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37. 세상의 빛 예수 그리스도(2)/2016.11.27
요한복음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세상의 빛 예수 그리스도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했을 때” 그 “세상” 이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만 “세상”이라는 단어가 56번 등장합니다. 그래서 구절들을 뽑아서 보면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세상입니다. 인간들이 거주하고 생활하고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반역한 세상을 말합니다. 대표적으로 요한복음 1:29절의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향하여 말할 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합니다. 이때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한 세상을 의미합니다. 또 3: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했을 때도 “세상”은 하나님을 반역한 세상을 말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어지는 17절에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을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냥 세상이 아니라 반역한 세상이었기 때문에 심판을 받아야 하지만 그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아들을 보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반역한 세상이란 어떤 것일까요? 요한복음에서 세상은 원어로 ‘코스모스’입니다. 하나님께서 “코스모스”를 창조하셨습니다. 코스모스는 사람 사는 지구를 포함하여 끝도 알 수 없는 우주를 말합니다.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셨고 부족함이 없으셨지만 세상을 창조하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은 피조물들로 하여금 창조주를 찬양하는 존재들로 삼으시길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온 우주만물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입니다. 그것들을 하나님의 목적하심 가운데 완벽한 질서와 조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그 모든 질서와 조화들이 깨어져 버렸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통치자였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속에 있을 때만이 우리가 다스리는 모든 것들이 아름다움의 상태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 바른 관계라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내려주시고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하나님을 예배하기를 거부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서 내가 내 삶의 하나님이 되어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살기로 결단합니다. 즉 그것이 죄인데,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나 버리는 것입니다(하마르티아). 그래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깨어져 버립니다. 그 결과 우리가 통치하고 다스려야 하는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이 의도하셨던 그 질서와 조화가 깨어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21-22
21.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22.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피조물들이 다 이제까지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죄로 말미암아 창조주의 목적을 상실하고 혼돈과 무질서 가운데 있는 세상을 어둠상태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그 모든 결과들, 그것이 어둠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이 목적하셨던 인간의 삶의 방식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삶의 방식으로 도입된 것입니다. 여기서 도태되지 않기 위하여 끊임없이 경쟁해야 되는 피곤한 인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회복 되었을 때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6-8
6.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7.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8.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이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디자인하신 세상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다 깨어진 것입니다. 어둠 상태가 된 것입니다. 어둠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어둠이라는 사실조차도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누구인지도 조자 모르고,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목적과 방식이 옳은 것이라 여기고 살아갑니다.
최근 동성애에 대한 합법화 움직임이 이미 전 세계에서 불어 닥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10년 전만 하더라고, 우리는 동성애라는 말을 입에 붙이기도 꺼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합니까? 동성애자들이 TV에 버젓이 출연하기도 하고, 동성애를 그린 영화나 드라마가 여과 없이 우리 안방까지 들어와 있습니다.
제가 뉴질랜드 도서관에서 영어공부를 위해 어린이 동화책을 보는데, 깜짝 놀랐습니다. 아이들 동화책에 동성애자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동성애라는 것이 이상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릴 적부터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게 차별금지법의 핵심적 내용 아니겠습니까?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가자는 것입니다. 흑인과 백인, 외국인과 내국인, 여성과 남성을 차별하면 안 되지요. 그것을 반대하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는 다릅니다. 교회가 그들을 혐오하거나 차별하지는 말아야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의 결과이며 죄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혼돈과 무질서의 양상이 더 깊어지고 있습니다.
진지하게 삶에 대하여 고민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도대체 나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리고 죽음이후에 어디고 가는 것인가? 진리는 무엇인가? 그런데 답을 찾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어둠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온통 어둠속에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그렇게 진리를 갈구하였던 대표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니고데모입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고 유대인의 지도자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최고의 권력과 재력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빛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연구하고 따라 사는 것만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철떡 같이 믿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조항들을 세분화 시켜서 그것을 지킴으로 자신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착하게 살고 좋은 일 많이 하는 것을 통해 자신들이 선해진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종교적인 수행을 통해 신께 가까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어둠의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유대인의 지도자라
2.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요한복음의 특징 중에 하나가 단어의 이중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인자가 들린다(요3:14)”고 했을 때 그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영광 받으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밤이라는 것은 죄악의 어둠상태, 하나님을 모르는 어둠 상태를 말합니다. 니고데모가 바로 어둠의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에서 빛 가운데 거하다가 어둠 가운데로 나간 자가 등장합니다.
누구입니까? 가롯 유다입니다. 그가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거하다가 결국 예수를 팔려는 계획을 실행하게 됩니다. 요한복음 13장에 보면 그 장면이 잘 그려져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발을 씻기신 후에 “너희 중에 한 사람이 나를 팔리라” 고 하십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라고 묻는 제자들에게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유다가 그 조각을 취하자 사단은 그를 장악해 버렸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히브리서 6:4-6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4.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 바 되고
5.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6.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가롯유다는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빛 가운데 있었지만 어둠을 더 사랑하여 나간 것입니다. 왜 어둠을 더 사랑했을까요?
