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12. “은혜 그리고 거듭남”/2016.6.5
요한복음 2:23-3:3
23.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25.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
1.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늘 본문은 기독교의 핵심진리 시리즈에서 이미 설교한 적이 있습니다. 이라는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당시에는 본문을 포괄적으로 다루었다면 오늘은 좀 더 세부적으로 본문을 관찰하고 이해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요한복음의 본론이 2장부터 시작되면서 두 가지의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기적 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사건은 예수님께서 유월절에 성전에 들어가셔서 시위하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참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음을 드러내신 사건이었죠. 그동안 성전은 하나님과의 만남과 연합의 장소이며 그분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속죄 제사를 드리는 장소였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몰아내시고 자신이 참 성전 되심을 보여주신 사건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두 개의 사건이 등장하고 나서 본론1부에서는 두 번의 만남이 소개됩니다. 첫 번째는 니고데모와의 만남이고 두 번째는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놀라운 진리들이 밝혀집니다.
1절에 보니까 니고데모를 소개하고 있죠. 그는 바리새인이고 유대인의 지도자입니다. 먼저 바리새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바리새인 하면 우리가 부정적인 시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의 외식적인 종교행위에 대하여 살벌하게 지적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그들을 향하여서 외식하는 자, 어리석은 맹인이라고 하셨고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까지 하신 것을 보면 그들이 얼마만큼 타락했는가를 짐작하게 합니다. 원래 바리새주의는 제사장중심의 종교를 평민대중들의 삶속에서 실천하려고 했던 운동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동기가 상당히 좋았던 것이죠. 바리새인이라는 뜻 자체가 “분리주의자”란 뜻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속과 분리되어 일상적 삶에서 거룩함을 추구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을마다 회당을 지어놓고 이곳을 중심으로 모여 예배의식을 행하고 율법을 교육하고 각종모임의 장소로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로 부터 큰 신망과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당시 제사장들이 성전으로 중심으로 지켰던 율법을 일상적 삶의 영역에 까지 확장시켜서 지키려고 노력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겠습니까?
그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시간을 정하여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였고, 일주일에 두 번은 금식하였고, 구약의 여러 가지 율법들이 있지 않습니까? 음식 정결법이나 안식일 법등, 이러한 법들을 세분화시켜서 삶의 모든 영역에서 경건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 이들이 한창 전성기때는 6천 명 정도가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의 인구가 3만5천에서 3만명 정도였다고 하니까 그 규모를 가히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이러한 바리새인들중에 하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의 관원이라고 소개합니다. 학자들은 그가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공회의 일원이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산헤드린공회원이 70명이 정수이기 때문에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면 상당히 명망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가 요한복음에 두 번 더 등장하는데 7장에 보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산헤드린 공회가 소집됩니다. 거기서 예수님을 간접적으로 옹호합니다. 그리고 요19장에 예수님이 죽으셨을 때 향유와 몰약 백근을 드려 예수님의 죽음을 애도하기도 했습니다.
2절에 보니까 그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요한복음에서 밤은 빛과 대조되어 죄악의 상태 또는 진리가 없는 상태를 상징합니다.
요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11:9-10
“9.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간이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10.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요13:30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나중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와의 대화 가운데 빛과 어둠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19.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20.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
21.진리를 따르는 자는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 함이라 하시니라”
즉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께로 나왔다는 것은 진리가 없는 상태, 죄악된 상태에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니고데모는 당대에 누구나 존경할 만한 사람입니다. 학식과 인품 그리고 경건한 삶에 있어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신의 존재에 대하여 진지하게 탐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있죠. 어떤 이는 깊은 수행을 통해서 또 어떤 이는 경전연구나 깊이 있는 학문연구를 통하여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과 가르침을 받고자 따르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합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는 어둠속에 있습니다.
참 진리이시며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둠속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은 속일 수 있지만 자기 자신은 속이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속이기는 쉽습니다. 만일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가 매일 새벽기도를 하고 금식을 하고 늘 성경말씀을 읽고 그의 말 한마디 속에는 거룩함이 묻어나고 또 자신의 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고 한다면 누가 봐도 그는 하나님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신은 자기를 알지 않겠습니까? 물론 모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겠죠. 그러나 이정도 진지한 사람이라며 자신을 볼 줄 알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명암도 간판도 다 내려놓고 자신을 냉정하게 보는 것입니다. 목사라는 직분, 사람들의 좋은 평가, 나의 자랑거리들 다 내려놓고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알았던 것입니다. 자신이 어둠속에 있다는 것을.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직면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아십니까?
