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05-02 23:28

요한복음 강해 7. 우리를 부르시고 변화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

joywoori
댓글 0

요한복음 강해 7. 우리를 부르시고 변화시키시는 예수님/ 2016.5.1.

 

요한복음 1:35-42
35.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요한복음 강해 7번째 시간으로 우리를 부르시고 변화시키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세례요한의 두 번째 증언을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가 세상죄를 지고가는, 즉 없애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시 구약성경을 잘 알고 있던 당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어린양이 어떤 의미였는지 네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창22장의 여호와이레, 즉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는 그 어린양이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할 때 잡아서 구워 먹고 그 피는 문설주와 지방에 발랐던 그 어린양이었으며,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언약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 후에 그들이 계명을 어겨 죄를 범했을 때 사함을 받는 희생제물로서의 어린양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던 수난당하는 메시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으로서의 메시야가 바로 예수 였음을 증언했습니다.

원래 세례요한 조차도 자신의 이종사촌인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확신하지는 못했죠. 물론 제사장이었던 아버지 사가랴로부터 자신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가지고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준비하는 선지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어머니 엘리세벳으로부터 이복동생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잉태했던 이야기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밖에는 없었습니다.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자들이었으므로 세례요한은 그것을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러 자신에게 나오시고 마침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아!, 예수가 그리스도이사구나”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장 33-34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33.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34.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언하였노라 하니라”

여기 보면,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또 31절에도 이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세례요한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동안 확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럴 것 같아요. 예수님의 어린시절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없지만,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어떤 기적이나 신비한 일을 하신 일이 없습니다. 그냥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예수가 진짜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죠.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이” 그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 머무는 그 사람이 그가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 즉 그리스도다”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세례시에 세례요한은 똑똑히 봅니다. 34절에 “내가 보고”. 그렇죠. 세례요한은 보았습니다. 그 자리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보지 못했습니다. 세례요한만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만 보아도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증언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누구로부터 태어난 아들 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이러한 어법, 즉 누구의 아들이라고 할 때는 누구와 같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 이라는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확신했고, 이후 그의 삶은 이것을 증언하는데 온 생애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은 세례요한의 세 번째 날의 증언으로 이어집니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35절에 보면 “이튿날”이라고 시작합니다. 요한복음의 저자인 사도요한은 세례요한의 증언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3일 동안에 행적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세밀하게 기록한 것은 자신이 세례요한과 함께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후에 살펴보겠지만 사도요한은 세례요한의 제자였습니다. 그래서 세례요한의 행적을 자세히 알았던 것입니다. 장소가 어디였는지, 그때의 시간은 몇시였는지 디테일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째 날 세례요한은 증언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이었죠. 산헤드린에서 파송된 사람들에게 증언합니다. 그리고 둘째 날은 그리스도가 여기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대상은 자신을 따르던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분이 바로 세상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셋째 날로 이어집니다. 그의 증언이 또 다시 시작됩니다. 이번에는 그의 두 제자에게 증언하는 내용입니다.


36절입니다.
“36.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세례요한은 자신의 두 제자에게 저 분이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다시 한 번 말합니다. 그리고 두 제자는 예수를 따라갑니다. 이 두제자가 누구일까? 40절에 그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그런데 또 한 사람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특징 중에 하나입니다. 저자 요한은 끝까지 이 한 사람의 이름을 밝히지 않죠. 그가 누구일까요? 바로 이 글을 쓰고 있는 자기 자신입니다. 그는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신을 예수의 사랑받는 자로 소개합니다(요13:23). 그러다가 21장에 맨 마지막에 이렇게 밝힙니다.
21:24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그가 사도요한입니다. 그러니까 사도요한은 원래 세례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과 예수님과의 만남이 있었던 그 사건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장소와 시간까지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장소는 요단강 건너편 베다니입니다(29절). 39절 보면 시간이 기록되어 있죠. “때가 열시니라.” 그 만큼 그때의 일이 생생한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가 사도요한 자신과 안드레 엇음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동안 세례요한으로부터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에 대하여 배웠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37절에 보면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무슨 말인가? 36절의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것이죠. 물론 사도요한이나 예수님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의 증언을 얼마만큼 확신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이 사실을 진정으로 믿었던 순간은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이후였습니다. 그 전까지는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확신하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잡히셨을 때에 다 도망가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한복음 2:22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그러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참 믿음이 생긴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후입니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우리의 죄를 없애는 분이라는 사실을 당시에는 피상적으로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모습이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라는 안드레와 사도요한에게 돌이켜 이렇게 묻죠.
38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여기, 예수님께서 돌이켜 물어보시는 장면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향하여 돌이켜 물어보실 때가 있었습니다. 한번 찾아볼까요?
누가복음 14:25-27
“25.수많은 무리가 함께 갈새 예수께서 돌이키사 이르시되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하여 돌이키사 말씀하십니다.
26.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27.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따르는 자들을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것, 곧 제자가 되는 것이 어떠한 의미이며 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33절에는 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또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장에 보면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찾아와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묻죠. 예수님은 십계명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습니다”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 그리고 나를 따르라”하십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려고 하는 자들을 모두 환영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심각하게 물어보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자신을 따르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물으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시는지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따르는 두 제자에게 돌이키사 던지신 질문은 자신을 따르려는 이유와 목적에 대한 질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이 자리에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예수님 당시 수 많은 군중들이 따른 것처럼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자신을 따르는 자들에게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이 질문을 던지시는 것입니다.
“무엇을 구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구하는 것입니까?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먼저 제 자신에게 이 질문을 던져 보았습니다.
나는 목사로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내가 최근에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고민하고 있고 또 앞으로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생각해보니, 제가 구하는 있는 교회의 부흥이었습니다. 말이 교회의 부흥이지 많은 사람들이 이 교회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구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어떻하면 사람들을 많이 모을까에 저의 관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무엇을 구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그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풍요롭고 안락한 삶, 희망찬 미래와 행복한 삶, 성공적인 인생의 비결을 찾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시간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나는 진정으로 예수님 자신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따라가고 있습니까?

