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추수감사주일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이 시간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감사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바울의 편지들을 살펴보면서 과연 그들은 무엇 때문에 감사했는가를 살피기 원하는 것입니다.
1. 감사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본문에 보면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할 때 그 의미는 하나님의 목적, 계획이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라는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그리고 그분의 의지가 무엇인가? 바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자녀들을 양육하면서 자녀들이 이런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의지가 있지 않습니까?
예의바른 자녀가 되었으면 좋겠다. 또는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겸손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등. 그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일 것입니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도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원하시는 그 분의 뜻, 그분의 의지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감사가 하나님의 뜻이라는 차원에서 자신의 모습을 한번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 자신은 감사하는 사람입니까? 어떠십니까? 한 해 동안 나의 모습 속에서 얼마나 감사하며 사셨습니까?
내 삶에 감사가 많았습니까? 아니면 원망과 불평이 많았습니까?
감사는 대부분 은혜에 대한 감격에서부터 나옵니다.
그래서 감사하지 않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거나 또는 받은 은혜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을 착각하게 되면 감사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교만한 자들은 감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길 원하십니다. 내 삶에 주어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7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디모데전서 6:7절에는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전도사 5:15절에는 “우리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다”라고 말합니다.
이 땅에 벌고 벗고 나왔는데 고아와 같이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돌봐주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내가 노력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고 미개한 나라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래도 살만한 나라에게 태어난 것도 나의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서는 성실함과 신실함으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셨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성도는 감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을 때는 너의 삶의 모든 것, 즉 범사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소유한 모든 것, 내가 누리는 우리는 모든 환경, 사랑하는 가족들, 주변에 아껴주시는 모든 분들 그리고 삶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일들 까지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에서 벗어난 것은 단 한순간도 없다는 것입니다.
<욥기 7:15절에는> “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마태복음 10:30>에는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뉴질랜드에서 교회를 개척했을 때 한 자매가 저희교회에 나왔는데 자기 홈스테이하는 주인집 아이를 데라고 온 적이 있습니다. 8-9살정도 된 여자아이 었습니다. 그 아이가 교통사고가 나서 한주도 교회에 못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 오게 되었는데, 제가 그 아이한테 “교통사고 나서 얼마나 힘들고 무서웠니?” 라고 물었더니, 아이 대답이 “교통사고 나서 병원에 있을 때 하나님께 감사했어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그래서 “뭐가 감사했니”라고 물었더니 “많이 안 다쳐서 감사했어요”합니다.
다친 것 때문에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많이 안다친 것 때문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아는 것입니다.
간혹 그럴 때 있지 않습니까? 그 분은 하나님 앞에 그렇게 충성하셨는데 어떻게 그런 질병에 걸릴 수가 있지요?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헌신했는데 어떻게 이런 고난을 허락하실 수가 있죠?
세상 쾌락을 즐기다 질병에 걸리지 않고 하나님 일에 충성하다 질병에 걸렸으니 그것이 은혜인 것이죠.
<베드로전서 3:17>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선을 행하다 고난을 받았으니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저희 아버지께서 페암에 걸려 고통을 받으실 때 처음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서운한 마음도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저희 가족의 의문은 이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 때부터 헌신하고 충성해 온 우리 가정에 왜 이러한 아픔을 허락하시는가? 더군다나 아버지는 개척교회를 어렵게 섬기셨는데 왜 이런 고난을 주시는가?
할아버지는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으셨고 저의 가정은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2층은 예배당이고 1층의 각 방들은 주일학교 공간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넓은 잔디밭은 성도들의 휴식공간이었습니다. 주차장은 학생회실로 개조되어 늘 형들과 누나들이 들락날락 거렸습니다.
할머니께서는 난지도에 있는 땅을 팔면서 큰액수를 건축헌금으로 드리셨습니다. 그때 가정이 어려울때인데도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보아도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로 이어오시면서 큰 헌신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 가정에 이러한 고난이 찾아왔는가? 의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깨닫게 된 것이, 그렇게 헌신한 것 자체가 은혜였던 것입니다.
선을 행하다 고난을 받았던 것이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집을 드리고 물질을 드릴 수 있었다는 것이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것 움켜쥐고 살았다면 과연 그런 고난이 없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범사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현재의 삶을 정확하게 인식할 때 가능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현재의 삶을 어떻게 인식하였는가? 또는 성도들의 삶을 어떻게 인식하고 이었을까요? 이것은 빌립보서 강해를 통해서도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바울은 승천하신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오늘 편지의 수신자인 데살로니가 성도들도 이러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너희가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하니 이는 장래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데살로니가전서 3:13>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데살로니가전서 5: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그렇다면 이러한 것이 감사와 어떻게 연관이 되는가?
