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12-28 14:36

요한복음 강해 83.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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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83.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복음 21:15-17
15.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또 두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이르되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이르시되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세 번째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양을 먹이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갈릴리 바닷가에서 아침식사를 하며 떠오르는 태양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손수 구우신 생선과 데우신 보리빵을 먹으면서 그들의 마음은 행복으로 충만했습니다. 파도소리가 잔잔하게 들리는 그 고요한 바닷가에 둘러앉은 그들은 그 평안함이 깨어질까 그 누구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이전처럼 예수님 어디로 가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묻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그 순간만큼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식사가 다 끝났을 때입니다.
고요함을 깨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왜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을까요?

예수님께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처음 주신 것은 그의 신앙고백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더러는 세례요한, 엘리야,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랴 하느냐”고 묻지요.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바요나’라는 것은 요한의 아들이라는 히브리어법입니다. 요한을 히브리어법으로 하면 요나입니다. 이것이 스코트랜드로 가서 ‘이안’이 되고 미국으로 가서 ‘존’이 된 것이죠. 요한이라는 의미는 ‘여호와는 은혜가 깊으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당시 요한이라는 이름이 흔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의 아버지가 요한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시몬이 원래 그의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라고 부른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가까운 사람들끼리의 호칭을 들어보면 서로의 관계가 어떠한지 대략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름에는 성과 이름이 합쳐져 있습니다. 성은 그 사람의 문화를 의미하고 이름은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부부 사이에서 성과 이름을 함께 부를 때를 보면 주로 부정적인 상황일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너는 아직도 너의 문화를 가지고 나에게 맞추어주지 않는다는 섭섭함이 포함되어 있을 때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신 것은 베드로의 정체성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언제든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는 그것도 세 번씩이나 부인할 수 밖에 없는 그 사람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물으시죠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는 것은 함께 모여있던 제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 질문을 받았을 때 그는 요한복음 13장 사건을 떠올렸을 것이 확실합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세족식에 이어 최후의 만찬을 하시는 장면입니다. 그때도 지금처럼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둘러앉아 떡과 포도주를 나누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가 갈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묻습니다.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그 유명한 라틴어 “쿼바디스 도미네”라고 묻지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말합니다.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그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죠.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모든 제자들이 앞에서 자신이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그렇게 표현했던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예수님을 사랑했지만 나를 그들 보다 더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내 목숨을 버릴 수도 있습니다.” 하며 그렇게 고백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에 있어 치명적인 상처를 들추어내신 것입니다.
자신이 그렇게 사랑한다고 했지만 결국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을 저주하며 부인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베드로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다시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자신의 과거의 죄악과 실패의 흔적을 들추어내신 주님의 그 질문에 베드로는 고개를 숙였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베드로라고 부르시지 않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고 부르셨던 것입니다.

네 존재의 정체성이 무엇인줄 아느냐?
네가 어떤 사람일줄 아느냐?
이것을 물으실 때 예수님은 베드로를 야단치거나 나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약함과 죄악을 긍휼히 여기시는 그 마음으로 묻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두 번째 또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세 번째 또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자 베드로가 근심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전에 자신이 예수님을 부인했던 그 실패와 연약함의 기억들로 인한 고뇌였을 것입니다. 한번 한번 물으실 때마다 나를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고 했던 그때의 일들, 그리고 마지막 물으셨을 때, 세 번째 예수님을 부인할 때 예수님을 저주했던 일과 바로 그 시각 닭이 울었고, 닭 울기 전 세 번 부인하다는 그 말이 떠올라 괴로워했던 장면이 떠올랐던 것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고,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던 자신의 모습에 괴로웠던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신의 앞날에 닥칠 위협 앞에서 너무나 쉽게 예수님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요한의 아들 시몬인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왜 세 번씩이나 질문을 하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다짐이나 결단을 받고자 하심이 아닙니다. 그것은 베드로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실패와 연약함을 인정하고 과거의 상처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켜 하나님 나라의 사명을 감당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항상 변화와 회복은 자신의 문제를 직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나는 할 수 없다는 것, 나는 연약하다는 것,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때만이 비로소 성장할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실패와 좌절을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내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를 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도 자신의 믿음이 좀 괜찮고 인격도 성숙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그 믿음과 인격의 바닥을 보게 하시는 일들을 허락하시지요. 주어진 환경이나 상황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내 앞에 힘들게 하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내가 문제입니다. 그 상황과 사람을 인내하고 감당하지 못하는 내 믿음과 인격의 수준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분노하기도 하고 행동으로 말로 아픔과 상처를 주기도 하지요.

