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부활절 설교
산소망
베드로전서1:3-4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우리 주님의 부활의 날을 맞이하여 예배하러 나오신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주제는 산소망에 대한 것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소망이 있습니다. 소망이 있기에 살아갑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삽니다. 암에 걸려도 살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진 사람은 삽니다. 그러나 소망이 꺾이면 죽습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 절망이라고 했습니다.
소망은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지만 절망은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사람을 살게 하는 힘은 소망에서 비롯됩니다. 소망은 미래에 될 어떤 일을 기대하고 바라는 마음입니다. 현재는 만족스럽지 못하지만 미래에는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현재는 부족하지만 곧 채워질 것이라는 기대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소망을 품고 사십니까?
우리는 미래의 이루어질 소망을 위해 현재의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합니다. 학생들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현재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공부에 전념합니다. 부모들은 좀 더 넒은 평수의 아파트에 살기 위해 현재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포기합니다. 또 자녀들의 미래에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해주고자 먹을 것 입을 것 아껴가며 저축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소망들이 한 가지씩 이루어질 때 삶은 보람이 있습니다. 열심히 저축하여 신축 아파트에 입주할 때 얼마나 기쁠까요? 우리 자녀가 시간을 쪼개가며 공부하여 목표한 대학에 합격했을 때 기쁠 것입니다. 직장의 직급이 올라가고 사회적 지위가 상승하게 되면 만족감도 커질 것입니다.
1.우리가 붙잡은 소망의 헛됨에 대하여
문제가 있습니다. 이러한 소망들은 죽음이라는 현실 앞에서 다 무너진다는 사실입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가진 모든 소망은 산산이 부서집니다.
어제는 세월호참사가 있는지 8주년 되는 날이었습니다. 잊지 말아야 할 역사입니다. 배 안에 있었던 꽃다운 나이의 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꿈과 소망을 품고 살았던 우리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모든 것을 앗아가 버렸습니다.
소망은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확실한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쉽게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죽음을 나의 현실이 아니라 남의 일처럼 여깁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내가 죽는다는 것을 현실로 인정하십니까? 아니면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죽음이라는 현실이 너무나 무겁고 심각하기에 현실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우리 삶을 짓누르기에 생각에서 밀쳐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죽을 것입니다. 나이가 많다고 일찍 죽는 것도 아니고 젊다고 늦게 죽는 것도 아닙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오늘일 수도 내일일 수도 있습니다. 10년 후일 수도 30년 후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것입니다.
이 죽음이 우리의 모든 소망을 절망으로 만듭니다. 마치 블랙홀처럼 모든 소망을 흡수하여 절망으로 만듭니다.
저는 매일 우크라이나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소식을 접합니다.
그 땅에서 전혀 소망을 찾을 수 없습니다. 죽음이 일상이 된 그곳에서 보내온 영상과 사진들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은 인류에게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소망들은 모두 헛된 것임을 말입니다.
외국에 살 때 게라지세일을 자주 가곤 했습니다. 자신에 집에 안 쓰는 물건들을 차고에 내놓고 파는 것입니다. 지인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이민 오신 어르신이 돌아가셔서 평소 쓰시던 물건들을 정리하는 게라지 세일을 한 것입니다. 이분이 이것저것을 둘러보다 고급스럽게 생긴 상자가 있어 열어보았다고 합니다. 그 안에는 훈장이며 상장이며 감사패가 있더랍니다. 평생 많은 분에게 존경을 받던 분이셨던 것입니다. 이 상자가 얼마냐고 물었더니 10불이랍니다.
그분 인생의 업적들, 자랑거리들이 10불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제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난 후, 가족들은 집안에 아버지의 모든 사진첩이 사라진 걸 발견했습니다. 액자에 남겨진 사진을 제외하고 모든 사진첩이 사라진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태웠거나 버리신 것입니다. 죽음을 준비하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평소 앨범을 소중히 여기셨던 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인생을 추억을 정리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 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인생의 추억도, 한때의 명예와 평판도 모두 헛됨을 깨닫게 됩니다.
