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0.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2016.12.18.
요한복음 8:31-36
31.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3.그들이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35.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
36.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요한복음 강해 40번째 시간으로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너희가 참으로 내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내 말에 거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32절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지금 자유의 상태가 아니라 속박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이것은 물론 정치적인 속박의 상태가 아니라 영적인 속박의 상태에를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아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정치적 속박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33절에 유대인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항변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하는 자유가 영적인 자유라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적으로 자유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왜 영적속박의 상태에 있는지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4절에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너희가 죄를 범하는 것을 보니까 죄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자유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자유자이십니까? 아니면 죄의 종입니까?
이 말씀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이 말씀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차근차근 살펴보겠습니다.
1.예수님은 우리가 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죄의 종이라는 말은 무엇일까요? 죄가 우리의 주인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주권자가 아니라 죄가 주권자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내 삶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우리의 삶을 선택하고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과 말 그리고 행동 등 모든 삶의 영역에서 죄가 우리를 주관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과연 우리는 죄의 종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죄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죄의 종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의 종이라기보다는 죄의 종이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떠난 인류의 상태가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즉 죄의 종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롬3:9-12
9.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모든 사람은 죄 아래에 있고 의인이 한 사람도 없으며 다 치우쳐 있어 선을 행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중에 선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것입니까? 우리 주변에는 기부천사들도 많고,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는 사람들, 해외에 나가 난민을 돌보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국가에서는 자신을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사람들을 의인이라고 지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너희가 다 죄의 종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죄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가 무엇인지 먼저 알 필요가 있습니다.
죄 라는 것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 내가 내 인생의 주인노릇을 하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원래부터 하나님을 예배하며 순종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목적 안에 있을 때 인간은 가장 안정되고 평안하며 행복합니다. 이것이 창조의 질서입니다. 그런데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떠나 자신이 자기의 삶의 하나님 노릇하며 살기를 작정합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 동산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누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 자유라는 것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을 때만이 가능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바른 관계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사 은혜를 내려주시고 우리는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경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규정하는 것이 선악과였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만드셔서 인간이 죄를 범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셨는가? 의문을 갖는 경우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순종해야 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선악과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는 에덴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면서도 선악과를 보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자유의 올바른 개념입니다. 무엇이든지 내가 싶은 대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자유가 아닙니다.
이때 인간에게는 자유의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어떠한 것을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간혹 어떤 분들은 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결국 죄를 범하게 만드셨는가? 질문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지 않으셨다면 인간은 로봇과 같은 존재입니다. 창조주가 프로그래밍 한데로 움직이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존재를 굳이 창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가진 자유의지를 통해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자발적인 순종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존재들이 되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아무리 로봇이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이 있다고 해도 우리가 로봇의 존재에 대하여 경이로움을 느끼거나 감동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보시며 기쁨을 이기지 못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자유의지라는 것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얼마든지 기쁘시게 할 수 있지만, 만일 악을 선택하고 악해지려고 하면 더할 나위 없이 악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한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를 통해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고 순종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 사탄이 찾아와 이렇게 유혹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창3:1).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실과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그러한 하나님을 마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존재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판단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완전한 자유자가 되어 스스로 선악을 분별하고 판단하여 살아갈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원래 선악의 판단기준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 스스로 선과 악의 판단주체가 되어 내가 원하는 삶을 마음껏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이 태초의 인간에게 있어서 너무나 달콤한 유혹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 스스로의 삶을 판단하고 결정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 그토록 유혹적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게 된 것입니다.
죄의 결과
이것은 열매를 하나 따먹은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내가 내 삶의 주인노릇을 하며 살아가겠다는 자기주장의지, 자기독립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떠나면 완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될 줄 알았던 인간은 오히려 죄의 종이 되었고 사탄의 종의 되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죄가 이끌어 가는대로 사탄이 이끌어 가는대로 움직이는 죄의 노예상태, 사탄의 노예상태가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자유의지도 오염되어서 이제는 선과 악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의 의지만이 남아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태에 있는 인간들이 내는 선한의지와 노력들은 예를 들어 기부를 하거나, 어려운 이웃들을 돌아보는 사랑의 행위들은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없는 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닌, 자기만족이나 자기사랑에서 나온 것일 수 있습니다.
선교사 친구의 아내가 아이를 키우면서 힘든 얘기를 하던 중, 아기가 밤에 안자고 계속 우니까 침대에 던져버리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처음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떻게 저럴 수 있지 했는데, 제 아이가 그러니까 그 마음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예화)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1933~1984)은 예일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권위에 대한 복종을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가 의문을 가졌던 것은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평범한 사람이 그토록 잔혹해 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2차 세계대전에서 보여준 독일인들의 유대인 학살을 보면서, 이것이 과연 평범한 미국의 시민들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기 위해서 밀그램은 1960년대에 한 가지 실험을 고안합니다. 실험의 주제는 '권위에 대한 복종심'이었다. 먼저 밀그램은 전문배우 두 사람을 연구소로 초빙하여 한 사람은 교사의 역할(권위적 인물)을 연기하도록 하고 또 한 사람은 학생의 역할을 하도록 주문합니다. 실험에서 두 배우는 마치 체벌을 통한 학습성과의 개선여부를 실험하고 있는 교수와 학생처럼 행동했습니다.