요한복음 12:31절에 보면 이 세상의 임금이 등장하는데 그는 사탄입니다. 복음에서에서는 그를 공중잡은 권세자라고 말합니다. 그가 사람들을 움질일 때 가장 잘 쓰는 방법이 돈으로 유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했을 때 재물이 의미하는 것이 맘몬신 즉 돈신을 말합니다. 그래서 가롯유다가 세상을 사랑했다는 것은 결국 돈에 눈이 멀어 예수를 팔았다는 것입니다. 은30양에 말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어둠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버리는 경우가 많죠. 돈 때문에 부모를 죽이기도 하고, 돈 때문에 그 좋았던 형제우애가 깨져버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모님이 유산을 상속하고 돌아가시면 그때부터 골치 아픈 문제가 시작됩니다. 돈을 하나님처럼 여기도 하나님을 돈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돈과 권력을 따라 갑니다. 이 또한 어둠의 상태입니다.
바로 그러한 세상 가운데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어둠으로 가득한 코스모스 가운데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이사야 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이사야는 이미 빛으로 오실 예수님을 예언하였습니다.
어둠 가운데 빛되신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혼돈과 무질서로 말미암아 잔혹하고 끔찍한 어둠속에 창조주께서 오신 것입니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창조주의 영광을 가려버린 피조세계 가운데 창조주께서 직접 오신 것입니다. 그분은 완전한 창조주로서 뿐만 아니라, 완전한 인간으로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실패한 창조주의 질서를 온전히 회복하시기 위해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9장에서 하나의 사건을 통해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9장에 가면 예수님은 날 때부터 맹인 된 자의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세상의 빛이라”.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맹인과 같은 자들의 눈을 열게 하신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은 맹인과 같이 어둠속에 있었던 눈이 열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내 자신이 죄로 인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존재인지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풀리지 않았던 질문들, 삶의 목적이 무엇이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며, 또 죽음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분명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전에도 한번 이 책을 언급한 한 적이 있는데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책입니다. 영화로도 나왔죠. 포르투갈의 작가인데 노벨상을 받았던 주제사라마구가 쓴 책입니다. 첫 장면이 한 일본인이 평범한 어느 날 오후, 앞이 보이지 않는 한 남자가 차도 한 가운데에서 차를 세웁니다. 이후 그를 집에 데려다 준 남자도, 그를 간호한 아내도, 남자가 치료받기 위해 들른 병원의 환자들도, 그를 치료한 안과 의사도 모두 눈이 멀어버립니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져 앞이 보이지 않는 정체불명의 이상현상. 눈먼 자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정부는 그들을 병원에 격리수용하고, 세상의 앞 못 보는 자들이 모두 한 장소에 모입니다. 그리고 남편을 지키기 위해 눈먼 자처럼 행동하는 앞을 볼 수 있는 한 여인이 있습니다. 책은 그녀의 시선으로 그곳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는지 보여줍니다. 더럽고 추악하고 잔인한 인간의 죄성들이 폭로되기 시작합니다. 학식이 많은 사람이나 교양인이라고 자부했던 사람들, 정치인 종교인 할 것 없이 그들의 숨겨져 있던 추악함 들을 들추어냅니다.
작가는 책을 통해 모든 인간이 볼 수 없는 어둠속에 있을 때 얼마나 더럽고 추악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어둠의 세상입니다. 세상은 어둠속에 있고, 내 눈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온통 죄악으로 물들었고 그곳에 서있는 내 자신도 죄로 인하여 더럽혀 졌으며 내가 서 있는 자리도 죄의 자리이고 내가 걸어가는 길도 죄의 길입니다.
이러한 어둠 상태를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최근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암울한 현실을 보면서 무엇을 느낍니까?
사람들이 돈과 권력 앞에 철저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봅니다. 이화여대, 연세대 다 기독교 학교 아닙니까? 그들이 돈과 권력 앞에서 무릎 꿇는 추한 모습을 봅니다.
우리의 암울한 현대사가 보여주는 것은 그 어떤 권력도 썩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건들 속에서 단지 분노만 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의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지를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육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제도를 바꾼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데 어둠속에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둠의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러한 어둠 가운데 세상에 빛이 임한 것입니다.
그 빛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빛이신 예수 그리스를 따라가게 되면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게 됩니다. 어둠상태에 있던 우리가 생명의 빛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모습입니다.
어둠의 세상 속에 있었던 우리가 빛의 상태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벧전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은 자신을 재판하는 아그립바 왕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행전26:17
17.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18.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바로 빛은 예수 그리스도이고 이 빛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으로 우리가운데 있습니다.
시편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그래서 우리가 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간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빛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고 또한 계속해서 그 말씀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을 의니합니다.
그래서 그 말씀이 임하는 곳마다 빛이 비추이게 되는 것입니다.
서울 홍대근처에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묘원이 있습니다. 저는 이곳을 자주 방문하는데 늘 갈 때 마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이 혼돈의 땅, 무질서의 땅, 가난과 굶주림에 갇혀 있는 이 어둠의 땅에 130여년전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언더우드, 아펜젤러 선교사가 1885년 부활절 아침에 입국했으니 130년이 안된 것입니다. 130년이 긴 세월이 아닙니다. 우리 할머니때 복음이 들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들어오니 남녀차별이 사라졌습니다. 양방과 상놈이 철패 되었습니다. 차별과 가난이 물러가고 이 짦은 기간에 세계가 놀라는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이 놀라운 발전과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없으니 기적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오니 무질서와 혼돈과 어둠의 땅이 변화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 뿐만 아니라, 우리의 가정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비추어질 때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삶이 허락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그 찬란한 빛이 말씀을 통해 우리 가정에 비추어질 때, 어둠의 영은 사라지고, 폭력과 불평과 낙심과 우울과 허무와 외로움이 사라지고 하나님의 빛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 그 분을 여러분의 주인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 따라서 빛가운데 걸아가는 복된 인생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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