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기타

25-01-06 01:47

2024년 송구영신예배 "위로의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소서"

joywoori
댓글 0

2024년 송구영신예배 “위로의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소서”

고린도후서 1:3–4 (NKRV)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우린 그 어느 해 보다 우울한 연말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뉴스 대부분은 절망적인 소식들입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입니다. 각국 정상들은 얼마 전 무안공항에서 일어난 참사에 대해 애도를 표했습니다. 애도는 슬픔을 위로하는 방식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참사를 당한 사람들에게 어떤 위로를 주실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찾아 설교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슬픔을 겪는 성도들뿐만 아니라, 한해를 마감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로 메시지가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3 (NKRV)

3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위로하시고, 위로 받은 자들을 통해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신다고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1:4 (NKRV)

4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시며, 위로받은 우리를 통해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중요한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신앙의 길에 환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주 말씀드리지만, 예수 믿고 형통한 삶은 없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질병에 걸리고, 사업에 실패하고, 사고를 당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종교심은 이러한 것들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덕을 쌓고 기도에 열중하지만, 고난이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기독교는 만사형통을 약속하지 않습니다. 

한때 한국교회 성도들이 열광했던 삼박자 축복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요한3서 2 (NKRV)

2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예수 믿고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 즉 건강해지는 삼박자 축복은 모든 사람이 갈구하는 것이지만, 이 말씀은 약속이 아닌 기도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된다고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공로주의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많아 질병에 걸리고 사고를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충성하여 돈을 많이 벌고,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이러한 도식화된 신앙은 무속이지 기독교 신앙은 아닙니다. 한때 한국교회에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유행하면서 성도들은 야베스의 기도를 주문처럼 사용한 적이 있었습니다. 

역대상 4:10 (NKRV)

10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렇게 기도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은 이 기도문에 응답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기도에 종속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로 움직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뜻을 자유롭게 행하십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기도가 소용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자유롭게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에 닥친 환난을 내 자신의 문제에서 찾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후회와 절망만 남길 뿐입니다. 내가 그때 왜 그랬을까? 자신을 자책할 뿐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내 삶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하나님께서 내 삶을 주관해 가십니다.

 

내 삶이 닥친 환난도 마찬가지입니다. 환난의 원인을 나 자신에게서 찾는 것은 도움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은 ‘그때 그러지 말아야 했는데’라는 자책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왜 하나님은 그 일을 막아 주지 않았습니까?” “왜 나입니까?”

하나님에 대한 원망으로 흐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나쁜 일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대충하는데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삶의 모든 일을 원인과 결과로 인식하는 인과론은 모든 상황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또 우연히 일어난 것도 아니고, 운명이 걸려있는 것도 아닙니다. 방금 말씀드린,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라는 인과론, 우연히 일어난다는 우연론, 그 일이 일어나기로 결정되었다는 결과론, 그리고 운명론은 닫힌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닫힌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다스리신다는 것을 믿는 것을 열린 세계관이라 합니다. 

 

예를 들어, 지난 주일 말씀드린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완고한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닫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가나안보다 병력이 많고 현대화된 무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닫힌 세계관입니다. 그러나 열린 세계관은 무엇입니까?

 

골리앗 앞에 선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17:47 (NKRV)

47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다윗은 전쟁의 승리가 병력과 무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열린 세계관입니다. 의사는 죽는다고 말하지만,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께 있습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실패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성공과 실패는 하나님께 있습니라”라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이 이렇게 힘든 것은 과거에 잘못 했기 때문이야.”가 아니야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향한 선한 뜻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열린 사고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린 세계관, 열린 사고를 통해 지난 한해를 돌아보면, 지금 나의 모습은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 결과임을 깨닫습니다. 

 

이러한 열린 세계관으로 우리 삶의 환난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겪는 환난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습니다. 

 

욥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이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인과론, 즉 닫힌 세계관으로 그의 고난을 해석하려 애썼습니다. 그들은 아름다운 신앙의 말로 포장하여 욥에게 말했지만 결국 이런 의미입니다. “네가 겪는 고난은 네가 잘못한 결과야”

욥기 4:7 (NKRV)

7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엘리바스라는 친구가 욥에게 와 한 말입니다. 그는 욥을 위로하러 왔습니다. 욥은 처자식을 재앙으로 잃고 충격 가운데 있을 때입니다. 어떤가요? 그의 말이 욥에게 위로를 주었을까요?

