봉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닉슨을 위해 최고 수입의 변호사직을 마다하고 닉슨을 따라 백악관으로 들어갔고 닉슨을 위해 24시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으며, 닉슨이 원한다면 생명마저 던질 각오가 되있는 자들이었습니다.
닉슨 대통령역시 그들을 각별하게 대우, 그들에게 웬만한 나라 대통령이 부럽지 않는 막강한 권한과 권력을 주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명예와 주어진 특권을 지키기 위해, 그들이 신봉하는 닉슨을 위해 적극적으로 은폐 음모를 꾸몄고, 그들의 법률적 지식과 경륜에 비추어 그들의 은폐 기도는 완벽하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시도는 불과 18일 만에 무참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그토록 말을 맞추었음에도 집요한 검사의 심문 앞에서 그들의 진술이 엇갈린 것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위협에 처하지도 않았습니다. 누가 무력으로 협박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들의 진술은 엇갈렸고, 마침내는 닉슨 대통령에게 등을 돌린 채 막강했던 권력의 자리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것이 거짓이었기 때문입니다. 거짓은 어떤 시도로도 지켜지지 않습니다. 거짓은 반드시 허물어지고 맙니다. 거짓이란 본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죄수로 전락하여 수감된 이 사건의 주역이자 특별고문이었던 찰스 콜슨은 칠흑 같은 교도소의 어둠 속에서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미국 최고의 엘리트들이 꾸민 거짓이 18일을 넘기지 못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예수 부활의 증언이 제자들에 의해 꾸며진 거짓이라면, 그 거짓은 이미 2천 년 전에 공중 분해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성인도, 법률 전문가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무식꾼들이었습니다. 그 무식꾼들이 아무리 입을 맞춘들, 그들이 꾸민 거짓말이 지켜질 리가 없습니다. 더욱이 예수 부활을 증언하는 대가로 그들에게 세상의 권세나 영광이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 대가는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거나 참수형, 혹은 화형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예수 부활을 외치면서 죽어 갔습니다.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진짜로 만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식한 제자들의 증언은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허물어지지 않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찰스콜슨의 책 <이것이 궁금하다>에서 옮겨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서는 목숨을 내놓을 수 있다. 그러나 뻔한 거짓말인 줄 알면서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워터게이트 은폐공작은 현대 미국에서 가장 힘 있는 열두명조차 거짓말을 유지할 수 없음과, 2천년전의 힘없는 열두명이 말한 것은 진실일 수밖에 없음을 입증해 준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결정하고 보장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20절에는 그리스도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가 되셨다고 합니다. 첫열매는 이제 앞으로 생성될 열매를 보증하는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부활이 보장된 것입니다.
부활이라는 것은 죽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위한 대속제물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의 죽으심이 죄값을 지불함으로 죄가 제거된 것입니다. 따라서 죄의 결과인 사망이 더 이상 주장 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사단에게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가 사망인데 그것을 뚫고 부활하심으로 사단의 권세가 궤멸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가 주님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으면 우리 죄가 제거되고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의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생존권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가 용서되고 생존권을 받았어도 그 생존권은 부활로 성취됩니다. 예수 믿은 자들을 아들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약속하셨어도 이 모든 것의 성취를 부활로 됩니다. 아들로 확실하게 되는 것도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자들이 믿음으로 바로 부활에 이르는 것이 아니고, 종말에 부활이 이루어지도록 하셨습니다. 부활에 이르러야 영생하며, 하나님의 아들이 되며,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피로 구속된 자들에게 부활의 보증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마음에 보내신 성령님입니다.
고후1:22
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이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처럼, 우리 몸을 살리실 것입니다.
롬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예수님께서 구속한 자들을 자신처럼 부활시키기 위해 성령을 보내사 부활의 보증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부활자의 영이 우리 심장에 와 계시므로 부활에 이르는 것은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것입니다.
우리를 그 영광스런 자리로 인도하시기 위해 성령님으로 인치신 것입니다.
그 영광스런 하나님나라에서의 삶이 바로 부활로 말미암아 성취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보증이 우리안에 계신 성령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언제 어떠한 모습으로 부르실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재림하실지도 모릅니다. 주님이 오시던 또는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하던 그것은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알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날이 언제이던 간에 그때가 우리가 가장 찬란한 영광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있어 가장 큰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퍼슨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2층에 위치한 낡고 좁은 병실에 죽음을 앞둔 두 환자가 있었습니다. 페 일부를 제거해 하루의 대부분을 고통 속에 보내는 환자 빈센트와 사고로 척추가 탈골된 파거였습니다.
두 환자는 고통이 잠시 멎을 때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가족과 친구들에 대해, 때론 서로의 직업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가족과 친지들이 그들을 만나러 오는 횟수가 뜸해질 때도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고통을 견뎠습니다. 어느 날,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빈센트에게 파거가 물었습니다.
“거기 밖에 뭐가 보이나?”
빈센트가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습니다.
“오늘 날씨가 무척이나 화창하네. 아름다운 공원이 있고, 꼬마들이 노록 있어. 분명 오후 수업을 빼먹은 모양이다. 호수에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고, 그 옆으로 귀여운 오리들이 줄지어 가는군. 저런, 꼬마들이 아주 흙투성이가 됐는데?”
“나도 일어나 바깥을 볼 수 있다면 좋겠어!”
“자네는 곧, 머지않아 그렇게 될 거야. 일어나 앉게 될 거고, 몸을 일으켜 창밖도 보게 될 거야.”
그 후로 빈센트는 매일 오후 세 시가 되면 바깥을 내다보고 풍경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날마다 변화무쌍한 날씨와 다른 풍경들이 펼쳐졌습니다. 덕분에 파커의 상태도 눈에 띄게 호전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후 세시가 되었는데도 빈센트는 몸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텅 빈 병실에 혼자 남겨진 파커는 간호사를 불러 부탁을 하나 했습니다. 자신의 침대를 빈센트가 있던 창가로 옮겨줄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간호사는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고, 창가로 자리를 옮긴 그는 기적처럼 몸을 일으켜 바깥을 내다보았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이웃 건물의 벽돌담뿐이었습니다.
소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누구나 절망의 고비를 견뎌나갈 수 있습니다.
인생길의 눈물 골짜기를 걸을 때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 소망은 세상이 말하는 성공과 부와 권력일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소망, 영원한 소망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의 소망입니다.
요한1서 3장 2-3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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