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1. 하나님의 일을 위해 소경된 자/ 2017.1.6.
요한복음 9:1-7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바르게 알 때만이 바르게 경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신앙의 열심과 헌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바가 있지만, 사사기에 등장하는 입다는 하나님을 향한 열심과 헌신이 특심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했기에 그가 했던 서원기도와 그것을 지키기 위해 딸을 번제물로 드린 행위는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신앙이 있다는 사람들의 모습 가운데 입다와 같은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 아님을 봅니다. 자기가 믿고 싶어 하는 하나님, 또는 신앙 좋은 누군가가 말해준 하나님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모릅니다.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에 신앙의 모습은 왜곡되고 극단적인 경우 폭력적인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오늘 말씀은 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에 대한 생각과 충돌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충돌이 없는 분들이라면 하나님을 바르게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충돌을 느끼신다면 그동안 하나님을 오해했던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을 내려놓고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우리의 삶에 대한 이해의 지평이 온전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에 대한 이해와 수용은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될 것입니다.
본문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초막절에 말씀하셨던 내가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하나의 표적을 통해 드라마틱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영생, 구원 이라는 중요한 주제를 여러 가지 그림으로 보여줍니다. 본문은 구원이란 무엇인가? 라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맹인된 자가 보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시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내용, “이 사람이 소경된 것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인과율과 인간의 책임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에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는 길에서 구궐을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곁에 있던 제자들이 평소 궁금했던 것을 질문합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맹인이 된 것은 죄의 결과라는 인식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은 단지 맹인이라는 특정한 장애뿐만 아니라 인간이 겪는 고난의 원인이 죄 때문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맹인은 날 때부터 맹인된 자였기에 그의 죄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 또는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지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비단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인간세상은 인과율이라는 법칙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은 인과율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인과율은 세상을 이해하고 인간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현실적입니다. 사업을 할 때도 잘되는 것은 잘되는 이유가 있는 것이고 안되는 것은 안되는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상담학에서도 인간을 이해할 때, 모든 문제는 원인이 있음으로 상담을 통해 그 원인을 찾아 해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사형제도패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인간의 극악한 죄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죄라고 한정하기 보다는 그 사람이 죄를 짓게 만든 그 원인이 여러 가지므로 그 사람에게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폭력적 형질, 그가 자란 불우한 환경, 폭력에 쉽게 노출 될 수밖에 없었던 성장과정...이러나 것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특히 결정론자들은 사람의 인생이 6세전에 이미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태어날 때 타고난 유전적 형질과 6세 이전의 교육과 환경에 의해 그의 삶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3세 이전에 결정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일견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의 삶에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 속에서 우리 대부분은 이러한 인과율에 따른 결정론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삶의 고난의 문제 앞에서 그 원인이 무엇인지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난자체도 힘이 들지만 그 고난의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더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환자가 자신이 질병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게 될 때 마음이 놓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원인을 알게 되면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원일을 알 수 없는 고통이 계속될 때 좌절하게 되고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원인이 무엇인지를 계속해서 찾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만 마음이 놓이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폭력성 때문에 고민하던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사랑과 관심으로 키운 아들이 갑작스럽게 폭력적이 되자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정신과 진단을 받아보기도 하고 약을 먹기도 했지만 아이는 약기운으로 무기력해가기만 했고 실제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의 소개로 어느 교회를 갔다 온 어머니의 얼굴이 밝아졌습니다. 알고 보니 유광수 다락방교회에 갔다 온 것입니다. 거기서 어떤 이야기를 들었는가를 들어보니까 우리 삶의 모든 문제가 결국 사단 때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단이 자신의 아이에게 들어가 폭력적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니까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원인을 찾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이가 폭력적이게 된 것은 사단 때문이라고 생각하니까 그 해답이 너무나 쉽게 나왔습니다. 그것은 기도를 통해 사단을 쫒으면 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한숨이 나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삶의 문제를 사단 탓으로 돌리면 실제적으로 문제 해결에 도움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못된 진단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탄이 들어가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다양한 원인 때문에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삶의 문제의 원인은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그 복합적이고 다양한 원인을 찾아 해결하지 않고 결박기도를 통해 사단만 쫒으면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진 것입니다.
