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4. 자기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들/2016.8.28.
요한복음 5:31-47
31.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33.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35.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36.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39.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5.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발할까 생각하지 말라 너희를 고발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가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예수라는 분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특히 인자라는 표현을 통해서 신적인 존재가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하시는 두 가지 사역에 대해서도 나누었죠. 그것은 생명을 주는 것과 심판하는 일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때 영생을 얻지만 그렇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내용은 그렇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말씀 속에서 3가지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기독교는 확고한 증거위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간혹 ‘무조건 믿어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기독교는 설명되어지고, 증명되어집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이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조건 믿는 것, 덮어놓고 믿는 것처럼 무모하고 외골수적인 신앙이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확고한 진리위에 세워져있습니다. 진리는 영원하고 변함이 없어야 하며 시대나 문화에 상관없이 보편타당할 때 그것인 진리가 됩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영원하고 변함이 없으며 보편타당하고 절대적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설명되어지고 이해되어지는 과정을 거쳐 비로소 내 안에 확고한 믿음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셨다는 것은 기독교가 권위적이며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것임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후에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하여 증명하기 시작하십니다. 왜 굳이 그렇게 하셨을까?
사실 예수님은 증거가 필요한 분이 아니십니다. 그 분의 말씀과 사역을 보면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우리의 신앙이 설득되어지고 이해되어지고 우리의 말로 고백되어질 때 건강한 신앙으로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신비적인 것만 추구하는 신앙은 타오르는 것 같으나 쉽게 꺼지고 풍성한 것 같으나 거품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건강한 신앙인은 계속해서 진리의 말씀을 배우고 이해하고 고백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이 확고한 믿음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실에 대하여 설명하지 못하면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고백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 벨직 신앙고백, 도르트 신경, 사도신경...이러한 것들이 모두 자기의 신앙을 말로써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진리의 내용을 설명하여 이해시키고 그것이 자신의 신앙으로 내면화되어 고백되어질 때 신앙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그의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16). 그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증명하셨다는 것을 통하여 기독교의 성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일방적이거나 권위적이지 않습니다. 믿으라고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설명하고 이해시키며 설득합니다. 그 속에서 성령님의 역사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이렇게 오해하시면 안됩니다. 그러니까 기독교는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종교니까 성경의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신앙이 좋거나 믿음이 투철하겠네? 하는 생각입니다. 기독교신앙에서 지식은 중요하지만 신앙이 지식과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신학교 교수님보다 시골에서 ㄱㄴ도 모르는 할머니의 신앙이 더 좋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결국 열매를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배운 성경의 진리가 나의 삶에 순종의 열매로 드러나지 않으면 그 지식은 아무런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 성경 말씀 한 구절 붙잡고 평생을 순종하기 위해 싸워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의 지식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꼭 신앙의 성장과 비례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자신을 증명하셨는가 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도입부분입니다.
“31.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되
32.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 증언이 참인 줄 아노라
저는 법정에 가보지 않았지만 법정드라마를 보면 변호사나 검사가 어떤 일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증인을 채택하지 않습니까? 마치 그런 장면을 연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첫 번째 증언대에 오른 사람은 세례요한입니다.
33.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였느니라
34.그러나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1장을 공부할 때 이미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당시 세례요한은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선지자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메시야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회에서 몇 사람이 파견되어 세례요한에게 묻죠. 네가 그리스도냐고 물을 때 요한은 아니라고 분명히 대답하고 내 뒤에 오시는 분, 바로 예수를 지칭하여 그분이 그리스도이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자신에게 다가오는 예수를 향하여 저분이 바로 세상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소개하고 자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그를 따라가게 했습니다.
