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기타

19-04-30 15:08

2019 부활절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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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실황 전체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Fxm8bVd8VPg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한복음 11:25-26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015년 3월에 교회를 개척하고 4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해 6월에 임헌환집사님 어머니께서 소천 하셨습니다. 그때 저에게 장례집례를 부탁하셨습니다. 성도가 4명인 교회의 목사가 장례를 인도하게 된 것입니다. 임집사님 형제들이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에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한다는 것이 부담이 있었습니다. 더군다가 많은 성도가 참여하여 집사님께 힘이 되어주면 좋겠는데 그런 상황이 되지 않았던 것이죠. 감사하기는 했지만 죄송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우리 성도 가운데 장례가 생기면 저 혼자 오지 않게 해주요. 그리고 다음해 효철형제 아버님이 소천 하셨습니다. 그때도 조문을 올 수 있는 사람은 저와 임집사님 그리고 창문형제 이렇게 였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기쁜우리교회로 성도들을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최수정권사님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당시 청년들까지 합하여 열다섯분 정도의 성도들이 모두 참여하였습니다. 밤에 일산까지 가는 길이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조정분집사님 시부님께서 소천하셨을 때도 성도전체가 함께 조문을 갔습니다. 추운겨울로 기억하는데 조문 후 4개의 테이블에 둘러 앉아 식사했으니 상을 당한 집사님께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제 작년 저희 장인어른께서 소천 하셨을 때 그때가 추수감사주일이었는데 예배 후 모든 성도님들이 그 먼 창원까지 오셨습니다.
정말 눈물 나게 고마웠습니다. 얼마 전 이사하면서 조문해 주신 분들의 봉투를 아내가 정성스럽게 간직한 것을 보고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어려울 때 성도들이 마음을 모아 함께 해줄 때 정말 큰 위로와 힘을 얻습니다.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들이 앞으로도 계속되길 바라고 기도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사로의 가정의 장례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가정에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모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은 젊은 나사로의 죽음을 애도하고 남겨진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모인 것입니다. 장소는 베다니였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나사로는 갑작스런 질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는 세마포로 감싸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의 소망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죽은지 나흘이 된 시점에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 서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죽은 육체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다가 3일째가 되어 부패가 시작되면 결국 영혼이 떠난다고 믿었습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죽었고 시신의 부패가 시작되어 악취나 나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무덤 앞에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외치셨고 나사로는 세마포에 감싸있는 채로 걸어나옵니다.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신 말씀에 따라 나사를 덮었던 세마포가 벗겨졌고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통해 자신의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준비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들의 부활이 어떨 것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예수님이 사랑하시는 자에게도 죽음은 임합니다.
3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5절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나사로의 가족을 예수님은 특별히 사랑하셨습니다. 나사로는 마르다 마리아의 삼남매는 예수님을 극진히 사랑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여인이 바로 마리아입니다. 본문 2절에서 이 사건을 언급하고 있죠.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닦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버니더라”

당시 향유는 노동자의 연봉에 해당되니 상당히 값비싼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깨어 예수께 부을 정도였으니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어떠한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도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다 이 집에 들어가 식사하시는 모습이 기록된 것을 보면 예수님과 특별히 친밀한 관계를 가졌던 가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죽음이 닥친 것입니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심각한 질병에 걸려 죽게 된 것입니다. 우리 생각에 예수님이 특별히 사랑하시는 가족이었다면 이런 일들이 피해갈 것 같으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죽음은 이 땅의 모든 자달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세 남매가 미혼인 것을 보면 나이가 많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급작스런 죽음을 당한 것입니다.

오늘날 어떤 이들은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이 잘되고 형통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도 질병을 겪을 수도 있고 사고를 당하거나 죽음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은 죄의 결과들이죠. 내가 어떤 특정한 죄를 지어서 그 결과로 질병이나 사고를 겪는 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이 세상은 악과 고난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 영향력은 신자나 불신자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에게 임한다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에 모시고 갈릴리 바다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큰 광풍이 불어 배가 뒤집어 질 위기에 처하게 되죠.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그곳으로 가자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모시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풍을 당하게 됩니다.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이 형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주님을 모시고 가는 인생의 항로에도 광풍은 붑니다.
시편 23편에 보면 목자 되신 여호와께서 우리를 푸른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고 고백하죠. 그런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도 인도하신다고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갑작스런 질병이나 사고가 생긴다고 해서 이상히 여겨서는 안됩니다.  
‘내가 혹시 하나님 앞에 잘못해서 벌을 받는가’ 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자신에게 닥친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삶에 닥친 고난을 나의 잘못에 대한 심판이거나 저주라고 생각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분당 부목사 시절 제가 참 좋아하는 권사님이 계셨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어르신들 구역을 맡아 참으로 잘 섬기셨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 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지금 지방으로 급하게 가는데 기도 좀 해주세요. 그리고 전화를 끊으셨습니다. 사역의 분주함 때문에 그 일을 잊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 남편 집사님은 우체국장이셨는데 퇴임하고 교회사찰집사님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교회를 출퇴근할 때 인사를 드리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6개월 정도 지났을 때입니다. 저녁11시쯤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가는데 경비실에서 집사님이 저를 부르십니다. 추운겨울 난로 앞에 둘이 앉았습니다. 한참을 말을 못하시다가 꺼내는 말씀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도 어려움이 닥치나봐요” 고개를 들지 못하시고 말을 이어가십니다.
“목사님! 저희 딸이 전주에서 대학교를 다니는데 6개월 전에 실종이 되었습니다. 토요일에 집에 와야 하는데 집에 오지 않아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어요. 삼사일 후에 경찰에 실종신고를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경찰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시신이 들어왔는데 확인해 보라고”
6개월 전 주일 아침에 전화한 것이 바로 시신을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던 것입니다. 가보니 자신의 딸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딸의 죽음을 확인한 그날 두 분이서 장례식을 조용히 마치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목사님! 하나님을 열심히 섬겨도 이런 일을 당하네요.”
저는 두 분이 그 고통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알지 못합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맡겨진 구역장일을 성실히 하셨고 늘 기도의 자리에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성도들의 삶에도 죽음의 고통은 닥칩니다.