환난을 겪는 자들에게 인과론을 들이대는 것처럼 잔인한 것은 없습니다. 신앙인들이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사람이 죽은 일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일어난 큰 참사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당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3:4–5 (NKRV)

4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5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인과론이 과학의 영역에서 사용될 때는 문제가 없지만, 인생의 문제에 적용되면 그것만큼 폭력적이고 잔인한 것도 없습니다. 불교도 인과론입니다. 업보가 고난을 낳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잘살라고 합니다. 선을 행하라고 합니다. 여러분, 얼마나 선을 행하면 고난이 없을 수 있을까요? 

 

최근 일어난 사고를 분석하고 여러 가지 원인을 규명하는 일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고의 원인을 제거하면, 그러한 사고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필요한 과정입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환난이 닥치는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후회와 자책만 남길 뿐입니다. 왜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절망의 감정은 쉽게 분노로 바뀌기도 합니다. 분노를 쏟을 대상을 찾다가 생기면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분풀이라도 해야 마음이 풀이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폭력입니다. 

 

사회적 참사를 당한 희생자 가족 중에 어떤 분들은 여전히 분노에 사로잡혀 자신 인생을 허비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일어나 주어진 삶을 살아내는 분들도 있습니다.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맹인 한 사람을 보게 됩니다. 제자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시각장애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까? 자깁니까? 그의 부모이니까?

 

당시 유대인들은 무언가 좋지 않은 일이 발생한 것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과론입니다. 닫힌 세계관입니다. 시각장애인이 된 것은 시각장애인이 될 만한 죄를 범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불교 용어로 그의 업보입니다. 그런데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경우 밖에는 없습니다.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죄를 지었던가, 아니면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을까요? 

요한복음 9:3 (NKRV)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무엇 때문이 아니다’라고 하십니다. 인과론을 거부하십니다. 무엇을 위하여 시각장애인이 되었다고 하십니다.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위해 시각장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인정하는 열린 세계관입니다. 이후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단순한 위로가 아닌 실제로 그의 삶을 변화시켰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이와 같습니다. 절망적인 현실에 빛을 비추십니다. 탓하고, 분노하는 우리에게 소망의 빛을 비추십니다. 네가 그렇게 힘든 것은, 네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죄의 결과로 환난을 겪을지라도 그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붙잡여 왔을 때 예수님의 행동이 어떠했습니까?

모두가 정죄하며 돌을 들어 치려고 할 때도, 예수님은 정죄하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8:11 (NKRV)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정치적으로 혼탁한 시기를 보내며 언제까지 누구를 탓하고, 분노하시겠습니까? 사회적 참사 앞에서 언제까지 우울해하며, 낙심하시겠습니까? 법과 질서가 세워져야 합니다. 애도의 과정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분노나 과도한 슬픔은 신앙인의 바른 자세는 아닙니다. 

역사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이 땅을 다스리십니다. 지금은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하지만,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역사나 개인의 역사는 무엇 때문에 결과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위하여 진행합니다. 그 무엇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모든 역사의 종결점은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우리가 한 해 동안 살아오면서 내 의지와 노력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음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모습으로 있던, 부족한 모습으로 있던, 현재의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빚어가시는 과정 가운데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입니다. 

 

바울은 고질병으로 인해 고생했습니다. 학자 중에는 안질이라고 하는 분도 있고, 간질이라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질병을 놓고 간절히 기도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2:8–9 (NKRV)

8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9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유대인들에게 세 번은 완전수입니다.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전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질병을 치료하신 것이 아니라, 그 질병을 가지고 주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강하심을 자랑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머물게 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바울의 사역 가운데 질병을 치유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픈 몸을 이끌며 복음 사역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 그는 기뻐했습니다. 크게 기뻐했다고 합니다.  

