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기타

24-04-04 17:11

2024 부활절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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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부활절 설교. “죽음 이후의 삶”

 

고린도전서 15:51–58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주님의 부활의 날에 우리 성도님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어 감사합니다. 

뉴질랜드에 지인들을 만나 대화했던 가장 많은 주제는 부활이었습니다. 이유는 대부분이 8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피터 할아버지는 93세, 던컨 목사님은 84세입니다. 저녁 늦게 까지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대화를 나눴습니다.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축복인지 모릅니다. 죽음이라는 가장 비참한 현실을 말하면서 웃을 수 있었고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뉴질랜드에 도착한 다음 날 예전에 살던 집과 마을을 둘러보았습니다. 

“이곳이 아빠가 엄마한테 프러포즈 한 곳이야.” “이곳이 엄마 아빠가 살던 집이야.”. 

아이들은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저와 아내는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 공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중, 아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부활 이후에 삶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우리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삶과 이어진다는 것이 참 감사한 것 같아”. 그 말을 듣는 순간 부활절 설교의 주제를 정했습니다. 그것은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부활 이후 우리의 삶은 어떠할까요? 여러분들은 천국에서의 삶을 기대하고 또 소망하고 계십니까? 사실 우리가 현실에 치여 살기에 천국의 삶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주변 분들이 돌아가셔서 장례식에 참석할 때 잠시나마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의 삶을 소망하지 않는 것은 그 나라의 삶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단지 고통이 없는 곳 정도로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도 않고요. 그러나 성경은 영생의 삶을 소망하라고 강조합니다. 

 

베드로전서 1:3–4 

3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산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산 소망이라고 한 것은 우리가 가진 소망이 죽은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썩고 더럽고 쇠하는 소망은 죽은 소망입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죽은 소망을 붙들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허무한 것입니다. 이룬 사람은 별거 아니라는 사실에 허무하고, 이루지 못한 사람은 이루지 못한 것으로 인해 허무하고. 또 그렇게 소망하여 붙들었지만 썩고 더럽고 쇠하는 것을 보며 허무하고. 

죽은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에게 산 소망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소망은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유업이라고 말합니다. 그 유업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그 유업이 무엇인지 안다면 산 소망을 가지고 천국의 삶을 기대하며 살 것입니다. 

이 시간 부활 이후의 삶에 대해 살펴보면서 산 소망을 붙드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서 정리해 보면, 부활 이후의 삶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현재의 삶과 연속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삶과 이어지는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현재의 삶과 불연속성 있습니다. 현재의 삶과는 단절되고 완전히 새로워지는 부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성경이 강조하는 것은 우리가 몸으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매주일 고백하는 사도신경의 마지막에 ‘몸의 부활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영혼의 상태로 부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몸으로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됩니다. 지금처럼 눈 코 입이 있고, 두 팔과 두 다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현재의 몸과 연속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고 부활한 이후에도 여전히 나는 나입니다. 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가진 정체성을 그대로 가지고 부활합니다. 여러분이 지닌 독특한 개성과 성격은 부활 이후에도 이어집니다.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은 영혼의 상태로 부활한 것이 아닙니다.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 몸에는 창자국이 있었고, 손과 발에는 못자국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없지만 예수님은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교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이 몸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0:20 

2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았지만 믿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못 자국난 손과 창자 국난 옆구리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너희 앞에 있는 존재는 영혼이 아니라 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영혼은 만질 수가 없잖아요. 그럼에도 여전히 의심하는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음식을 먹는 것 통해 증명하십니다. 

누가복음 24:39–43 

39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40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발을 보이시나 

41그들이 너무 기쁘므로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랍게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42이에 구운 생선 한 토막을 드리니 43받으사 그 앞에서 잡수시더라

 

음식을 먹었다는 것은 먹고, 소화하고, 배설하는 과정이 있음을 말합니다. 현재 우리의 몸과 연속성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불연속성입니다. 

현재와는 단절된 완전히 새로운 몸으로 부활합니다.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5장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44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여기서 육의 몸은 죄로 말미암아 노화되고 병드는 몸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의 몸은 신령한 몸이라고 말합니다. 신령한 몸은 생노병사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셨을 때, 죄가 이 땅에 들어오기 전의 상태로 완벽하게 회복됩니다. 처음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상태가 어떠했습니까? 죽음이 없었습니다. 죽음이 없다는 것은 병들거나 늙는 것이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42–43 

42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3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여기보면 ‘심고’ ‘살아난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설명하기 위해 씨앗을 비유로 들고 있습니다. 씨앗이 땅에 썩어져 죽고 새로운 생명체로 변하는 것처럼, 우리의 부활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35–36 

35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36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그러면서 너희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한 것은 모두 부활의 몸을 의미합니다. 