 

두 번째,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닥친 죽음은 죽음이 아닌 잠입니다.
“11.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12 제자들이 이르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나사로는 이미 잠들어 죽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가 잠들었기에 깨우러 간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여기십니다. 영원한 이별이 아닌 영생의 삶으로 가는 잠깐 동안의 쉼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스데반은 마지막 죽음의 순간 이렇게 고백합니다.
사도행전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부활장이라고 불리는 고린도전서 15장에도 죽은자들을 잠들었다고 표현합니다.
고린도전서 15:6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고린도전서 15:18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고린도전서 15:20 “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왜 성경에는 성도들의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우리의 죽음이 영생의 삶으로 가는 잠깐 동안의 수면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어제밤에 잠을 자고 오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잠에서 깨어 일어나 현실의 삶을 살아갑니다. 잠은 우리에게 쉼이고 안식입니다. 잠이 죽음이라면 우리는 매일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죠.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그것은 잠자는 것과 같다고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매일을 죽는 연습을 시키는 것입니다.

죽음이 잠이라면 죽음을 두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리 잠속 꿈에서 악몽을 꾸었어도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것을 사라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마지막 호흡을 하고 잠들어 깨는 순간 이 땅에서 삶은 꿈처럼 지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세 번째, 주님이 사랑하신 가정에 닥친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4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하시더라”
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사랑하는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의 사건을 통해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실 때, 꼭 성공하고 잘된 것만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도 그분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사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 12:23>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이 영광을 얻는 사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베드로는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릴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21:19>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성도의 죽음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네 번째 하나님은 죽은 자를 부활시킴으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성도의 죽음이 복된 것은 부활의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음의 참혹함을 부활로 말미암아 찬란한 영광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최근 우리는 어디를 보아도 흐드러진 꽃의 향연을 보고 있습니다.
겨울의 나무는 메말랐고 죽은 듯이 보였습니다. 무엇이 죽은 나무이고 무엇이 살아있는 나무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로도 모든 것은 앙상한 가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봄이 되니 살아있는 나무에서는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였고 이제 푸른 나뭇잎들로 풍성해 질 것입니다.

해마다 반복되는 자연의 질서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영광을 나타내십니다.
죽은 듯 말라있던 나무에 꽃과 나뭇잎과 열매가 맺히는 것은 그것이 생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죽은 듯이 보였던 살아있던 나무에서는 꽃이 피듯이, 우리의 삶도 노년의 겨울을 맞이하게 되면 앙상한 나무처럼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 모든 것은 생명을 잃은 죽은 나무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봄이 찾아오듯 부활의 찬란한 영광이 우리에게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 앞에 괴로워하는 두 자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11:25-26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 부활이고 생명이십니다. 이 말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사 성도들의 부활의 근원이 되신다는 의미이며 생명의 근원이 되사 죽은 성도들에게 생명을 주실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우리에게는 부활의 생명이 주입됩니다.
성경은 성도들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난 존재라고 말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물론 육신은 죽어가지만 우리의 영혼이 새롭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 이미 부활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는가 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입니다. 이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은 생명으로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살려내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부활의 생명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없다는 것입니다. 잠들었다 깨어나 부활의 생명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죠.

 

네 번째 이러한 부활의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25-26절에 예수님은 마르다 이러한 부활의 영광은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고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그리고 주님은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십니다.
마르다가 대답합니다.
27절에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바로 이 믿음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 그 믿음을 가진 자에게만 부활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부활의 영광은 믿는 자들에게만 임합니다. 그 믿음은 다름 아닌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믿음이 있다면 우리도 부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저를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말씀으로 양육해주신 분은 송**목사님이셨습니다.
1968년 선교회를 설립하고 제자훈련이 생소하던 시절인 76년 경기도 양평에 제자훈련원을 세워 목회자와 군목,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복음으로 제자 삼는 훈련사역에 주력했던 분입니다.
2년동안 루게릭병으로 고생하시다가 73세의 나이로 결국 소천하시고 시신을 연세대의학과에 기증을 하셨습니다. 저희 아버지 장례식 때 오셨을 때 이미 안면의 근육이 마비가 되어 어눌한 언어로 ‘아버님 천국에 가셨으니 천국소망가지고 사세요’ 라고 힘들게 위로의 말을 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이 임종 때 손주들에게 마지막 전한 말은 굿나잇이었다고 합니다. 굿바이가 아니라 굿나잇. 많은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로 이 땅에서 삶을 마치고 안식에 들어가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임종을 맞이할지는 모르지만 그때 우리는 굿나잇이라고 인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