전도서에서는 말합니다.
전도서 1:2–3 (NKRV)
2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우리는 죽음 앞에서 내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헛된 것인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 속에서 꿈을 꾸며 붙잡고 있는 소망들조차도 헛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2. 죽음을 극복한 산소망
그런데 이러한 허무한 인생을 참 소망의 빛으로 밝힌 사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참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를 절망케 했던 죽음의 권세가 물러갔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3절을 보시면
베드로전서 1:3 (NKRV)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산 소망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라는 것은 우리가 붙들었던 소망들이 헛된 소망, 죽은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살아있는 소망, 참된 소망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은 어떠합니까?
베드로전서 1:4 (NKRV)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4절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것” 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붙잡은 소망들은 다 썩습니다. 썩지 않는 것이 있습니까? 젊음의 그 아름다움도 시듭니다. 인생에 품었던 꿈과 야망들은 어떻습니까? 더럽지 않습니까? 내가 품은 소망이 얼마나 이기적이었습니까? 그것을 얻기 위해 누군가는 희생해야 했습니다. 내 인생에서 이룬 업적들이 어떻습니까? 다 쇠하는 것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썩고 사라질 것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주어진 소망은 산 소망입니다. 그것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소망을 주신 사건입니다.
3.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에게 산 소망을 주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첫째,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부활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5:20
20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성경은 성도들의 죽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따라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는 것은 성도들이 부활할 것에 대한 첫 열매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첫 열매라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나무에 첫 열매가 열리게 되면 그것은 이후 계속해서 열매가 열릴 것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심으로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가 부활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그를 믿는 모든 자들이 죽음에서 살아날 것을 보증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죽음이 현실인 것처럼 부활도 현실입니다. 우리 인생은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삶에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합니다. 그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죽음 이후에는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합니다.
죽음의 요단강을 건너게 되면 하나님 나라에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렇지 않고는 사도들의 변화를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예수께서 로마군에 붙잡혀 갈 때 도망쳤습니다. 베드로뿐입니까?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다 도망쳤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빈 무덤을 확인했을 때조차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제자 도마는 부활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손가락을 못 박힌 손과 창 자국 난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도 후에는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그들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믿음이 없는 도마에게도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못 박힌 손과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도마는 예수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합니다. 이후 그도 부활의 증인이 됩니다.
사도들은 죽음의 위협과 모진 고문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어가면서 까지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였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입니까? 그들은 실제로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믿음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진보적인 신학자들은 예수가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지만 부활했다고 믿는 신앙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러한 부활의 역사성, 사실성 때문에 우리에게 산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지난 2월 89세의 나이로 소천하신 고 이어령선생님의 좌우명은 메멘토모리입니다.
메멘토모리는 ‘내가 죽을 것임을 기억하라’는 의미입니다.
다음은 그의 시 ‘메멘토모리’입니다.
목숨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온다.
아무리 부드러운 포대기로 감싸도
수의(壽衣)의 까칠한 촉감은 감출 수가 없어.
잠투정을 하는 아이의 이유를 아는가.
한밤에 눈을 뜨면
어머니 숨소리를 엿듣던
긴 겨울밤
어머니 손 움켜잡던
내 작은 다섯 손가락.
애들은 미꾸라지 잡으러 냇가로 가고
애들은 새둥지 따러 산으로 가고
나 혼자 굴렁쇠를 굴리던 보리밭 길
여섯 살배기 아이의 뺨에 무슨 연유로
눈물이 흘렀는가.
너무 대낮이 눈부셨는가.
너무 조용해 귀가 멍멍했는가.
굴렁쇠를 굴리다 흐르던 눈물
무엇을 보았는가.
메멘토 모리
훗날에야 알았네.
메멘토 모리
그는 어릴 적 죽음을 직감했던 순간을 시로 남겼습니다.
