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14. 하나님의 사랑과 거듭남 /2016.6.19.
요한복음 3:11-18
11.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13.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요한복음 강해 14번째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거듭남이란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님과 니고데모와의 대화의 장면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지도자일 뿐만 아니라 선생이며 또한 바리새인 이였던 니고데모를 만나셨습니다.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설명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영적인 것이고 하늘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이 땅의 인간들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땅의 언어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그가 아무리 유대인의 선생이고 바리새인이라고 할지라도 쉽게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구원에 대하여 거듭남이라는 용어로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편에서의 어떠한 의지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나야 된다는 것을 의미했던 것이고 그것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되는 것임을 의미했던 것이죠.
그리고 그것을 더욱 쉽게 물과 성령으로 나야 된다고 풀어서 설명하셨습니다. 그것은 결국 성령으로 나는 것인데, 하나님의 생명이 마른 뼈와 같은 자들에게 임할 때 성령님을 통하여 임한다는 것이었죠. 육에서 나는 것은 육일 수밖에 없고, 결국 영이라는 영으로부터 나아 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은혜 가운데 성령님을 통하여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것을 바람이 부는 것을 비유로 하여 좀 더 쉽게 설명하셨습니다. 지난주에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바람이라는 것이 원어로 보면 프뉴마인데 성령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언어플레이라고 하죠. 그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최대한 세심하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바람을 우리가 컨트롤 하거나 만들 수 없듯이, 거듭나는 것도 하나님의 자유로운 의지와 결정에 의해서 되며, 그것은 또한 바람처럼 신비롭다는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나누게 될 내용은 세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거듭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믿음입니다. 그래서 두 번째 살펴볼 내용은, 그렇다면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는 것인가? 세 번째는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씩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로,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거듭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지난 시간들을 통하여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은혜가운데 그분께서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또한 영화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또 한 가지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평행선 같은 진리가 함께 요구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되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인간 편에서의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쉽게 설명하면 이런 것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구원받지 못하고 죽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너는 구원받지 못했음으로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때 만일 그 사람이 하나님께 이렇게 대항합니다. “하나님 제가 구원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구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제가 구원받지 못한 책임은 하나님께 있습니다.”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네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책임은 믿지 않는 너에게 있다.”라고 하신 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되는 것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믿음으로 된다는 것은 어떤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 내용입니다.
어떤 사람이 배를 타고 가다 물에 빠졌다고 해봅시다. 그 상황에서 이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만일 저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살 것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또한 만일 우리가 어떠한 삶의 문제들 앞에서 섰을 때 이 문제가 해결되고 안 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있다고 생각하고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지도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주권을 잘못이해 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분명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못 받고는 우리의 의지나 노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주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성경은 그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책임이 나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의 이성을 통해 합리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동안 이 두 가지 성경의 진리를 통합하려는 시도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한쪽의 진리를 손상 시키던가 또는 두 개의 진리를 전부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두 개의 상반된 진리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잘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진리는 인간의 이성을 초월합니다. 만일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있다는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삼위일체와 같은 하나님 나라의 진리 가운데 신비스러운 부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경외감을 가지고 그 진리를 그대로 수용해야 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이해하기 위해서 그것을 통합하거나 한쪽만을 강조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면, 어떻게 구원을 얻는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가? 어떻게 거듭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으로 되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가 7번 등장합니다. 3장 1-10절까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해 강조되었다면 11절 부터는 우리의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강해 때 말씀드렸던 내용이지만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때 내용을 반복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언급한 성경말씀입니다.