 

어떻습니까? 그의 환난은 ‘무엇 때문이 아니라, 무엇을 위하여’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심을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그는 자신의 질병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그를 위로했습니다. 그는 위로받았을 뿐만 아니라 기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 이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이 땅에서 어려움 없이 평안히 살다가 천국에 가게 하옵소서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와 목적은 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자들로 세우길 원하십니다. 

베드로후서 1:4 (NKRV)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마태복음 5:48 (NKRV)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욥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욥기 7:17–19 (NKRV)

17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18아침마다 권징하시며 순간마다 단련하시나이까 

19주께서 내게서 눈을 돌이키지 아니하시며 내가 침을 삼킬 동안도 나를 놓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리이까

 

“하나님, 내까지게 뭐라고 이렇게 내 삶에 개입하셔서 고난을 주시고, 절망케 하시고, 분노케 하십니까? 그냥 하나님 내가 평안히 죽게 해주세요. 아침마다 권징하시고, 순간마다 단련하시고, 침 삼킬 동안도 놓지 않으십니까?” 욥의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하신다구요?  

욥기 7:17 (NKRV)

17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크게 만드사 그에게 마음을 두시고

 

욥기 23:10 (NKRV)

10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하나님의 기대는 우리가 하나님처럼 사랑하고, 하나님처럼, 용서하고, 하나님처럼 의롭고, 하나님처럼, 거룩하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이 기대를 낮추지 않습니다.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요셉은 억울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마침내 애굽의 총리가 되었지만, 그의 삶은 상처로 얼룩졌습니다. 혹자는 그가 꿈의 사람이었다, 비전의 사람이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한번도 애굽의 총리가 되는 꿈을 꾸어본 적이 없습니다. 자신이 꾼 꿈은 꾸어진 것일뿐, 그 꿈을 해석하지 못해 형들에게 말했을 뿐, 그는 아버지의 편애를 받다가 형들에게 밉보여, 애굽의 노예로 팔려갑니다.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비록 노예 신분이었지마,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살림을 관할하게 됩니다. 그러나 보디발 아내를 성추행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얼마나 억울한 인생입니까? 그가 잘못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요셉에게 네가 애굽의 노예가 된 것은 네 죄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네 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요셉 조차도 자기 인생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꼬인 인생을 살아야 하는가? 그런 그가 바로의 꿈을 해석합니다. 7년의 풍년과 7년의 흉년이 있을 것이며 이를 위한 대안까지 제시하게 됩니다. 

그는 바로의 총애를 받고 애굽의 총리가 됩니다. 

 

그렇다면 그가 신분이 상승하고 풍족하게 살았으니 그동안 억울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는 여전히 자기 삶을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흉년이 깊어지고 자기 형들이 애굽에 곡식을 구하러 오게 됩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절을 하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자기 삶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내 삶은 하나님이 주관하시며,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내 삶이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위해 억울한 일도 당하고, 환난도 당했음을 깨닫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만났을 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5:5–8 (NKRV)

5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6이 땅에 이 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 년은 밭갈이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7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8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요셉은 하나님이 하신 일이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 말을 하기 전 얼마나 울었는지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45:2 (NKRV)

2요셉이 큰 소리로 우니 애굽 사람에게 들리며 바로의 궁중에 들리더라

 

요셉의 이러한 통곡은 서러움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동안 이해하지 못한 자기 삶의 해석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억울한 일을 당하게 하시고, 환난으로 인도하신 것은, 형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실 일, 야곱의 가문을 번성케 해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는 일을 위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 보복을 두려워하던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50:19–21 (NKRV)

19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해하려 했던 사실을 주지시킵니다. 그것은 형들이 잘못한 것입니다. 형들이 내게 죄를 범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자기 삶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체험으로 깨달았습니다. 자기 삶에 일어났던 크고 작은 모든 일들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꾸어 하나님의 뜻을 세우는 것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엇으로 위로를 받습니까? 위로의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로하십니까?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삶을 붙잡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당장에는 앞이 보이지 않고, 절망적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그분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2025년 새해에도 우리 삶에 어려움들이 닥칠 수 있습니다. 예기치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 삶을 붙드시고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이끄심을 믿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이 일에 신실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 진리의 말씀으로 환난 중에 있는 성도들을 능히 위로하시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