그리고 돌아서서 생각합니다.
여전히 변하지 않았구나! 여전히 죄인이고,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구나!
내가 과연 하나님의 사람이 맞는가?

 

그 자리에 예수님께서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죠?
“000,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무슨 의미입니까?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했지. 그런데 너의 모습을 봐라.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니?”
“이게 바로 너야.”

그래도 우리는 대답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부족하고 넘어지고 실패하지만 그래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항상 자신을 먼저 사랑했던 자들입니다.
그렇잖아요. 내 옆에 있는 사람조차 사랑하지 못했잖아요.
내 자식조차도 사랑하지 못했잖아요. 내 형제 조차도 사랑하지 못했잖아요.
그런데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보이지 않고 추상적인 존재니까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서 결국 예수님이 원하는 삶을 살고 그러다가 하나님 나라에게 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를 사랑했습니까?
내 자신을 사랑했죠.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를 끌고 가시는 분도 예수님이세죠. 우리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이 붙잡고 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세워주길 것입니다.
결코 내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요한1서 4:10, 19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따라서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냐고 물으신 것은, 시몬의 아들 베드로는 결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내가 너를 사랑하고 내가 너를 붙잡고 끌고 가겠다는 예수님의 완벽한 사랑고백인 것입니다. 

로마서 8장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십니다.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목양의 사명을 주신 것입니다.
내 양이 누구입니까? 앞으로 제자들의 복음선포를 통해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양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양, 예수님의 소유인 그의 백성들.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내 양이라고 하신 것이 참 은혜가 됩니다.
우리가 정말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것을 표현할 때 “내 꺼야”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의 백성들을 내 양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을 돌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양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방향이 예수님의 양에게로 흘러가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예수님의 양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남편이 예수님의 양입니다.


여러분의 아내가 예수님의 양입니다.
나의 형, 누나, 언니, 오빠가 예수님의 양입니다.
나의 자녀들이 예수님의 양입니다.

그들을 돌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막연한 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막연한 존재일 때 원수까지도 사랑합니다. 저는 김일성을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러나 그 사랑은 허상입니다. 우리가 내 곁에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허상일 수 있어요.

요한1서 4:20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21.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여러분!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다 선교사가 되고 목사가 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사명이라는 것이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사회가 급성장하면서 교회도 비전 병에 걸린 것 같아요.
무언가 거창한 비전을 걸어놓고 구호도 외치고 해야 뭘 하는 것 같아요.
저도 많이 했습니다. 어떤 때는 교회인지 보험회사인지 모를 때가 있어요.
아닙니다. 사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먼저는 바로 내 곁에 있는 사람을 주님의 양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내 자녀가 아니라, 주님의 양으로 봐야 합니다.
내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도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양입니다.
주님의 양으로 인정하고 바라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돌보아야 합니다.
어떻게요?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실패하고 넘어지고 연약한 우리를 찾아오신 것처럼, 우리는 그들을 포기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을 인내하고 참아내신 것처럼 우리도 인내하고 참아내야 합니다. 거기서 또 넘어지고 실패할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깨닫게 되겠죠.
내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그런데도 또 찾아오시고 일으켜 세우시는 주님처럼,
나 또한 내 곁에 주신 주님의 양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