사실 그 아이의 폭력성은 자라온 환경속에서 어머니의 강압적 태도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와 애착이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나친 간섭과 교육열로 인해 아이의 분노는 축척되었고 이제 자신의 생각이 커지고 몸집이 커지면서 그것이 표출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책임 있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고난의 문제 앞에서 우리의 죄와 잘못과 실수를 인정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 삶의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 내가 잘못한 것은 없는지, 내 주변의 사람들과 상황이 어떠했는지 나의 삶의 히스토리 가운데서 이해하게 될 때 많은 부분에 있어 도움을 받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주권
그러나 신앙인들에게는 고난의 문제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지평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틀로 우리 삶의 고난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고난이 나의 죄와 실수 때문이기도 하고 타인의 죄에 연대되어 받기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목적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살아가고 죽게 되는 모든 삶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내가 실수하고 잘못하고 죄를 지을 때 하나님은 모르시지 않습니다. 다 아십니다. 그런데 그것을 막으실 때도 있지만 그냥 두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넘어지게도 하시고 죄를 범하게도 하십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죄를 짓게 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 다시면서도 그대로 두신다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죄를 짓지 않도록 하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그냥 두십니다. 그래서 좌절하게 하시고 절망하게도 하십니다.
예수님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된 자를 보시며 그것은 너의 잘못도 부모의 잘못도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동안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모든 인식을 뒤집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하나님은 좋은 것만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하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질병에 걸리지 않게 해주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이 형통하게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우리의 자녀들이 앞날에 시온을 대로를 열어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부유하게 하셔야 하고 건강하게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그 모든 생각을 뒤집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맹인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질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실패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토록 견디기 힘든 그 고통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시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맹인은 참으로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냐고 분노와 원망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좋은 가정에 태어나 돈 걱정 없이 살다가 비싼 과외 받고 명문대 들어가 취업도 잘되고 좋은 가문에 결혼하여 평안하게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죄를 졌다고 이렇게 태어나 평생을 살아야 하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 얼마나 괴롭고 원망스러웠을 까요?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격고 있는 그 고난의 원인이 하나님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고 싶으십니까?
그런데 만일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그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원망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내 안에 내가 하나님으로 서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늘 나에게 좋은 것을 주셔야만 되는 분으로, 오히려 하나님이 나를 섬겨야 되는 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중심적인 죄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분은 모든 것을 창조하실 때, 어떤 것은 아름다운 꽃으로 어떤 것은 들의 잡초로 만드십니다. 토기장이의 비유를 아십니까?
로마서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예레미야 18:6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토기장이는 어떤 그릇은 보화를 담는 귀중한 그릇으로 또 어떤 것은 하찮을 것을 담는 그릇으로 또 어떤 것은 깨뜨릴 수 있습니다. 그 권한이 토기장이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그릇이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초라하게 만드셨냐고? 왜 나는 깨어 부수냐고 항의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을 그동안 얼마나 모독했습니까? 하나님 하시면 그것이 선하신 것입니다. 아직도 선과 악을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니까? 내 인생이 행복했다고 내 인생은 불행했다고 스스로 판단하십니까? 아니오. 하나님이 하셨다면 그 모든 것은 선한 것입니다.
들의 핀 잡초도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과 계획 속에서 그 곳에 있습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 자리에 있을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것입니다. 맹인으로 있으라면 맹인으로 있는 것입니다. 내 삶 속에서 일어났던 수 많은 절망과 고통들 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 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께서 하셨던 일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시겠습니까? 토기가 토기장이에게 항의 하겠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모릅니다. 왜 나를 들의 잡초로 창조하셨는지, 왜 나를 질그릇으로 만드셨는지 모릅니다. 그저 우리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를 멍들게 한 번영의 신학은 예수를 믿고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고 성공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고난당한 성도들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잘못한 것이 많아 그렇다고 은근히 조장합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어여 합니다.
우리가 이 신앙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평생 하나님을 바르게 경배하지 못합니다.
실패한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해 보셨습니까? 병들어 죽어가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찬양해 보셨습니까? 자녀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면서도 감사해 보셨습니까?
