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06-01 10:50

요한복음 강해 11.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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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1.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2016.5.29

 

요한복음 2:12-22  
12.그 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와 형제들과 제자들과 함께 가버나움으로 내려가셨으나 거기에 여러 날 계시지는 아니하시니라
13.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더니
14.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15.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16.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17.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18.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1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20.유대인들이 이르되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 하더라
21.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22.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요한복음 강해 11번째 시간으로 ‘이 성전을 허물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 첫 번째 표적인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는 참된 안식과 기쁨이 상실된 시대가운데 기쁨의 잔치를 회복시키러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심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기쁨의 회복은 예수님이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 질 것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바로 이어지는 본문으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시위하시는 장면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평소 성경을 관심 있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한 가지 의아해 하는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태, 마가, 누가 복음에 보면 성전사건이 예수님의 사역 후반기에 있었던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사역초반에 등장합니다. 이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지만, 복음주의 신학자들이 널리 동의하는 세 가지 점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 성전사건은 예수님의 사역 초기와 후기에 두 번 일어난 게 아니라 오직 한번 일어났습니다. 두 번째, 그 사건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주간이 일어났습니다. 세 번째, 요한복음은 그러한 시점을 변경할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예수님의 사역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사역의 초기에 설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은 시간적 순으로 기록하기 보다는 사건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배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의 목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한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입니다. 요한은 이러한 목적을 염두해 두면서 예수님께서 수많은 표적을 행하셨지만, 그중에 선별된 7가지의 표적을 중심으로 요한복음을 구성하고 있고 또한 사건을 시간적 순서보다는 그 의미에 따라서 배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가나의 혼인잔치에 연결되어 나온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두 사건은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하나는 기쁨의 잔치입니다. 혼인잔치에는 노래가 있고, 춤이 있고, 웃음이 있습니다. 모두가 즐거워합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이 기쁨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그런데 성전에서의 장면은 무질서와 혼돈 입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 안에서 짐승의 울음소리며, 돈을 흥정하는 소리가 오갑니다. 그 가운데 예수님은 진노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필연적으로 나타나게 되는 두 가지의 상반된 모습입니다. 하나는 구원의 기쁨이며 또 하나는 심판입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 때문에 2장에 함께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읽어나가면서 본문의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3절입니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셨더니...."

여기보니까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또 23절에도 보면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라고 언급합니다. 오늘 본문 내용이 유월절이라는 단어에 감싸져 있습니다.
즉, 요한복음은 본문의 사건을 유월절의 배경에서 이해할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해 두시고 계속 살펴보겠습니다.

14절입니다.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무엇 때문에 성전에 소가 있고 양이 있고 비둘기가 있었는가? 또 장사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팔고 하는가? 이것은 당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전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구약에서 성전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연합의 장소, 교제의 장소이며 경배의 장소요 속죄의 장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중에 거하시기 위하여 허락하신 것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이것은 처음 40년의 광양생활에서 이동식으로 천막이었던 것이,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건물로서 지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솔로몬왕 때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되게 됩니다.

성전에 세워지자 그곳은 이스라엘 백성의 예배의 중심지이자 민족정서의 중심지가 됩니다. 사람들은 성전을 사모하였으며 그곳에 오르는 것이 인생 최고의 기쁨이었습니다. 그래서 시편에 보면 당시 구약성도들이 성전을 얼마나 사모하였는가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 120편부터 150편까지는 구약의 성도들이 성전에 오르며 불렀던 찬송입니다.

 

그중 몇 구절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시편 122편 1절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시편 84:10절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이렇게 그들은 하나님을 사모하고 성전에서 그분을 만나길 기뻐하며 성산에 올랐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전 586년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하면서 성전도 함께 파괴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굉장히 절망적인 사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실을 의미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성전을 향하여 불렀던 기쁨의 노래는 비탄의 애가가 되었습니다.
시편 137:1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

성전이 파괴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떠난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더 이상 희망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바벨론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서 성전을 재건하게 하십니다.

에스라 3장에 보면 당시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성전기초가 놓임을 보고 모든 백성은 여호와를 찬송하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은 대성통곡을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기쁨으로 함성을 지릅니다. 그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겠습니까?

