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10. 삶의 참 안식과 기쁨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2016.5.21.
요한복음 2:1-11
1.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지난주까지 서론을 살펴보았고 오늘부터 요한복음의 본론부분에 들어갑니다. 요한복음의 본론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2장부터 11장까지가 한 부분으로 ‘표적들의 책’이라고 부릅니다. 요한은 7가지의 선별된 이적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12장부터 20장까지가 ‘영광의 책’이라고 해서 예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가시는 장면을 영광의 과정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내용은 7가지의 이적중에 그 첫 번째 이적에 해당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갈릴리의 가나라는 아주 조그만 마을에 혼례식이 있었습니다. 누구의 결혼식인지를 밝히고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아주 가까운 사람의 혼례식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1절에 예수의 어머니가 거기 계셨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은 혼례에 청함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청함을 받지 않고도 참석할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사이라는 뜻입니다. 또한 본문을 보면 마리아가 잔치음식을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민족의 결혼식은 보통 일주일정도 진행하게 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포도주였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의 물은 탁하여 바로 마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포도주를 희석시켜 먹게 됩니다. 이때 포도주는 우리가 생각하는 와인과는 다르게 걸죽한 상태입니다. 이것을 물과 섞게 되면 맥주보다 낮은 도수의 술이 되는 것입니다. 일주일동안 잔치를 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충분히 준비해 두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니까 포도주가 모자란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때 마리아가 예수님께 찾아옵니다. 그리고 포도주가 없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이때는 요셉이 이미 죽고 없는 상태라 마리아는 모든 중요한 일들을 예수님과 상의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반응이 의외입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어머니 마리아에게 “여자여”라고 말한 것은 다소 무례해 보일 수는 있지만 당시에 여성을 정중하게 높여 부르던 호칭이었습니다. 아마도 우리 말로 하면 “여사님” 정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머니를 부르는 호칭으로는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조금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마리아가 하인들에게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그곳에 있던 돌항아리에 물을 가득채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떠서 연회장에게 가져다 주라고 합니다. 하인들은 항아리에 있던 물을 따라 연회장에게 가져다 줍니다. 그랬더니 놀랍게도 그 물이 포도주가 된 것입니다. 연회장은 물이 변화된 그 포도주를 맛보고는 신랑을 불러다가 극찬을 합니다. 사람들이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나중에 취하면 낮은 것을 내는데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며 감탄해 마지 않습니다.
여리까지가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물이 변화여 포도주가 된 사건입니다.
요한은 이 사건을 첫 번째 표적으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말씀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요한복음에서 표적이 의미가는 것이 무엇인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표적은 원어로는 세메이온입니다. 이것은 어떤 본질은 나타내는 수단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의 선별된 표적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모두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건들입니다. 영어로는 sign입니다. 간판이라는 의미죠. 이 건물에 보면 기쁜우리교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이것을 영어로 sign이라고 합니다. 이 간판이 기쁜우리교회가 아니죠. 이곳에 기쁜우리교회가 있다는 것을 가르키는 수단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표적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가르키는 수단인데 그것은 바로 예수가 어떤 분이신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전개되는 내용가운데 표적이라고 할때는 그것 자체가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가 핵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물을 변화시켜 포도주가 되게 하는 이적을 베푸셨다.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닙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본문의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변화시켜 포도주로 만든 이 사건을 첫 번째 표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역가운데 첫 번째 일으키신 이적사건이라기 보다는 그 중요성에 있어서 첫 번째라는 의미입니다. 요한복음 20장 30절에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표적들이 많다고 합니다. 또 21장 25절에는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그렇게 많은 표적과 사건들 속에서 요한은 특별히 오늘 본문의 사건에 주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이 주는 의미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 표적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차근차른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은 “사흘째 되던 날”로 시작합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은 1장에서부터 “둘째날”이라는 단어를 통해 날수를 맞추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창세기 1장의 창조사건을 염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로 시작하는 것처럼, 요한복음도 “태초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1장에는 29절, 35절, 43절에 이튿날이라고 날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사흘째 되던 달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날수를 종합해 보면 본문은 태초에로부터 시작하여 7일째 되던 날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창세기에서 제7일하면 어떤 날입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신 날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창조한 세상을 보시면서 기뻐하시며 안식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축하하며 기뻐하며 안식하는 날이 바로 제7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은 축제의 날이며 잔치의 날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7일에 혼인잔치가 열렸습니다. 혼식이야 말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 아닙니까? 신체적으로도 가장 건강하고 아름다운 때입니다. 내가 주인공이 되어 모두에게 축복을 받는 기쁘고 즐거운 날입니다. 잔치는 풍요로움이 있습니다. 배부름과 만족함이 있습니다. 배불리 먹고 마신 뒤에는 기쁨이 있습니다. 서로 주고 받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잔치라는 그림이 우리에게 주는 연상들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를 잔치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늘 기도하고 말씀만 보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잔치를 즐기셨습니다. 죄인과 세리들을 부르시고 그들과 함께 담소를 나누시고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재밌게 풀어주시면서 웃기도 하시고 즐거워 하셨습니다.
