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3.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2016.4.3.
요한복음 1:9-13
9.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11.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한복음 강해 세 번째 시간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요한복음의 프롤로그 즉 서문에 해당합니다. 1절부터 18절까지입니다. 저자 요한은 서문을 통해 이제 자신이 증거하고자 하는 모든 내용을 요약하여 함축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 전체를 이해하고 이 부분을 읽어보면 이해가 쉽지만 처음 이 부분을 대할 때는 난해하고 어렵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네 부분으로 나누어 공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난 첫 시간, 말씀 즉 로고스의 의미를 살펴보았고 예수께서 바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로고스임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간에는 그 로고스가 또한 빛으로 세상에 오셨음을 말씀드렸습니다. 빛이 세상에 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 빛을 증거하는 요한의 역할에 대해서도 살펴보았습니다. 요한은 바로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 주는 가교 역할을 하면서 구약의 모든 내용이 예언하고 증거하였던 하나님 그 분이 이땅에 인간으로 오셨음을 증거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이제 그 로고스, 빛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코스모스)에 오셨을 때 나타난 세상의 반응입니다. 이제 2장에서부터 시작되는 내용은 바로 이 땅에 빛 되신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어 오셨을 때 사람들이 보인 두 가지의 상반된 모습을 보여줄 것인데 이것에 대하여 서문에서 미리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세상은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뉘었습니다.
한쪽은 빛을 사랑하여 빛 가운데 거하는 사람들이었고 또 한 부류는 빛을 싫어하고 어둠가운데 있기를 좋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니까 9절에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첫 번째 부류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고 영접하지 않는 자들을 말합니다.
구약에서부터 율법과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그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여기 “세상”이라는 단어가 계속 나오는데 저자 요한에게 있어 “세상(코스모스)”이란 하나님을 반역한 세상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반역하여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 가운데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원래 코스모스의 뜻은 ‘우주, 질서, 조화, 장식’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가 얼마나 질서있고 조화롭고 아름답게 장식되었는지 이 단어는 잘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 즉 코스모스는 하나님의 영광을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연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시편8: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시편19:1)”
전에 있었던 교회 장로님께서 중고등부 수련회 때 특강을 해주였는데 미국 NASA에 초청되어 가서 우주선이 제작되고 발사되는 과정, 그리고 우주에서 찍은 사진들을 학생들에게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장로님께서 하신 말씀이 그 무한광대한 우주의 사진들을 보면서 지구가 얼마나 작은가? 정말 먼지와도 같은 것이 지구이고 이곳에 사는 나라는 존재는 먼지보다 더 작은 존재인데, 그 존재를 하나님이 아시고 사랑하신 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셨는데, 저도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
그렇죠? 그 무한광대한 우주 가운데 펼쳐진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들....
그런데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반역하여 그 아름다운 창조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깨뜨려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22절에 보면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인간의 죄악 때문에 피조세계의 질서가 망가져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이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나마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세상을 붙잡고 있기에 그나마 유지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세상은 벌써 붕괴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반역한 세상, 그리하여 조화와 질서와 아름다움이 아니라 혼돈과 무질서와 어둠의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요한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세상 즉 코스모스인 것입니다.
이곳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창세기 1장 2절에서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을 때 빛이 임하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세상이 된 것처럼, 혼돈과 공허와 무질서 그리고 흑암의 땅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9절에 빛이 왔다고 하지 참빛이 세상에 왔다고 말합니다. 참빛은 빛의 근원으로서 빛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참’은 ‘거짓’과 대조되어 참이라는 것이라 아니라, 부분적인 것과 대조되어 ‘참’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잠깐 동안 왔던 빛들이 있었습니다. 선지자들이 그랬고 세례요한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태양빛 아래 있는 촛불과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참빛이 세상에 온 것입니다.