당대에 많은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었던 그래서 그리스도가 아닌가? 할 정도로 인정받았던 세례요한이 증거하기를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사람들이 증언해야만 자신의 존재가 확증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증언이 필요한 분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8: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예를 들어 제가 남자라는 사실을 누군가가 증언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저의 모습이 확실히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역과 그분의 말씀을 보면 너무나 확실하게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악으로 말미암아 눈과 귀와 이성과 모든 것이 타락했기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지 못했고 그분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나는 누군가의 증언이 필요하지 않지만, 너희를 구원받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증거가 세례요한의 증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35절을 보시면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당시 요한의 사역은 등불을 비추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사역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회개의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빛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니 등불이 더 이상 소용없는 것입니다. 요한의 등불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비하는 빛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빛 되신 예수께서 오시자 그는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두 번째 증언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특별히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36절입니다.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분께서 말씀하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인류 역사 가운데 예수님처럼 말씀하신 분이 없었고 그분처럼 행동하신 분이 없었습니다. 유월절 명절에 성전에 들어와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쫒으시며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호통 치시는 모습,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씀하시는 그 당당함.
우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입니다. 그것은 안식일에 생명을 살리는 사역을 통해 깨어진 안식을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보게 됩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역을 통해서 예수가 흥이 깨어지고 기쁨이 사라진 우리 인생을 기쁨으로 회복시켜 주시는 분임을 보여주십니다.
요3장에서 당대 최고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인 니고데모와의 대화 속에서 거듭남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통해서 그 어디서도 들어보지 못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듣게 됩니다. 요4장의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 속에서 죄인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사역과 말씀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이 일을 이 땅에서 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 증거는 하나님입니다.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하나님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언하십니다. 특별히 여기서는 성령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5:26
26.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는 이유는 성령님의 증언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영혼에 역사하사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이론적으로 안다고 하여도 성령님께서 우리 지성에 빛을 비추어 주시지 않으면 믿음이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37-38절을 다시 보시면
“37.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상을 보지 못하였으며
38.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가 보내신 이를 믿지 아니함이라“
말씀을 듣지만 그것이 우리의 이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심령에 새겨지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동안은 아무리 들어도 이해되지 않았던 말씀이 이해되어지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으로 들렸던 말씀이 나의 이야기처럼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지성을 주시고, 우리의 귀를 열어 그 말씀이 진리로 들리게 하시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 증거는 성경입니다.
성경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성경은 구약성경을 말합니다. 구약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는 책입니다.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 구약입니다. 물론 성경 구절구절 마다 예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예표적으로 모형적으로 예수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살펴본 창22장의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또한 구약에 나타난 절기들, 성막의 구조나 기물들, 제사법들 그 모든 것이 예수님을 예표하거나 모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절기들이 등장하면서 예수님께서 그 절기를 완성하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살펴본 5장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구약의 안식일의 참된 의미를 완성하신 분이 예수님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구약의 성도들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여호와의 구원을 기억하여 기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구원을 완전히 이루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면서 지키는 것이 안식일입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은 예수님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4장에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나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보았던 자들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덤에 갔다가 그의 시신을 보지 못하고 세마포만 보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갈때에 한 분이 동행하기 시작합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예수님인줄 알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아직 성령께서 역사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5.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모세와 선지자의 글은 구약성경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모든 성경이 바로 예수님에 관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30.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32.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믿음을 주실 때에 하셨던 일은 성경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들 앞에서 기적을 행하거나 또는 못자국난 손을 보여주시고 창자국난 옆구리를 보여주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풀어주신 것입니다. 그때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 진 것입니다.
이렇게 구약성경은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은 이미 오신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그러니까 모든 성경의 주제는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을 보아야 하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속에서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께 더 깊고 온전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네 가지 증거를 통해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확고한 증거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40절부터 보겠습니다.
40.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43.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하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44.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42절에 보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44절에 보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지 않고 자신의 영광을 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인 삶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 가치로 삼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 조금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자기의 영광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가면서도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했고 그것을 위해 죽기까지 복종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침을 뱉고 따귀를 때리며 장난치는 군병 앞에서도 침묵하셨지만 하나님의 집을 장사하는 소굴로 만든 사람들을 채찍을 들어 내어쫒으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나를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과 그 분의 말씀이 나를 주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갈라디아서 2:20의 고백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러한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믿음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늘 생각합니다. 내 삶의 모든 방향과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거기에 나의 유익은 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속에서 하나님은 풍성함을 주시고 기쁨을 주시며 평안과 안식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것이 우리가 서야할 가장 안전한 곳이기에 그 자리에 설 때 비로소 우리의 영혼이 안식을 누리고 기뻐하게 되는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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