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05-10 20:02

요한복음 강해 8. 와서보라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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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8. 와서 보라/2016.5.8.

 

요한복음 1:43-51 
43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45.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46.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49.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5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51.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강해 8번째 시간으로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인자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가 요한복음 강해를 하면서 계속해서 주목하게 되는 것은 예수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요한복음의 서론부분인 1장을 통해서 10가지로 예수가 누구인가?를 정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혹시 기억나는 대로 한번 말씀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말씀, 즉 로고스라고 했죠. 1절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1절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빛이시다. 9절입니다. 원어로 ‘포스’라고 했죠. 근원으로서의 빛을 의미합니다.
넷째로, 예수는 그리스도다. 17절입니다.
다섯째로, 예수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다. 29절에 요한의 증거였습니다.
여섯째로, 예수는 랍비였습니다. 38절입니다.
일곱째로, 예수는 메시야입니다. (그리스도와 동일한 말입니다.) 41절입니다.
여덟째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49절입니다.
아홉째로, 예수는 이스라엘의 임금입니다. 49절입니다.
열째로, 예수는 인자입니다. 51절입니다.

 

1장에는 이렇게 열 가지로 예수가 누구인가? 에 대하여 당시 세례요한과 제자들의 증언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본문을 한 번에 다루려고 하다가 너무 내용이 많아서 오늘과 다음주 두 번에 걸쳐거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게 될 내용은 빌립과 나다나엘의 만남 가운데 펼쳐지는 예수님의 부르심과 그 분의 말씀입니다. 그 가운데서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초청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나다나엘이 고백한 예수님에 대한 증언 두가지,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예수님께서 자신을 인자라고 할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본문은 ‘이튿날’이라는 단어로 시작합니다. 사도요한은 계속해서 날을 구분하여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요한이 의도적으로 창세기 1장의 7일 창조를 염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태초에”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창세기 1장의 시작인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 는 말씀을 누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1장은 4일 동안의 예수님의 증언을 보여주고, 2장에 넘어가면 “사흘째 되던 날”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4일 동안의 증언을 통해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서론적으로 보여주고, 7일째에 가나안 혼인잔치의 기적의 통하여 창조의 완성, 참된 안식의 의미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첫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이 이런 면에 있어서 굉장히 정교하다는 것을 여기서도 알 수 있습니다. 표면적 의미만 가지고도 큰 은혜를 받게 되지만, 좀 더 깊이 연구해 보면 그 의미가 상당히 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튿날”, 네 번째 날이 된 것입니다. 43절에 예수께서 갈릴리고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를 향하여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 빌립이 누구인가? 여기서 그를 어떻게 소개하는가 하면, 44절에 보니까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안드레와 베드로는 한 형제이죠. 요한복음에서는 안드레가 예수님의 첫 번째 제자로서 소개되고 있습니다. 물론 이 글의 저자인 세례요한도 동시에 함께 제자가 되었죠. 안드레가 형제인 베드로에게 가서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하고 데리고 오죠. 그래서 안드레와 베드로 형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제자가 된 사람이 빌립이었습니다. 이들 각자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는 과정을 보면 다 다릅니다. 안드레와 사도요한의 경우 세례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을 따르게 됩니다.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의 증언을 듣고 따릅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십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은 빌립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에게로 옵니다.

 

이렇게 제자들은 누군가의 증언을 듣고 예수님께로 오기도 했고, 또 예수님께서 직접 부르시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보고자 하는 것은 이들이 대단한 사람들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냥 한 동네에서 살았던 청년들이었습니다. 벳새다라는 마을은 갈릴리 호수의 북동쪽에 있는 작은 마을입니다. 동네이름 자체가 ‘어부의 집’인 것을 보면 작은 어촌마을 청년들인 것입니다. 그들은 그다지 대단한 인물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들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증거하는 놀라운 사역을 펼치지 않습니까?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의 부르심의 독특성을 돕니다. 예수님은 인재를 찾아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로 하면 명문가문 출신의 명문대를 졸업하고, 능력과 실력이 출중한 그래서 예수님의 사역에 날개를 달아줄 그런 사람들 찾아다니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저 주변에서 만난 청년들을 제자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도 예루살렘이 아닌 시골의 작은 어촌마을 청년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들을 놀라운 사역자들로 만들어 가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르심의 독특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수님의 부르심의 모습은 여기서 뿐만 아니라 이후 진행되는 하나님 나라 역사에 있어서도 계속 진행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사역자들은 대부분 특별했던 사람들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아니 오히려 그보다 못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을 26절을 보면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지혜롭지도 못하고 능력도 없고 가문이나 학벌도 변변히 않은 사람들을 부르시는가? 그것은 27절부터 설명하고 있습니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것은 오직 부르신 하나님만을 자랑하게 하시려는 목적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실했던 사역자들의 고백을 들어보면 거의 한 결같이 하나님께서 왜 나 같은 자를 쓰시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돌아가신 고 옥한음 목사님은 한국교회 성도들이 존경하는 분이십니다. 그분을 류응열교수(지금은 워싱턴장로교회 담임목사로 계신)가 돌아가시전 인터뷰한 내용을 들어보면, “어떻게 이렇게 큰 사역을 감당하십니까? 그 비결이 무엇입니까?”물어보자 대답이 이것입니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같이 연약한 자를 사용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고 옥목사님의 겸손이 아니라 실제로 그가 느꼈던 사실입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제 자신을 잘 압니다. 제가 여러분 앞에 서 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렇게 설교하는 것 자체가 참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은 능력 있는 자를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한 자를 부르십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만을 자랑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능력이나 실력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 보시는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신뢰입니다. 얼마만큼 내가 주님을 신뢰하고 따라갈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그러한 신뢰가 예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가 깊어질수록 순종이 쉬워집니다. 그리고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성경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강조하고 믿음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면 대부분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믿음을 근거로 역사하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실력이 중요합니다. 무시할 수 없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처음에는 실력이 있는 사람이 앞서갑니다. 그러나 결국 승리하는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그저 평범한 청년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통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빌립이 이제 나다나엘을 만나 자신이 만난 예수를 소개합니다.
여기 나다나엘은 공관복음에서 바돌로메를 말합니다. 베드로가 유대인 이름이고 게바가 헬라적 이름인 것처럼, 바돌로메는 유대적 이름이고 나다나엘을 헬라적 이름입니다. 빌립이 그를 만나 이렇게 증언합니다.
45절을 보면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이러한 빌립의 증언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표현하는가 하면, 모세의 율법에 기록하였고, 즉 모세오경이 증언하는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또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 선지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즉 모세오경과 선지서, 구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이 증거한 오시리라고 예언했던 그분,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를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이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나다나엘이 이렇게 반응합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46절)