간증석에는 왜 무언가 성공하고 잘된 사람만 서야 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죠. 하나님께서 내게 질병을 주셨지만 그래서 내가 지금 죽어가지만 난 그래도 이 질병을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런 고백이 진짜 아닙니까?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누군들 못합니까? 세상에서 실패하여 단칸방에 살면서도 목자 되신 주님으로 인해 부족하지 않다는 고백을 들어본 적은 언제입니까? 왜 이런 간증이 우리 가운데 없는 것입니까?
왜 우리는 아직도 하나님이 나를 섬겨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직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바르게 경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지선자매 이야기
2007년 7월 30일 음주 운전자가 낸 7중 추돌사고, 현장에 그녀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탄 차는 폭발했고, 화염속에서 정신을 잃었습니다. 신체 55%에 3도 화상, 수차례 대수술 끝에 의식이 돌아온 그녀가 가장 먼저 했던 말,
“지금이 몇 년도야”
죽음의 문턱 앞에서 긴 시간을 투쟁을 해 온 그녀
“아침마다 날 살리기 위해 의료진이 오는데 그 목소리가 죽음을 부르는 것 같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비명을 지르는데 지옥에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불길속에서 그녀를 구한 오빠 역시 그통스러워 하는 그녀를 보며 자책했다.
40번이 넘는 대수술과 재활치료.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지만 그녀는 다시 일어나 삶이라는 긴긴 레이스를 이어갔다.
“중환자실에서 있던 36일 동안 18명의 환자가 죽는 걸 밤마다 봤어요.
옆 커튼 너머로 사람이 죽어가는 데도 나는 살기위해 먹어야 했고 거기서 살아나왔어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 삶이 분명히 달라졌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 모습은 일그러졌지만, 이런 내안에 생명이 있는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요.“
그녀는 사고후 자신의 달라진 삶을 기록해갔고 2003년 ‘지선아 사랑해’라는 책을 출간해 그녀의 용기와 희망을 세상에 전합니다.
“제가 다치고 나니까 사회가 다르게 보이더라고요. 얼굴이 없어졌을 뿐, 저 자신은 달라지지 않았는데 완전 주변으로 떨어졌어요. 그 상황을 겪으면서 장애인, 노인 등 소외 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게 됐어요.”
사고후 장애인에 대해 더욱 관심을 갖게 된 그녀는 2004년 유학길에 올라 미국 보스턴대와 컬럼비아대에서 각각 재활상담, 사회복지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습니다. 2009년에는 ‘자신과의 싸움’이라는 42.195km 풀코스를 마라톤에 참가해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기도 했다.
“인생이 마라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라고 한 사람은 없었지만 어디서 그만둬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런데 그만 둘 수는 없었다.”
“2009년 뉴욕마라톤 당시 모르는 분이 ‘이지선 파이팅’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나를 응원했다. 내가 주저앉은 모습을 보고 집에서 그걸 만들어 다시 달려나와 들었다고 했다. 한 사람의 응원이 얼마나 큰 힘을 줄 수 있는지 그때 깨달았다.”
2016년 그녀는 ‘어떻게 하면 장애인을 향한 우리 사회의 시선을 바꿀 수 있는지’ 연구해 미UCLA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세상을 바꿀 큰 일보다 내 작은 손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시간과 마음을 내어주는 의미있는 일을 하겠다.”는 그녀
그녀 한 사람으로 인해 달라진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블로그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버리지 않고 자녀 삼아 주신 것만 해도 평생을 찬양해도 모자랄 것입니다. 우리 삶에 일어난 고난이 버겹고 힘들지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기 위한 그분의 선하신 뜻입니다.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해할 수 없기에 고통스럽기도 합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 사는 날 동안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수용하고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모양 이 꼴로 평생을 살지 모릅니다. 피우지 못하고 지는 꽃도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지 않습니까? 이 땅이 전부라면 잘 먹고 잘살면 좋겠지요. 그러나 우리의 집은 이곳이 아닙니다. 우리의 아버지가 계시고,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있는 그곳이 우리 집입니다.
고통이 길어야 얼마나 길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호흡을 멈추게 하실 날은 그리 멀지 않습니다. 그때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영원한 그 품에 앉아주실 그날이 곧 올 것입니다. 그때까지 인내하고 우리의 신앙의 여정을 묵묵히 걸어가십시다.
포기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고, 하나님이 하셨다면 그것은 선한 것입니다. 그 믿음으로 살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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