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기타

23-04-11 23:00

2023부활절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말씀"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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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부활절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말씀”

 

요한복음 20:19–23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20장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마태복음을 중심으로 부활 사건을 살펴보고 다음으로 요한복음 20장을 통해 예수님께서 부활후 하신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예수님의 부활 사건

시간을 거슬러 2천 년 전 예수님께서 죽으신 시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습니다. 원래 십자가에서 처형이 되면 그 시신은 골고다 골짜기에 버려졌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저주받은 것으로 간주하였기 때문에 장례 절차 없이 골짜기에 던져져 들짐승의 밥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사 되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 상류층에 속했던 아리마데에 사는 요셉이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갑니다. 그는 깨끗한 세마포로 예수님의 시신을 싸고 자신이 소유한 돌무덤에 안치했습니다. 이것이 금요일 밤, 유대인들의 안식일이 시작된 시점에 일어난 일입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빌라도 관정은 아침부터 분주했습니다.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죽고 사흘 만에 살아날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 가서 예수가 살아났느냐고 할 수 있으니 경비를 철저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빌라도는 로마 경비병들에게 무덤 경계 강화를 명령합니다. 로마 군인들은 무덤을 막았던 돌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굵은 밧줄로 묶고 붉은색 도장으로 봉인하여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4명이 한 조가 되어 번갈아 가며 경비를 서게 됩니다. 이것이 토요일, 예수님이 죽은 다음날, 안식일 당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안식일 후 첫날 새벽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그리고 살로메가 예수의 무덤으로 갑니다. 그들은 무덤이 봉인된 것도 모르고 예수님께 바를 향품을 준비해 갑니다. 당시 장례풍습은 매장이 아닌 경우 시신의 냄새가 심하기 때문에 향품을 발랐는데 이를 위해 여인들이 간 것입니다. 

무덤 근처에 거의 다 왔을 때였습니다. 순간 그곳에 땅이 흔들렸습니다. 마태복음은 큰 지진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잠시 중심을 잃고 엎드려 있던 여인들은 고개를 들고 예수님의 무덤을 보았습니다. 누군가 돌을 옮기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돌을 옮긴 후 돌 위에 앉았는데 광채가 났습니다. 이 광경을 여인들만 본 것은 아닙니다. 밤새 무덤을 지켰던 로마 경비병들도 보았습니다. 그들은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나머지 죽은 사람처럼 보였다고 증언합니다(마28:4).

돌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이 여인들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28:5–7

5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6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7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일렀느니라 하거늘

 

천사의 말을 들은 여인들은 무덤을 확인합니다. 비어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달리기 시작합니다. 이 소식을 제자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여인들만 달린 것은 아닙니다. 정신을 가다듬은 로마 경비병들도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대제사장을 찾아갑니다. 왜 총독 빌라도나 상관을 찾아가 보고하지 않고 대제사장을 찾아갔을까요? 그것은 시신이 사라진 책임을 경비병이 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중형에 해당했기 때문에 대제사장에게 보고하고 보호받고자 한 것입니다. 

 

경비병의 이야기를 들은 대제사장은 장로들과 회의를 후 이 사건을 왜곡, 은폐하기로 합니다. 경비경들에게 돈을 주고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도둑질했다고 시킵니다. 그들이 입을 맞춘 것입니다.  

 

한편, 여인들은 제자들이 모인 곳을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과연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의 시신을 누군가 훔쳐 간 것인지, 환상을 본 것인지, 진짜 부활했는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분명한 것은 무덤이 비었다는 것입니다. 

순간 그들의 발걸음을 막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8:8–10

8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9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10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습니다. 돌문을 옮긴 것은 천사였고,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천사의 말은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환상이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아닌 세 여인에게 동시에 나타났으니 환상도 꿈도 아니었습니다. 

 

그 시각 제자들은 어느 집에 모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다렸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 중 그 누구도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긴 전 네 번씩이나 자신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말을 귀담아들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평소 비유로 말씀하시고,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을 하시니까 그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냐고 했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는 고백을 한 직후입니다. 