이 기쁨의 날 포도주가 떨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흥이 깨어진 잔치를 의미합니다. 포도주가 떨어지면 잔치는 끝난 것입니다. 잔치에 기쁨과 활력을 주는 포도주가 없으니 잔치는 끝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에 기쁨의 잔치가 끝났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무엇이 있습니까?
6절에 보니까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흥이 깨어진 잔치에 돌항아리 여섯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육은 인간적인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실 때 6일째 만드셨다. 그래서 6은 인간의 숫자입니다. 여기서 돌항아리가 어떻게 소개되고 있습니까?
유대인의 정결예식을 따라 6개가 놓여있습니다. 그런데 비어있습니다. 이 절묘하게 상징화된 그림이다.
이 항아리의 용도가 무엇입니까? 정결 예식을 하기 위해서 준비해 놓은 것입니다. 정결예식이란 하나님의 백성이 몸을 씻어 성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예법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물을 통해 더러워진 손과 발을 닦음으로 죄가 해결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 항아리들이 잔치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비어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생명력을 상실한 당시의 유대교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저 형식만 남겨져 있고 자리만 차지할 뿐 아무런 도움도 줄 수 없는 그 빈 항아리.
이것으로 안된다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사법, 인간들이 만든 모든 것으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시적이고 제한된 것입니다.
잔치는 깨어졌고, 그곳에 정결법을 행하기 위해 준비해 두었던 항아리도 비어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겪고 있는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세상 사람들의 삶에 잔치가 있을까요? 그들에게 진정한 기쁨과 만족 그리고 풍요함의 잔치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가진 것이 많아 사람들은 풍요함을 느끼며 만족하고 삶의 기쁨을 누리며 살아갈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다 소유한다고 하여도 우리는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것이 우리 삶에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들의 삶 속에 잔치는 없습니다.
그들이 붙잡고 의지하는 것들, 그것이 물질이던 명예이던 빈 돌항아리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만일 그러한 것들이 우리 삶에 기쁨과 만족함과 평안함을 준다면 왜 그토록 모든 것을 소유하고 모든 인기를 한몸에 받던 사람들이 자살하고 최고의 권력의 자리에 있던 대통령도 자살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잔치는 없었습니다.
포주주가 모자라자 예수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그 사실을 알립니다.
예수께서는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물을 포도주로 만들어 내십니다.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여러분! 요한복음에서 “내 때”라는 것은 일관성있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요7:30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8:20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요12:27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요12:23-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그렇다면 포도주가 모자란다고 하는 마리아의 요청에 예수님은 왜 이렇게 말씀하고 계신 것일까요?
마리아는 현재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는 차원에서 예수님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비밀을 계시해야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이것은 3장에 가면 예수님께서 거듭남에 대하여 말씀하실 때, 니고데모는 어머니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야 됩니까 라고 물은 것과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영적인 차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계시하는 수순을 밟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십니다.
이것은 생명력이 깨어지고 흥이 사라진 잔치를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 질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삶에 참된 만족, 안식 그리고 기쁨의 잔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분의 죽으심으로 통해 우리의 죄가 사해질 때 진정한 평안이 찾아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삶에 안식이 있습니까? 삶에 기쁨이 있으십니까?
저는 얼마전, 선한목자교회 유기성목사님의 목회자의 위기에 대한 강의를 인터넷으로 본 적이 있습니다.
목회자의 위기하면 언뜻 생각할 때, 물질이나, 권력, 아니면 성적인 문제들에 대하여 말씀할 것으로 예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의 진단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다른 이야기 하지 않으시고,
목회자의 위기는 예수 한분 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을 하셨을때, 참 은혜가 되었습니다. 목회자는 그렇습니다. 예수로 만족하지 못하면 타락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진정으로 영접하고 교제하는 삶을 살지 아니하며....우리 삶에 기쁨과 만족함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소유한다고 하여도 예수님이 없는 삶은 공허와 허무와 두려움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 삶에 기쁨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토록 성경이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구원받은 자의 삶은 실체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증거는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문제를 다 해결하셨기에 기쁨의 잔치는 시작되었습니다.
바라기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의 삶에
포도주가 풍성한 기쁨의 잔치가 날마다 새로워 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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