빌립이나 그의 친구 나다나엘이 당시 구약을 열심히 공부하고 믿고 있던 신실했던 친구사이었던 것 같아요. 왜냐하면 빌립의 증언도 그렇고 나다나엘의 반응을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나다나엘에게 있어서 메시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야 하거든요. 그런데 나사렛이라고 하니까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사렛은 자신이 살던 벳새다에서 조금만 가면 있는 작은 마을 이었거든요. 그런 곳에서 무슨 메시야가 태어날 수 있는가? 하는 반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빌립이 말합니다. “와서 보라.” “와 보라”는 부름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하셨던 말씀인데 이것을 빌립이 동일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라 그러면 볼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일일이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나보면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죠. 우리가 일일이 예수님에 대하여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 지식과 경험의 한계 속에서 우리를 초월하신 완전한 하나님 그리고 완전한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다. 가장 좋은 길은 그분을 직접 만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설교를 통해 들었던 예수님, 성경공부를 통해서 깨닫게 된 예수님, 책을 통해서 알게 된 예수님 다 중요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실제적 삶의 자리에서 그 분을 경험하지 못하면 그것은 죽은 지식입니다.

와서 보라는 것은 우리가 구약성경의 문자로만 알았던 그 메시야를 네가 직접 눈으로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확인해 보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본다’는 것은 깨닫는다는 것이고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변적으로 알아서는 안됩니다. 그분을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험해야 합니다.

 

얼마 전 교회 테라스에 있는 텃밭에 고추를 심었습니다. 청양고추 4개, 풋고추 4개를 심었습니다. 그때는 구분해서 심었는데 지금은 헷갈려서 어떤 것이 청양고추인지 풋고추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것을 키워나가면서 어떤 것이 청양고추인지 어떤 것이 풋고추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서 알 수 있겠죠. 또 잘 아는 분에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식은 표피적인 지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것들을 키우다 보면 풋고추와 청양고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경험적 지식, 체험적 지식이 있을 때 진짜로 아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것은 주님의 부르심 앞에 이제 너희가 그분을 경험적으로 체험적으로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제가 어떤 신비적인 체험을 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아가는 것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을 떠나서 신비적 경험으로만 주님을 아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먼저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성경을 통해 깨닫게 된 그 예수님을 참되게 예배하고 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예배와 순종의 삶을 통해 우리는 성경에서 고백했던 주 예수 그리스도를 실제적인 삶이 영역에서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백에 걸맞은 삶을 살게 될 때, 우리는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인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저와 아내가 결혼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삶의 여러 가지 중요한 결정들을 해야 할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마다 가장 우선순위로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고 걸어갔던 길은 그것이 비록 어렵고 험난했던 길이었지만 평안이 있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대로 움직였을 때는 그것이 경제적으로 많은 유익을 주고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길이었지만, 오히려 더 중요한 것들을 잃어버리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경험들 속에서 지금도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물어봅니다.   
 
와서 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 그리고 빌립의 친구를 향한 외침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이제 빌립은 나다나엘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갑니다. 
예수님과 나다나엘이 만났습니다. 그리고 둘 사이의 대화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 오고가는 대화 가운데 반복되는 단어가 바로 “본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에게 말씀하십니다.
48절입니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여기서 보았다는 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내면의 생각까지도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또 50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예수님께서는 너의 내면세계까지도 다 알기 때문에 나를 믿느냐? 하시면서 이보다 더 큰일을 보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51절에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그분을 주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주님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내면의 깊은 간구까지도 아십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도 아십니다. 내가 기억못하는 나의 과거도 아십니다. 주님이 아시기에 우리를 가장 바른길로 인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나보다 나를 더 잘하시기에 그 분의 뜻에 기꺼이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순종을 통해 우리는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실 놀라운 일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주님이 얼마나 존귀하고 위대한 분이신지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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