내가 얼마만큼 더럽고 추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 굉장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어둠속에 있다는 것을 모르면 결코 빛이신 예수님께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바리새인의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는 거룩한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그 더럽고 추한 죄의 문제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5장에 보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않고 먹음으로 장로들의 전통 즉 정결법을 어겼다고 시비를 걸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것입니다.
마15:11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17-20절
17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19.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20.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
그렇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깨끗이 씻은 손으로 음식을 먹음으로 자신들이 깨끗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럽게 하는 것이 음식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는 것들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저는 목사로서 이러한 위험성을 누구보다도 잘 압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 설교하고 또 가르치는 자로서 깨닫는 것은 이러한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무런 상관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행위로 자신을 포장하여 사람들을 속일 수는 있을 것입니다. 또 자기 자신까지 속기도 합니다. 그러한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가 빛이신 예수께로 나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여기서 그는 “우리가”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것은 2장 23절에 보면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니고데모는 그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표적을 보고 믿는 자들이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24절에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여기서 “의탁하다”라는 단어가 “믿는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신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표적은 예수에 대한 열린 마음을 갖게한 무리들이 생겨났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중에 한 사람으로 니고데모가 온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시위하신 모습을 보면서 이것은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선지자들이 했던 상징적인 행동이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면 당신이 행하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어찌되었던 이러한 니고데모는 진지하게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조금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동문서답을 하듯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여기서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이 부분을 원어로 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멘 아멘 아노센으로 나지 아니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말로 “아멘 아멘”을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로 번역했는데 이렇게 번역을 하면 예수님께서 하셨던 그 원래의 의미가 잘 살아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멘 아멘”이라는 말은 유대교에서 당시 하나님의 말씀선포 끝이나 기도 끝에 썼습니다. 그것이 참 진리 됨과 신실함을 천명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항상 아멘을 먼저 쓰고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독특한 아멘 사용법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멘 아멘 하면서 하시는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 자신이 신적권위로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가령,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 저할 때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하며 시작합니다. 마찬 가지로 “아멘 아멘”으로 시작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지금 하고 있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 즉 예수가 곧 하나님으로서 직접 계시하고 있는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다시 보면 “아멘 아멘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인데 거듭난다는 것이 “아노센”입니다. 이 “아노센”이라는 단어는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첫째는 ‘위로부터’라는 의미이고 둘째는 ‘다시’라는 의미입니다. 요한의 둘 다의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당시 헬라철학에 물들어 있던 사람들에게는 위라는 영역은 하나님의 영의 세상이고 아래는 육의 세상 물질의 세상입니다. 그래서 아래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볼 수 없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 영생하려면 위로부터 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난 자가 또 나야 하니까 다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남, 거듭남으로 이해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거듭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위로부터 나는 것, 그래서 다시 태어 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태어나는 것과 연관하여서 설명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래야만 우리가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언어의 한계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해시키기란 사실 참 어려운 것입니다. 그 무한 광대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제한된 언어의 틀 속에서 어떻게 다 설명하겠습니까? 그런면에서 태어난다는 것만큼 하나님의 자녀됨을 설명하기에 좋은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이곳에 내가 남자로 태어나고 싶어서 그것도 대한민국이라는 곳에서 태어나고 싶어 그렇게 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태어나고 보니 내가 대한민국의 남자 또는 여자로 태어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잘 보이면 그분이 우리를 선택해 주시겠지가 아닙니다. 사람들 가운데 좀더 작하고 바르게 사는 사람을 선택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실 때 우리 인간은 그저 죄인들일 뿐입니다. 우리가 볼 때 좀더 나은 사람들이 있을 뿐이지 하나님 보실때는 다 타락한 죄인들입니다. 그들을 먼저 부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게바를 부르시고 그를 베드로로 만들어 가신 것처럼, 사울을 바울로 만들어 가신 것처럼,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만들어 가신 것처럼,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을 먼저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답게 빚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될 때 거듭남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다시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거듭남을 표현하기 위해 세례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극화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렇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노센” 위로부터 나는 것,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요1:12-13
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요일 3:9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 또한 내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
요일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요일 5:18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주권 가운데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보탬이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니고데모처럼 종교적인 열심 으로 하나님 앞에 나가고자 하지만 그것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킬 수는 없습니다.
로마서 8장
29.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그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의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영화롭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중에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분이 정하셨다는 그는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화롭게 될 것입니다.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나 조차도 실망스럽죠. 그러나 그런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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