이러한 질문 앞에 두 제자는 동문서답을 합니다.
38절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계속해서 등장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은 영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관심은 육적인 것입니다. 3장에 니고데모와의 만남에서도 그렇습니다. 거듭나야 된다고 하니까 육신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영생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여인은 우물에 대하여 대답합니다. 요한복음 6장에 군중들에게 하늘로부터 온 생명의 떡에 대하여 말씀하지만 그들은 음식의 떡을 말합니다.
 
이렇게 그들의 영적인 안목이 어두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와서 보라” ‘오라 그리하면 보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살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 와서 보라는 것이 아니죠. 이것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진정한 제자가 되어 살아가게 될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이 머무시는 곳에 가서 함께 거했다고 기록합니다. 이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첫 번째 제자들은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계속해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모아지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은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입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인 시몬을 찾아 갑니다. 그리고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증거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곧장 자신의 형제인 시몬에게 이 사실을 알린 것입니다. 시몬은 베드로를 말합니다. 시몬은 베드로의 헬라어 이름입니다. 요한복음이 헬라인들을 염두해 두고 쓰여졌기 때문에 시몬이라고 기록한 것입니다. 다음 주에 살펴볼 나다나엘도 바돌로매의 헬라어 이름입니다.
베드로가 안드레로부터 메시아를 만났다고 듣습니다. 그리고 그는 안드레의 손에 이끌려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이렇게 처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과정을 보면 먼저 증언이 있습니다. 안드레와 사도요한은 세례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37절에,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40절에도,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에...

베드로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형제 안드레의 증언을 듣죠.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그리고 그를 예수님께로 데리고 갑니다.

 

이렇게 먼저 누군가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도 누군가의 증언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증언은 바로 성경의 증언입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들의 이 증언을 우리는 믿고 따라갑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증언을 듣고 우리도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데는 누군가의 증언이 필요한 것입니다. 전도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막 찾아다니면서 전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가장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나의 부모님, 형제, 동료 그들에게 먼저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홍보하는 것이 전도가 아닙니다. 우리교회 참 좋아, 우리 목사님 좋은 분이야 하며 전도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전도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면 좋겠죠. 우리 교회가 예수님을 바르게 알아가는데 도움을 줄 수 있어, 우리 목사님이 예수님에 대하여 잘 가르쳐 주실것야.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 전도방법일 것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대중집회를 해서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사람씩 만나셨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 보는 것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이름을 지어 주시는 장면입니다.
이름을 지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소유권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 사람의 정체성을 부여한다는 것입니다. 시몬의 이름이 게바 즉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부여하신 이름입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베드로는 교회의 반석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원래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죠.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사람 아닙니까? 그런데 그가 교회의 반석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를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름을 지어주십니다.
이사야 62:2
“이방 나라들이 네 공의를, 뭇 왕이 다 네 영광을 볼 것이요 너는 여호와의 입으로 정하실 새 이름으로 일컬음이 될 것이며”
계시록 2장 17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우리에게 새이름을 부여하십니다. 그것은 우리의 소유권을 예수님이 가지셨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은혜와 능력으로 우리를 바꾸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마침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바뀌시겠다는 것입니다. 벳세다 시골 출신의 어부 베드로를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도로 변화시킨 주님이 이제 우리를 그분의 제자로 삼아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소유입니다. 우리의 통치권자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십자가에서 우리 죄의 댓가를 지불하시고 사단의 권세에서 사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주도권은 주님이 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1번처럼
살아서나 죽어서나 우리의 유일한 위로는 내가 내 것이 아니요 몸과 영혼이 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것입니다.
(빌립보서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