출14:13
“13.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15.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어찌하여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이 장면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도달했을 때의 장면입니다.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병거를 타고 뒤따릅니다. 그때 모세가 한 말이 이것입니다. 너희를 위한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루신 것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15절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께서 싸우셔서 승리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열어놓으신 그 바닷길로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비록 좌우로 거대한 바닷물이 벽처럼 솟아있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구원의 길을 걸어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너희가 구원을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장면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너희가 힘쓰고 애쓰며 걸어가야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있다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구원의 길을 걸어갈 때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8절을 보면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은혜에 의하여...그렇다면 은혜는 누가 베풉니까?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십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누구의 믿음입니까?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내가 의지적 결단과 노력으로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믿음을 발휘한 것도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믿게 하셨기 때문에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와 인간의 책임이 조화롭게 구원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8:9-10
“9.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한 백성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네가 이곳에서 힘들고 어려워도 복음을 증거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은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고 힘을 내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기에 내가 더욱 열심을 내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빌립보서 2:12-13
12.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우리는 두렵고 떨림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야 합니다. 노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결단하고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성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많기에 복음을 증명하는 것처럼, 우리 안에 행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 논리를 함께 주장합니다. 우리의 머리로는 양립할 수 없는 평행선 같은 논리이지만 성경이 말하고 있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개의 논리는 우리가 얻은 구원이 얼마나 완전하고 안전한지를 깨닫게 합니다. 우리가 때로는 믿음이 연약해질 때 내가 과연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불안해 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가운에 있음을 믿음으로 확신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반면 신앙생활에 나태해 질 때마다 믿음가운데 서있기 위해서 힘쓰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렇게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라는 논리의 긴장이 우리의 신앙을 구원의 확신가운데 계속해서 성숙한 신앙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그렇다면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믿어야 구원을 얻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4-15절에 보시면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 장면 또한 니고데모가 익숙하게 알고 있던 사건입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들은 길이 험하고 물이 없고 음식도 하찮다고 짜증과 불평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감사하거나 기뻐하지 않고 그 분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어 그들을 물게 하사 죽게 하신 것입니다.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사람들이 모세에게 기도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살 수 있는 길을 열어놓으십니다. 그것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위에 높이 세우고 그것을 바라보는 자들로 하여금 살게 하신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사건을 말씀하시면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들리다”라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실제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들려 올려진다는 의미가 있고 둘째는 영광받다는 의미입니다. 두가지 의미가 함께 공존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곧 그분의 영광받으심이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13장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수난받는 사건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12:32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어찌되었던,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의 내용인데 그것은 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곧 구원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님을 원망함으로 불뱀에 물리는 심판으로 죽어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그것은 장대에 달린 놋뱀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유일한 길입니다. 마찬가지로 죄악으로 말미암아 이미 죽은 마른 뼈와 같은 자들에게 하나님은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죄를 예수에게 짊어지게 하시고 그를 저주의 십자가에게 죽으심으로 자신의 진노를 푸셨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실 것을 작정하셨습니다. 따라서 죄인이 구원 얻을 길은 이것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열어놓으셨다면 그것을 의지 할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이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려 죽은 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되면, 하나님은 그 믿음을 근거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그 분의 자녀로 삼아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러한 구원의 길을 열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살길을 열어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된 소식, 기쁜 소식 , 굿 뉴스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허락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6절에 보시면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은 원어로 ‘코스모스죠’? 조화롭게 질서 있고 아름답게 창조된 세상 그것이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타락하여 혼돈과 무질서와 죄악이 난무한 세상을 말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구원하시려고 자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감동시켜서 그분께서 구원을 베푸신 것이 아닙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용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저항할 수 없는 은혜로 그 큰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로 말미암아 죽어 저 영원한 지옥형벌을 받는 것이 마땅한데, 그런 우리에게 사랑을 베푸신 것입니다.
로마서 5:8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여러분! 이것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 중에 누가 과연 원수를 위하여 자신의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에 가서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그분의 사랑인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은 어떠한 죄인도 용서할 만큼 크고 넓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할 수 밖에 없는 오직 한길, 그리고 좁은 길입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을 위하여 열려진 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공의로우셔서 죄인을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따라서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8절에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36절입니다.
“아들을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고 아들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이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신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독생자를 아끼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평생토록 그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이 여러분 가운데 충만하게 부어진 것입니다.
또는 아직 그렇지 못한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시간 이 말씀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길 기도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을 위해 사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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