그러자 세상의 어둠이 폭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마치 이런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둠 속에서 더럽고 협오스러운 죄악들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깜깜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악은 감추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그곳이 환하게 밝혀진 것입니다. 그러자 자신들이 행하고 있던 그 더러운 죄악들이 폭로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더럽고 협오스런 모습이 들추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두 가지 상반된 반응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 부류는 자신의 죄악을 깨닫고 회개하여 빛 가운데로 온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는 자신의 죄악을 폭로시킨 그 빛을 없애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자신들의 종교적 위선과 가식으로 죄악을 가리웠던 자들에게 예수님의 빛은 그 모든 거짓을 들추어 내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입니다. 반면 세리와 죄인들과 같이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한 자들에게는 그 빛이 오히려 소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불렸고, 바리새인들과 같은 종교인들에게는 제거해야할 대상이 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의 어둠을 들추어내신 것입니다. 종교적 선행과 의식으로 포장한 자들의 죄악으로부터 시작하여 창기들에 이르기까지 그 빛은 거침없이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 빛은 그 누구에게도 차별 없이 비추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예수님의 빛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비추고 있습니다. 그 빛은 국가의 권력자로부터 해서 힘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까지 비춥니다. 그 빛은 어린아이에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차별없이 비춥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빛 가운데로 나아오고 어떤 이들은 그 빛을 싫어하여 숨어버립니다. 그 빛을 무시하고 멸시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10절에 후반절에...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땅, 자기 백성은 이스라엘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언약을 통해 자기의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면서 너희는 나의 백성이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줄곧 그들을 향하여 내 백성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계시하였고 그 모든 계시의 핵심은 바로 인간으로 오실 하나님 곧 그리스도, 메시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백성 이스라엘 당시 유대인이라고 불리운 그들, 구약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고 성전제사와 율법지킴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갔던 자들에게 메시야의 오심은 너무도 명확히 예언된 말씀이었고 그 예언에 따라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유대인들의 잘못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자신의 백성들 조차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면 그 나머지 사람들은 어떠하겠냐는 것입니다. 그 만큼 인류가 타락하여 하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하나님을 인간들은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죄인들의 실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죄인들의 무리 가운데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고 믿는 무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그들은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예수를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영접한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보니까,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원문에 보면 12절 앞에 “그러나”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이 이었다는 것입니다. 영접한다는 것은 맞아들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환영하며 맞아들인 다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그 존재를 믿는 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존재, 즉 2 천년전 팔레스타인 땅에 오신 한 사람, 그의 이름은 예수인데 그의 존재가 바로 하나님이며 삼위일체 중 성자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이름을 믿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자녀인가? 하는 문제는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내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그것은 내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 같은데 교회 안에 실제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목사가운데도 있고 신학교 교수가운데도 있으며 신실해 보이는 성도들 가운데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부처, 공자, 간디와 같은 성인으로 믿습니다. 어떤 이들에게 예수는 마음의 평안과 위안을 주는 존재입니다. 어떤 이들에게 예수는 빌면 복을 주는 좀 더 고상한 종교의 대상에 불과합니다.
만일 이 사실이 믿어 지지 않으면 우리의 신앙 전부는 헛것입니다. 그것은 성경 전체를 부정하는 것과 다름 아닙니다. 그런 분은 죄송하지만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정말 이 질문 앞에 자신을 정직하게 세워보시기 바랍니다.
마음속으로 한번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정말 예수를 인간이 되신 하나님으로 믿는가?
이것은 누가 강요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믿고 싶어도 안믿어 집니다. 성경을 아무리 읽어도 이 사실이 안믿어 지는 사람도 많습니다. 설교를 아무리 들어도 안믿어 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머니가 권사님이고 아무리 기도를 해도 안믿어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잘 풀어서 가르친다고 해서 믿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인간이 노력과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자들은 어떻게 된 것인가?