그것은 우리가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면 그 속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임종을 맞이한 사람이 있다고 해봅시다. 이것이 그가 당면한 냉혹한 현실입니다. 그에게 있어 가장 가치 있고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돈이겠습니까? 아름다운 옷이겠습니까? 고급 승용차이겠습니까? 아니면 좋은 집이겠습니까?
바울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감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 그것은 주님께서 언제 오실지 모른다는 종말론적인 현실인식입니다. 종말은 두 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심으로 임하는 종말과 인생의 종말입니다. 이 둘의 공통점은 언제 임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우리 중 누구도 종말의 때를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재림은 급하게 임한다고 하였습니다. 또 인생의 종말은 어떠합니까?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한치 앞의 일도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냉혹한 현실입니다.
이러한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면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고 가치있는 것인가를 분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에게 있어 이것은 세 가지로 요약됩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2-3>
“2.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
3.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끊임없이 기억함이니“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를 기억하니까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3-4>
“3.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4.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여기서도 보면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하면서 이것이 당연함은
첫째, 너희의 믿음이 자라고.
둘째,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
셋째, 박해와 환난 중에서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서 1:3-5>
3.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4.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5.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골로새 교회를 향한 감사는 무엇입니까?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늘에 쌓아 둔 소망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실의 인식가운데 마지막 당부의 말이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너희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 있지 않습니까? 내일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당신은 오늘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어떠십니까? 어제 카페에서 설교준비하면서 저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나에게 남은 시간이 24시간이라면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니 뭐 특별히 할 게 없더라고요.
그냥 그동안 해 왔던 것 할 것 같아요. 그러면서 제가 감사한 것이 있었습니다.
내일이 인생의 종말인데 왜 조급하지도 않고 아쉽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을까?
아! 나에게 믿음이 있기 때문이구나. 내일 나에게 죽음이 온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셨음을 믿기에 종말이 특별하지가 않은 것입니다.
간혹 임종예배를 드리러 갈 때가 있습니다. 그때 확인하는 것이 이분의 직업이 무엇인지, 인생가운데 어떠한 업적을 남겼는지가 아닙니다. 지금 이 분에게 믿음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죠.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 있어 믿음이 있느냐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문제는 없습니다.
이때 믿음이 있으면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성도들에게 믿음이 있었습니다.
이 믿음이 무엇입니까?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구원하셨다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실 때 나의 죄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반겨 맞으신다는 믿음입니다.
그동안 하나님 앞에서 비록 부끄러운 삶을 살았지만 그러한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셨고 마침내 그분 곁에서 살 수 있게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믿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현실의 삶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때로는 계속되는 고난과 아픔 속에 있을지라도 내게 믿음이 있으면 그것만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내가 노력해서 받은 것이 아니잖아요? 은혜로 받은 선물입니다. 그러기에 범사에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일 뿐만 아니라 성도를 향한 사랑입니다.
이 두 가지는 하나이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성도를 향한 사랑으로 표현되어집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서 자발적으로 나오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이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성도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삶은 사랑을 받는 만큼 풍성해 집니다. 그리고 받은 사랑은 반드시 이웃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요한1서 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 사랑을 우리가 받았기에 가족을 사랑하고 성도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나누면서 우리의 삶은 행복으로 충만해 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간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랑을 나눌 때 아니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주시는 그 풍성한 사랑으로 인하여 우리는 범사에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내가 사랑을 하고 또 사랑을 받기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은 소망입니다.
무슨 소망입니까? 주님께서 곧 오실 것이라는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범사에 감사하게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주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분이십니다. 자신의 목숨을 줄 만큼 사랑하는 분을 만나는 것처럼 기대되고 흥분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십자가의 그 고통을 참으셨을까요?
주님께서 십자가를 참으신 것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우리를 향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죽음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자신을 내어주기까지 사랑한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그것도 사랑을 받을 만한 자가 아니라 오히려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받아야 마땅한 나를 사랑한 그 사랑 아닙니까?
여러분! 그 주님을 빨리 만나고 싶지 않습니까? 그 소망이 우리 가운데 있기에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비록 죽음이 내 앞에 닥친다고 할지라도 죽음을 넘어서 영광중에 계신 주미을 만날 생각에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까? 죽음으로 그 사랑을 보여주신 주님을 만날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