마가복음 8:31 

31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라고 변화산에서 변화되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마가복음 9:9–10 

9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10그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두며 서로 문의하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또 갈릴리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9:30–32 

30그 곳을 떠나 갈릴리 가운데로 지날새 예수께서 아무에게도 알리고자 아니하시니 

31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 

32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두려워하더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도 말씀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32–34

32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예수께서 그들 앞에 서서 가시는데 그들이 놀라고 따르는 자들은 두려워하더라 이에 다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자기가 당할 일을 말씀하여 이르시되 

33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지매 그들이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에게 넘겨 주겠고 

34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할 것을 믿은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붙잡혀 고문당하고 죽으시는 모습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불과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기도하러 가셨고 제자들도 함께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사역이 너무 고단해 기도도 하지 못하고 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무리가 예수를 붙아가 갔고 이후, 대제사장의 종교재판, 그리고 빌라도 법정에서의 정치재판 등, 불과 몇 시간 만에 모든 재판은 끝나고 금요일 오전 9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후 3시 운명하셨습니다. 모든 과정이 너무나 신속하게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충격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기록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요한복음 20:19

19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들은 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습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예수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다윗왕 때의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예수는 많은 병자를 고치셨고, 귀신을 내어쫓고, 고통당하는 자들을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보리떡 두 개와 물고기 다섯마리로 오천명이 넘는 자들을 먹이셨습니다. 그러한 예수님이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많은 사람이 환호했고, 마치 승리한 왕을 맞이하듯 종려나무를 들고 환영했으며 어떤 이는 자기 겉옷을 바닥에 깔고 예수님의 입성을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불과 며칠이 지나 예수는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하고 결국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은 것입니다.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두려움 속에 있을 때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립니다. 이어 마리아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문을 여니 세 여인이 헉헉대며 들어옵니다. 이들의 얼굴은 감격에 찬 얼굴입니다. 그것은 기쁨과 환희였습니다. 숨을 고르지도 못한 채 말하기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떤 제자는 이들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환상을 보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해되지 않는 것은, “세 명이 함께 보았다고?” 

믿을 수 없지만 일단 확인이 필요했습니다. 성격이 급한 베드로는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요한도 함께 따라갑니다. 무덤에 다다랐을 때 요한이 멈추어 섭니다. 그는 무덤 입구에 서서 세마포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세마포 안에 있어야 할 예수의 시신이 없던 것입니다. 순간 충격에 휩싸입니다. 베드로가 먼저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요한은 그때 일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요한복음 20:3–10

3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베드로와 요한은 빈 무덤을 확인합니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믿지는 않았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했다고 예수님이 부활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시신을 훔쳐 잘 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인들의 증언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여인들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을 정도로 신뢰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제자들이 모인 곳으로 돌아옵니다. 예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믿지 않았습니다. 시신이 없어진 것에 침울함이 더해졌습니다. 

그 순간 그들 가운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분명 문이 잠겨 있었는데, 어느 순간 예수님이 그들 사이에 서 계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제자들은 자기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예수님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예수님이 일란성 쌍둥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신은 누군가 훔쳐 갔고 쌍둥이 동생이 나타난 것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충분히 일리가 있지 않습니까?

요한복음 20:20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그런데 예수님은 옷을 걷어 자신의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무리 똑같이 생긴 일란성 쌍둥이라도 못 박힌 손과 창에 찔린 자국까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삼 일 전 십자가에 죽은 예수님이 확실했던 것입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부활하셨고 그의 제자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2. 이제, 부활 후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요한복음 20:21–24 

21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22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2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24열두 제자 중의 하나로서 디두모라 불리는 도마는 예수께서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1)평강이 있을지어다 다시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당시 흔한 인사말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샬롬!” 헬라어로 “에이레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말씀을 반복하십니다. 

19절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1절에도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가장 큰 은혜가 평강이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리 사이에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허무시고 하나님께 나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갑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이상 정죄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대신 심판 받으셨기에 하나님은 나에게 죄의 책임을 묻지 않으십니다. 