12절에 보면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한 자들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똑 같이 복음을 들었는데 저 사람은 믿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3절에 보면, 그들이 어떤 자들인가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혈통, 즉 우리 부모님이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혈통을 구원의 근거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외국에서 바이블칼리지를 다닐 때 학장님과 면담을 하는데 언제 그리스도인이 되었냐고 묻길래 한국에서 하듯, “저는 모태신앙입니다.”라고 했더니, 학장님이 웃으시면서 “차고에 있다고 다 차가 아닙니다.”하시더라구요. 그렇죠? 모태신앙이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부모님의 신앙이 유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4대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다고 해서 구원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육정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육정으로 번역된 ‘델레마코스 사르코스’는 ‘육체적인 욕망’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성령에 의한 것이 아닌 세상 적인 육체적 욕구나 정욕, 그리고 거기서 아온 세상의 가치체계, 예를 들어 사회적 명망이나 권력, 부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들로 절대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선생이었고 관원이었으며 부자였던 니고데모가 주님께 찾아와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당신이 행하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고 했을 때, 주님께서는 네가 거듭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할 수 없다고 한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가지고 있던 육신적 자랑들이 구원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사람의 뜻’은 무엇입니까? 절대자에게 도달하려는 인간의 이성적 노력이나 수양, 율법 준수 같은 것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람의 뜻으로 절대 주님을 알아보거나 영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까?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영접한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영접했지만 사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어서 예수가 우리 삶에 찾아 왔을 때 그분을 알아보고 영접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적 순서나 논리적 순서로 이해하기는 어려운 부분입니다.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내가 예수를 믿게 된 것은 결국 하나님께로서부터 난 자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었는데 그것은 내 자발적 의지였는데, 돌이켜 보니 그 자발적 의지조차도 이미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역사하사 믿음으로 가지도록 계획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 개혁주의 장로교에서는 예정론이라고 하는데, 예정론이라고 하는 것이 저 사람이 과연 선택받은 하나님의 사람인가 아닌가? 할 때 사용되든가 또는, 내 인생의 길이 미리 정해져 있는 운명론으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시점에서 우리의 구원을 돌이켜 볼 때에 “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것이 내 의지와 노력으로 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그분의 은혜 때문에 된 것이구나” 라는 사실은 깨닫데 있는 것이죠.
이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12절과 13절이 함께 중요한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것은 우리 자신의 자발적 선택과 의지와 노력인 것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았더니 13절 말씀처럼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 즉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구나 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까?
첫 번째,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진리가 공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영접한 것 조차도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내가 믿은 것 같은데 믿음을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절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지 내 의지와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자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을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은혜의 빛을 비추시면 언제든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구원을 우리가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말 믿지 않을 것 같은 사람도 하나님이 구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지 않는 가족구원을 위해 계속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또 나의 구원을 자랑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 나보다 더 훌륭한 인품과 교양과 윤리적 수순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것에 비하면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합니까? 그런데 내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권세는 신분에 따르는 책임과 특권을 함께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그것이 나에게 주어졌는데 나같이 부족하고 연약한 자에게 임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아무런 조건도 댓가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베풀어진 은혜.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은 자신의 실체를 압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죄악된 모습의 실체를 알기에 감히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넘치는 그리스도의 은혜의 깊이와 넓이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분들은 빌립보서 강해13번째 시간에 다루었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부분을 꼭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은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이, 결국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사실 보다 우리에게 더 위대한 사실은 없습니다.
저는 여기에 인간의 존엄과 가치에 대한 최상의 것을 봅니다.
12절의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라는 표현이나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는 표현이 바로 우리 자신의 존엄과 가치를 보여주는 위대한 말씀 아닙니까?
세상 사람들도 자신의 신분과 격에 맞는 품위를 가지려 노력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의 삶의 품격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게 됩니다. 그것은 마땅히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고 나타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벧전1:16)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5:14)
내 자신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그리고 내 주변에 형제와 자매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인가?
나의 자녀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가 있고,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인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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