생전 마지막 인터뷰를 한 이지수기자는 ‘마지막 수업’이라는 책에 이런 내용을 담았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했다. 그건 오래전 숙명여대에서 강연을 하고 나오던 참에 주차장에서 선생을 기다리던 여학생이다. 오랜 시간 추위에 떨어 얼굴이 파래져서는 "선생님 돌아가시면 안 돼요"라고 했던 아이. 당시에는 "죽고 사는 문제를 어떻게 내 맘대로 하나?"라고 차갑게 대꾸했다. 하지만 이제는 깨달았단다. "아마 내 책을 읽고 나를 좋아하게 됐고, 한 존재에 깊이 의지하면 ‘이 사람이 이 세계에서 사라지면 어쩌나’ 더럭 겁이 난다"는 사실을. 다시 만나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단다.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만 "엄마 안 죽어"라고 자녀를 위로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그때 그렇게 매정하게 떠나는 게 아니었다"고…. "걱정하지 마. 나 절대로 안 죽어"라고….>
전에 희수가 차를 타고 가다가 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도 죽어? 그때 엄마는 “그럼 사람은 모두가 죽어.”라고 말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 그렇게 끝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엄마는 절대 안죽어. 엄마는 부활할거야. 예수님처럼
아빠도 부활할 거야. 예수님처럼, 그리고 희수도 부활할 거야 예수님처럼
그래서 우리 모두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 거야.”
그렇게 말했어야 했습니다.
우리에겐 산소망이 있습니다.
두 번째, 예수님의 부활이 산 소망이 되는 이유는 우리는 부활하여 예수님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3:2–3
2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부활이 우리에게 의미가 있는 것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분이십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그분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 죄와 허물을 대신 담당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의 비참함 가운데 허덕이며 살다가 결국 죽어 영원한 지옥 심판을 받게 되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성자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입니까?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그동안 살아오면서 목숨 걸고 나를 사랑해 준 사람이 있습니까?
자신의 것을 다 희생하여 나를 사랑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우리가 나 자신을 잘 알지 않습니까? 내가 그만큼의 사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자입니까?
나조차도 실망하고 싫어할 때가 많은데, 그런 나를 위해 주님은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뒤안길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얼마만큼 여러분에게 신실하셨습니까?나는 주님 품을 떠나기도 했고, 많은 실망을 안겨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신실하셨습니다. 허물 많은 베드로를 찾아오시고 용서하신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도 찾아오시고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의심 많은 도마에게 확신을 주셨던 주님께서 믿음이 없는 우리에게 믿음의 확신을 심어주셨습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신실하지 못했지만, 주님은 언제나 신실하셨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우리를 살렸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완성은 함께 사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의 소망은 우리와 함께 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형상으로 창조한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의 찬양과 경배를 받기를 기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마음껏 누리며 감사와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게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그 모든 하나님의 소망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스스로 감당하기로 작정하셨고 성자 예수그리스도의 십자를 통하여 죄 용서의 길을 열어놓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을 보내사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마침내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망은 언제나 임마누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소망을 하나님 스스로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죽음에서 부활시키신 하나님께서 우리도 죽음 가운데서 부활시킬 것입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우리 눈에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나 애통함이 전혀 없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우리와 함께 거하실 것입니다.
그때 주님은 만유 안에 만유가 되가 우리 가운데 충만하게 임할 것입니다.
창조 때의 영광이 회복되고 하나님의 존전 앞에서 예배할 날이 이제 곧 올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활시킬 것입니다.
그 소망이 바로 산소망입니다.
나를 위해 죽으신 주 예수 그리스도. 생명을 바쳐 나를 사랑하신 그 분을,
여러분! 꼭 만나 뵙고 싶지 않습니까?
우리의 소망은 그것 뿐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
아직까지도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것들을 소망하고 있다면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믿음의 눈을 들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한결같은 신실함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던 주님.
그 품에 안기는 것이 우리의 산 소망입니다.
그 소망으로 어려운 세상 힘 있게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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