성전재건은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을 의미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성전은 율법과 더불어 이스라엘 민족에게 생명만큼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길은 바로 이 두 가지를 생명처럼 붙잡고 살아가는 것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이곳이 혼란스럽고 혼잡합니다. 거룩해야할 성전에 장사꾼들이 들어앉아 있습니다.
문헌을 보면 당시 남자만 13만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어린아이와 여인들을 합하면 100만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성전을 중심으로 예루살렘 주변이 인산인해를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성전의 모습을 잠깐 그려보면 이렇습니다. 당시 성전은 헤롯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재건한 것으로 헤롯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에스라서에서 스룹바벨에 의해 세워진 성전은 주전 63-62년에 로마에 의해 파괴됩니다. 그 후 헤롯왕이 주전20년부터 재건하게 되는데 바로 그 성전인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환전소를 들려 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던 터라 황제가 그려있는 화패를 성전의 거룩한 화패와 바꾸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성전에 들어가는데 성전세를 내야 했습니다. 당시 이 성전세가 반세겔, 당시 노동자들이 이틀동안 일해야 벌 수 있는 돈이니 작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성전세를 주고 들어가면 짐승을 파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원근각지로부터 속죄제물을 가지고 오는데 먼길을 오다보면 제물이 다치거나 흠집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대제사장이 이것을 검역하는데 합격판정을 받아야만 제물로 인정받았습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성전에서 파는 짐승을 사야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돈이 오고 가니까, 뇌물이나 뒷거래가 이루어지곤 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성전에서 파는 짐승이 어떤 때는 평균시세보다 16배 이상 될 때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당시 성전이 얼마나 타락하고 부패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곳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15절 16절 보니까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분노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생각하면 늘 온화하고 사랑이 많으시고 어린아이를 무릎에 안치시고 쓰다듬으시고 예뻐하시는 그런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보면 그렇지 않으십니다. 몹시 분노에 찬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당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30세의 한 청년입니다. 그가 채찍을 들고 장사하는 사람을 내어 쫒고 짐승을 내어 쫒는 모습, 그런데 아무도 그를 제지하거나 막아서지 못합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예수님에게서 느껴지는 범인과는 다른 어떤 권세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께서도 분노하시고 이렇게 폭력도 쓰셨으니까 때로는 세상의 불의에 맞서서 폭력을 사용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이 본문은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분노와 우리의 분노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질 때 분노하셨습니다. 반면 우리는 우리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거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분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 뱉음을 당하거나, 손찌검을 당할 때에도 결코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당하면 분노하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욕먹는 것은 참을 수 있지만, 나의 부모를 욕하는 것은 참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부모님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는 것에 대하여 분노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귀에 상당히 거슬리는 발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성전을 내 아버지 집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누가 뭐래도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하나님이라는 말은 감히 죄인의 입으로는 부를 수조차 없는 이름이었습니다. 구약의 성경을 기록한 서기관들도 성경을 기록할 때 하나님이라는 단어만 나와도 목욕을 하고 정결케 한 후 그 이름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당시 그 어떤 문헌에도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사례가 한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처소를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을 때 고소받은 이유가 신성모독과 성전모독이었습니다. 바로 본문의 예수님의 발언이 십자가형을 받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된 것입니다.

잠시 소란이 잠잠해 지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묻습니다.
18절
"이에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예수께 말하기를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

당시 예수님의 행동은 선자자적 행동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구약에 보면 선지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 상징적인 행위를 할 때가 있습니다. 이사야는 벌거벗고 돌아다녔고(사20:1-6) 예레미야는 단지를 깨뜨리고(렘19:1-15) 에스겔은 벽돌을 쌓은 일과 390일과 40일 동안 좌우로 누워 이스라엘의 속죄의 죄를 담당하는 일과 인분을 먹는 일(겔4:1-17)등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메시지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우 선명하게 전달하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행동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 아마도 성전 관리자들이나 산헤드린에서 파견된 지도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묻는 것입니다. 네가 선지자의 행동을 하는데 네가 선지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표적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는 반드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증거가 분명해야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신명기 18:20-22이나 신명기 13:1-5절에 그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이러한 차원에서 묻고 있는 것입니다.
“네가 이러한 선지자적 행동을 하는 합당한 이유가 있느냐? 네가 정말 하나님께서 보낸 선지자로 되는냐? 그 증거를 보여라 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19절입니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당시 이 말을 듣고 있던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이 말을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성전모독죄로 간주하였고 참람하다고 여겼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하는 성전을 눈에 보이는 성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반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성전이 예수님 자신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1-22절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뿐만 아니라, 제자들조차도 당시 성전을 헐라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이 말씀을 기억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과 예수님을 믿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당시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던 신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풀리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참 성전임을 보여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동안 모형으로 예표로 주셨던 그 성전에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오셔서 “내가 바로 성전이다 ”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성전을 헐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담겨진 “내가 바로 성전이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성경의 말씀들을 찾아보면서 살펴보길 원합니다.