만일 예수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자기 죄로 죽은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동안에 하신 모든 말씀은 거짓말입니다. 그러나 말씀하신 대로 살아나셨기에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은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나의 죄를 담당하셨기에 그 누구도 정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떠신가요? 평강이 있습니까? 단순히 마음의 평화가 아니라, 하나님과 화목하십니까? 오늘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생명을 취하신다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담대함이 있습니까? 여러분의 죄가 완전히 사해졌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부활을 보고 믿은 자들, 그들에게 평강이 임했습니다. 그렇다고 앞으로 살아갈 그들의 인생이 꽃길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걷고, 순교자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평강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부활의 예수님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시면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삶의 고난과 어려움과 문제들은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넘어서는 평강이 임할 것입니다. 그 평강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고,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부활하사 나를 구원하셨다는 그 확신. 그것이 여러분에게 평강을 줄 것입니다.  

 

2)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하나님께서 죄악된 세상에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더럽고 추악한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죄악으로 인해 비참한 우리 인생을 위해 사셨습니다. 마침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구원은 예수님의 희생으로 인한 구원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내십니다. 고통 가운데 있는 세상으로 우리를 보내십니다. 죄의 비참함 가운에 있는 곳에 우리를 보내십니다. 

우리가 속한 가정은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 곳입니다. 

우리가 속한 직장은 예수님이 우리를 보내신 곳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주님께서 우리를 보내신 곳입니다. 

이곳은 눈물이 있는 곳이고, 아픔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이곳에 우리를 보내셨습니다. 

주님은 이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너희의 희생과 섬김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처럼 죄인을 위해 죽은 희생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라고 하십니다. 

 

138년 전인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두 분의 선교사님이 제물포항에 도착합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입니다. 당시 20대 청년들은 어떤 비전을 품고 낯선 땅에 들어왔을까요?

당시 우리 민족이 처한 현실은 비참했습니다. 가난한 자, 여성들은 천대받았고, 어린이들에게 인권이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청년들은 미래가 없이 술에 빠져 지냈습니다. 

이러한 땅에 첫 번째 선교사가 도착한 것입니다. 

 

얼마 전 아이들을 데리고 양화진 선교사 묘원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아편젤러 선교사님의 기도문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날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께서 이 백성을 얽어맨 결박을 끊으사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우리는 오늘 그의 기도가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를 얽어맨 결박에서 풀어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자녀의 빛과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다음은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기도입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은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 순종하겠습니다.

 

겸손하게 순종할 때 주께서 일을 시작하시고

그 하시는 일을 우리들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는 날이 있을 줄 믿나이다.

지금은 우리가 황무지 위에 맨손으로 서 있는 것 같사오나,

​눈물로 기뻐할 날이 있음을 믿나이다.

지금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우리는 두 분의 기도가 어떻게 성취되었는지를 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주님을 만났고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까?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 같이, 예수님의 보냄을 받은 주의 종들을 통해서입니다. 

그들은 죄로 인해 비참한 곳에 복음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우리가 가야 할 곳은 어디입니까? 

죄에 얽매인 자들에게 가야 합니다.  

흑암의 권세에 붙잡힌 자들에게 가야 합니다. 

허무한 인생속에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위하여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3)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이 말씀은 우리가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전하는 예수님이 죄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 죄사함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사하기 위해 우리 죄를 대신 담당하실 독생자를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이유가 무엇입니까우리 죄를 십자가에게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죄사함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모든 충만한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 은혜를 이 땅에서부터 누리다가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게 들어가 온전하게 누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처럼 비참한 세상에 보내지지 않았습니다. 

초기 선교사님들처럼 한국의 현실이 그렇게 비참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제 주변만 보아도 현실은 비참합니다. 자살로 인해 생을 마감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주변 사람들이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술로 살아갑니다. 미래가 캄캄하여 무당집을 찾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악한 영들에 둘러싸여 두려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돈이 없어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집이 없어 비참한 것이 아닙니다. 소망이 없어 비참한 것입니다. 고치지 못하는 질병으로 인해 소망을 잃은 분들, 각종 정신적 질병으로 인해 경쟁사회에서 도태되어 소망 없이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여 인생의 쾌략만을 쫒다 결국 허망하게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닙니다. 안락한 집이 아닙니다. 번듯한 직장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죄사함이 필요합니다. 죄사함을 받지 않으면 허망한 인생 이렇게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죄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 순간부터 주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부활의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죄사함의 복음을 전하라”

 

이 말씀에 순종하시고 여러분이 있는 곳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