 

요한계시록 21:4 

4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아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는 것은 죄로 인한 죽음의 모든 증상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는 죽음의 힘에 갇혀 있지만 부활 이후에는 죽음이 더 이상 없습니다. 죽음의 힘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현재의 몸과는 전혀 다른 불연속성입니다. 몸으로 부활하는 것은 맞지만, 현재의 몸과는 전혀 다른 몸으로 부활합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들은 3일 전까지 예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나중에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풀어 주신 후 떡을 떼어주실 때 깨닫습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에는 지금의 모습과는 다를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장애나 질병을 가지고 사셨던 분들은 완전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저희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수술 후 회복되지 못하시고 천국으로 가셨습니다. 제가 천국에 가서 할머니를 만나게 됐을 때 할머니는 두 다리로 서서 저를 환영해 주실 것입니다. 물론 이 땅에서 할머니와 손주로 만났지만 천국에서는 형제요 자매로 만날 것입니다. 

 

이 또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입니다. 저의 할머니였다는 연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형제, 자매로 만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몸의 부활이 가능하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54–57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주님과 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이러한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죽은 후가 아니라 현재 살아있을 때 주님께서 오시면 우리 몸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51–52 

51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52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잠 잔다는 것은 죽음을 말합니다. 성경은 죽음을 잠이라고 표현합니다. 잠자는 자들은 나팔의 순간, 이때는 주님의 재림의 날을 말합니다. 이때 부활의 몸을 입고 이 땅에 내려옵니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새하늘과 새땅이 이 땅에 임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살아있는 자들은 어떻게 됩니까? 죽은 자들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살아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자들은 부활의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가지고 말입니다. 

 

이러한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생각해 보면, 천국의 삶이 어느 정도 현실로 다가올 것입니다. 먼저, 지금 우리의 삶과 연속된다는 면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면 무엇을 배운다던가 도전하는 것을 포기합니다. 왜 그런가요? 죽음이 끝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과정일 뿐입니다. 영생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애벌레가 나비가 될 때, 잠시 고치에 있는 시간과 같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영생으로 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구나. 죽음 이후에 부활의 삶이 있고, 그 삶은 지금의 삶과 연속성이 있구나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이가 아무리 많으셔도 무엇을 배우거나 도전하는 일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싶은 분이 계십니까? 

“목사님! 제가 얼마나 살겠다고 새로운 언어를 배웁니까?” 얼마나 살겠냐고요? 영원히 삽니다. 우리 삶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삶으로 연속됩니다. 

우리가 부활한 이후 갑자기 영어를 알아듣고 말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천국에는 언어가 하나라고 주장하더라고요. 과연 그럴까요? 불어, 중국어, 스페인어, 독일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각 나라의 언어가 주는 감동과 아름다움이 있어요. 바다에 똑같은 물고기 뿐이면 아름다울까요? 산에는 장미와 소나무뿐이라면 아름다울까요?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다양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사람만 해도 이 작은 얼굴이 비슷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놀랍지 않나요? 천국에 가도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사님! 그들과 어떻게 대화합니까? 언어가 다른 사람과 어떻게 속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나요?” 배우면 되잖아요. 10년이 걸릴까요? 20년이 걸릴까요? 100년이면 완벽하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영원히 사는데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활 이후의 삶이 지금과 연속된다고 생각하면 늦은 것은 없습니다. 지금 시작해도 늦지 않습니다. 80세가 넘어도, 90세가 넘어도 늦지 않아요. 

부활 이후에 영어를 못하는 내가 갑자기 영어를 알아듣고 술술 말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동안 배운 만큼 하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 삶이 연속된다고 믿으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죽는 순간까지 헛되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니까 자꾸만 포기하는 것입니다. 우울해하고, 허무해하는 것입니다. 

 

전에 가정예배 드릴 때 감사한 것을 말하는 시간이었는데 아내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엄마는 너희와 영원히 함께 살 수 있어서 감사해”.

죽음은 굿바이가 아닙니다. 굿나잇입니다. 마지막 순간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인사하실 때 “천국에서 다시 보자.”고 말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가 몸으로 부활할 것이기 때문에 현재 너희가 하는 일들이 의미가 있다고 그러니 더욱 열심히 하라고 말입니다. 

고린도전서 15:58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여러분이 자녀들을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것이 헛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부활해서 그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교회를 섬기고 형제 자매들을 위해 헌신할 때 때때로 낙심될 때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우리가 부활하여 만나기 때문입니다. 

 

피터 할아버지는 저희가 머무는 동안 힘을 다해 섬겨 주셨습니다. 공항에서 3시간을 기다리셨어요. 집에 가보니 각종 과일에 먹을 것을 풍성히 차려 놓으셨어요. 식사때마다 풍성한 것들로 섬김을 받았습니다. 던컨 목사님 댁에 있는 동안에도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잠깐 만나고 헤어질 사람이라면 이러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58 

58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저는 그때 여기 계신 모든 분을 만날 것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서로를 섬기고 세워주고 사랑하는 일이 헛되지 않은 것입니다. 

더욱 사랑하고 섬기시는 모두가 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