먼저 제자들은 성전을 청결하게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보면서 스가랴의 말씀을 기억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하실 때 그들은 스가랴서의 말씀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스가랴 14장 21절입니다. (구약 1326쪽)
"예루살렘과 유다의 모든 솥이 만군의 여호와의 성물이 될 것인즉 제사 드리는 자가 와서 이 솥을 가져다가 그것으로 고기를 삶으리라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가나안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여기서 "가나안 사람"이란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표준 새번역에서는 장사하는 사람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 날에는 만군의 여호와의 전에 장사하는 사람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이 와서 그곳을 정결케 하시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온전히 회복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20-21절 말씀입니다.
"그 날에는 말 방울에까지 여호와께 성결이라 기록될 것이라 여호와의 전에 있는 모든 솥이 제단 앞 주발과 다름이 없을 것이니"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그 날은 어떤 날입니까?
13장 1절을 보면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날"입니다.

제자들은 바로 이 말씀을 기억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신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된 그 날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는 말씀입니다.
요한은 이 말씀에 대해 코멘트 하기를
21절에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시 것이라"
즉 예수님께서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는 것은, 성전 된 자기 육체를 말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즉 너희가 성전을 헐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하며 사흘만에 일으키리라 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약시대부터 성막으로 시작된 그 성전은 그동안 모형이요 예표였지만 이제 그것이 사라지고 실제가 왔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성전을 청결케 하신 사건은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하면서 모형으로서의 성전을 파괴시키고 실제가 등장하신 것입니다.
즉 "내가 참된 성전이다"라고 나타내신 사건이 오늘 본문인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완전한 속죄제사가 이루어지고 예수님 안에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가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라고 물을 때 그에 대한 해답이 바로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것입니다.
즉 성전 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서 모든 것을 거룩케 하시고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좀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에스겔 47:1-12절(구약 1227쪽입니다.)
“1.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 내리더라
2.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 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3.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 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다시 천 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6.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네가 이것을 보았느냐 하시고 나를 인도하여 강 가로 돌아가게 하시기로
7.내가 돌아가니 강 좌우편에 나무가 심히 많더라
8.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11.그 진펄과 개펄은 되살아나지 못하고 소금 땅이 될 것이며
12.강 좌우 가에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가 자라서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하며 열매가 끊이지 아니하고 달마다 새 열매를 맺으리니 그 물이 성소를 통하여 나옴이라 그 열매는 먹을 만하고 그 잎사귀는 약 재료가 되리라
 
스가랴 13:1절(구약 1324)
“그 날에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다윗의 족속과 예루살렘 주민을 위하여 열리리라”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이 열리는 날
스가랴 14: 7-8절
“7.여호와께서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8.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 여름에도 겨울에도 그러하리라“

무엇이 연상되십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실 때 태양이 빛을 잃어버린 모습 대낮에 어둠이 찾아오는 모습입니다.

8절에 그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서해로...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에게 구원의 이미지를 자신이 주는 솟아나는 샘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4:13-14
“1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이것은 바로 에스겔과 스가랴서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의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9:34절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유일하게 요한만 피와 물이 나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구약적인 배경하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즉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에스겔과 스가랴의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22절입니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요한의 관심은 다른 것 보다 성전이었습니다. 그것은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성전을 보지 못하였다...그것은 바로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
22:1-4절
“1.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에스겔의 환상이 연상되지 않습니까?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왔던 그 생명수의 강을 1절에 “하나님와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바로 생명수의 근원이 하나님과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 였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쏟아내신 그 피가 우리의 죄를 정결케 하여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고, 그 속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가 우리의 영혼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준 사건이 되었습니다. 바라기는 이곳에 있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이 예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흘려주신 그 영원한 생수가 우리의 갈한 심령을 새롭게 하시길 축원드립니다.
예수 안에 생명이 있고, 예수 안에 치유가 있고, 예수안에 회복이 있고, 예수 안에 풍성함이 있습니다.

그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수가 여러분의 모든 삶을 새롭게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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