실험대상자들은 거리에서 임의로 선택되었고, 이 두 사람의 실험에 도우미로 참여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모두 전문배우가 연기하는 교수와 학생을 진짜로 여겼습니다. 평범한 사람들 중에서 선택된 남녀 실험대상자들은 교수가 학생의 학습성과를 개선시키기 위해 지시하는 체벌을 학생에게 직접 집행했습니다. 체벌은 전기충격을 가하는 것이다. 전기충격은 단추를 누를 때마다 한 번씩 가해졌고, 충격의 정도는 단계별로 높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학생은 다른 방에 있어 보이지 않았고, 전기 충격이 가해질 때마다 비명을 질렀습니다.
실험대상자들은―이들은 자신이 배우의 연기에 속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학생에게 최고 400볼트까지의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람에게 가할 경우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강도였습니다. 밀그램의 관심은 실험대상자들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권위의 영향하에 놓일 경우, 잔인하고 정신 나간 짓이라고 여겼을 체벌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는지 여부였습니다.
실험결과는 건강하고 정상적인 시민의 모습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습니다. 일상에서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평범한 사람들조차 적당한 권위(교수)에 굴복했고, 자신의 행동이 좋은 결과(학습성과)를 가져온다고 여기며 타인을 잔인하게 고문했습니다. 밀그램의 실험결과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수많은 재실험이 이루어졌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았습니다. 어떤 실험에서는 자신을 자유주의자나 사회평화주의자로 여기는 사람들만 따로 선별해서 실험대상자로 삼기도 했습니다. 밀그램이 발견한 잔인성이 소시민적 출신성분이나 성향 탓일지 모른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실험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자유주의를 부르짖던 사람들은 그들이 평소 자신의 적으로 규정하던 사람들보다 더 잔인하게 행동했습니다. 자신이 속물이라고 멸시했던 사람들에 비해 더 빈번하게, 그리고 더 높은 단계에 이르기까지 전기충격을 가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자유의지를 가졌다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인간은 과연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일까요?
그래서 선과 악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판단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죄성과 잔혹성에 누군가 권위라는 명목으로 조금만 불을 당기면 이내 불이 붙고 마는 것입니다.
아이들이라고 다를까요?
EBS에서 아이들의 도덕성을 실험한 영상을 보았습니다.
선생님이 아이에게 사진 한 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선생님이 어릴 적 소풍 때 찍은 사진인데 한 장밖에 없는 가장 소중한 사진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리고 나서 아이에게 이 사진을 찢으라고 말합니다. 처음 아이는 망설입니다. 그러다 소심하게 귀퉁이를 찢습니다. 그 다음 부터는 조금 편하고 자연스럽게 사진을 여러 갈래로 찢어놓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죄의 성향이 주변환경의 영향때문이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나고 난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죄의 성향은 교육을 통해 순화시키고 법을 통해 강제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이러한 것이 말이나 행동으로 나가지 않도록 조심할 뿐이지 사실 우리안에 있는 잠재되 있는 것입니다.
유치원에서 아이를 폭행한 영상을 보면서 경악할지 모르지만, 폭행한 교사와 내가 다른 것은 표현했는가 아니면 다스렸는가의 차이일 뿐이지, 내면에서 일어난 잔혹함의 성향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죄로부터 자유롭지 않습니다.
내가 살아오면서 그동안 심각한 죄를 짓지 않았던 것은 내가 선하고 착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상황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상황을 조절해 주셨고, 나의 의지와 감정을 붙잡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우리의 죄는 결국 하나님의 정죄와 심판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죄를 결코 가볍게 다루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가 지은 모든 죄에 대하여 낫낫이 기억하시고 물으실 것이며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바로 이러한 존재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고 자유롭게 어떠한 결정을 하고 선택을 하고 있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를 주관하는 자는 사탄이며 죄입니다.
내 존재는 철저하게 잔인하고 잔혹한 죄의 종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십니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 분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완전하게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이상 죄의 종들이 아니며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자유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이 자유는 창조 때에 구상하셨던 하나님께 의존된 자유입니다.
그 분의 말씀 안에 있을 때 에덴의 모든 것을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래서 진리 안에 있는 자들, 예수님 안에 있는 자들에게 죄의 정죄와 속박은 더 이상 없습니다.
롬8:1-2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오래전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눅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7.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20.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의 의지와 경향성을 꺽어 버리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워낙 강하기에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과 경향성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어떻게 변하는가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의지와 방향으로 완전히 돌아섭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죄에 대하여 반성하고 눈물 흘리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 메타노이아 즉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나의 유익과 욕망을 따라 죄가 시키는 대로 살아갔던 나의 삶을 돌이며 이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으로 우리의 의지와 성향이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이것을 누가 하는가 하면 진리가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행하신 다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보면 진리가 자유케 하리라, 하셨고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자유한다고 하셨습니다. 내 스스로의 의지와 노력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케 하사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생으로 바꾸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 이미 우리 가운데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1:6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아직까지 우리는 죄로부터 완전한 자유에 이르지 못했지만, 착한 일을 시작한신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재림하는 그 날 완전하게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그 일을 이루어가고 계십니다. 그 날이 오면 우리의 자유의지는 완전히 회복되어 하나님만을 예배하고 영화롭게 하는 삶을 온전하게 살게 될 것입니다. 그때까지 인내로서 믿음의 삶을 경주하시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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