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09-06 16:20

요한복음 강해 25. 오병이어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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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25. 오병이어/2016.9.4.

 

요한복음 6:1-15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2.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3.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4.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5.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8.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9.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1.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2.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3.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4.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요한복음 강해 25번째 시간으로 오병이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오병이어의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이셨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이 본문을 대할 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사실 그동안 누군가로부터 들은 잘못된 설교 또는 가르침입니다. 간혹 자기중심적 신앙의 형태는 성경을 해석할 때도 나타나는데 그것은 자기의 상황과 환경에 성경본문을 끼워 맞추는 식입니다. 그래서 정작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놓쳐 버리고 자기에게 유익하고 이로운 쪽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그렇습니다. 많은 경우 아이가 예수님께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집중합니다. 비록 작은 것이지만 예수님께 바쳤을 때 놀라운 일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비록 작은 것이지만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께서 몇 백배 몇 천배로 갚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이해와 적용은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초점은 음식을 가져온 아이에게 있지 않습니다. 또는 우리가 바친 것에 놀랍도록 축복하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러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시는 신비한 능력이 있으신 분이다 라는 것도 아닙니다. 본문이 집중하고 있는 것은 오병이어 사건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데에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오병이어는 가나의 혼인잔치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수많은 이적과 기사 가운데 선별된 일곱 개의 표적 가운데 네 번째에 해당합니다. 표적은 sign, 표지판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것 자체가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심을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행하셨던 성만찬과 연결되어 그 생명이 예수님의 찢기신 몸과 흘리진 피로 주어짐을 보여준 것입니다.

 

언제?
이제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이 사건이 일어난 시간적 배경입니다.
이때가 언제인가? 4절에 보면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유월절이 시작되는 시점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에서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시위하실 때 그 때가 유월절이니까 그로부터 1년이 지난 시점인 것입니다. 유월절에는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성전에 올라가는데 예수님께 나온 것으로 보아 예수님의 사역에 상당히 감동받은 무리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어디서?
다음으로 장소적 배경입니다. 이곳이 어디인가 1절에 보면
“1.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10절에 보면 “그 곳에 잔디가 많은 지라”
갈릴리 바다 건너편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지도를 보면 갈릴리 바다가 북쪽에 있는데 남쪽으로 요단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요한강을 중심으로 동쪽지역은 광야지역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배를 타고 동쪽 광야지역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잔디가 많은 지역으로 가신 것입니다.
이러한 장소적 배경은 본문을 이해하는데 있어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이러한 것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누가?,

다음으로 그 곳에 누가 있는가? 왜 있는가?를 보시면 2절에
“2.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 이러라”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합니다. 왜 그곳에 있는가?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 이러라”
이들은 그동안 예수님의 병 고치는 사역을 통해 큰 감동과 자극을 받은 사람들의 무리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월절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계속해서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5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보셨다’는 표현은 이들을 주목하여 보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대단히 큰 무리들이 예수님께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의 인원이 남자만 5천명이니까 여성과 아이들까지 합하면 2만 명은 족히 넘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기대하고 예수님께로 나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주목하여 보시다가 곁에 있는 빌립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빌립을 시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빌립이 대답합니다.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1데나리온이 노동자가 하루 받는 품삯이니까 200데나리온은 당시 200일 정도의 임금에 해당하는 상당히 큰돈입니다.
그랬더니 그 옆에서 듣고 있던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습니까?”


안드레의 이 말은 아이가 가지고 있는 이 작은 음식밖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안드레 역시 이들을 음식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혹 빌립은 계산적 신앙을 가졌고 안드레는 작은 믿음이라도 있었다는 말을 하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빌립이나 안드레나 둘 다 이들을 먹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자신이 의도하신 일을 시작하십니다. 10절을 보니까 먼저는 제자들로 하여금 이들을 앉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들의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오천 명이라는 숫자가 어떻게 계산이 되었을까? 오늘날 교회에서는 주일예배 인원을 계수 할 때 기도시간에 교역자들이 하기도 하고, 카운트하는 기계를 사용하기도 하는 때 그때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그런데 마가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시켜 오십명씩 백명씩 앉게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그 많은 사람이 이렇게 정돈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한눈에 이들의 숫자가 파악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 보면 앉게 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식사를 하는 자세를 취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식사자세는 약간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제 예수님께서 아이가 가져온 보리떡 다섯 개를 손에 드시고 축사하십니다. 그리고는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다섯 개 뿐이었던 보리빵이 줄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주기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굉장히 놀라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기적을 믿지 않으니까 이러한 이적은 당시 아이가 자기음식을 드린 것에 감동된 사람들이 자기들이 먹으려고 가져온 음식을 내놓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내용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풍족히 먹었다고 말합니다. 당시 한끼 식사로 보리빵 3개를 먹었다고 하니까 실제로 굉장히 많은 빵이 계속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물고기도 그와 같이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곳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보리빵과 물고기를 풍족하게 먹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바구니를 가져와 담아보니 12광주리를 가득 채운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다윗 왕 때의 찬란했던 영광을 회복시킬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이 기대했던 메시야는 다름 아닌 모세와 같은 선지자였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압제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을 출애굽시켜 마침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으로 인도한 하나님이 세운 선자자였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갈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18:15)고 했기 때문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나오면 그가 곧 메시야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귀신을 쫓아내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며 그들이 처음 들어보는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말씀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수많은 사람들은 이 분이 구약에서 말했던 모세와 같은 선지자, 즉 메시야가 아닌가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갈릴리바다를 건너 요한동편 광야로 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향해 오는 수많은 무리들을 보시면서 무언가를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수많은 병자들을 고친 것을 보고 따라온 자들이기에 분명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의 놀라운 능력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른 계획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무언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경험을 체험케 하심으로 자신이 누구인지를 보여주길 원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을 직접 체험하지는 않았지만 우리처럼 누군가의 이야기나 글을 통해 접하게 될 사람들에게도 보다 선명하게 예수님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씀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많은 말이 아니라 체험을 통하여 보여주고 깨닫게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그들을 광야 가운데서도 잔디가 많은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들이 쉴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소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무리들이 음식을 원하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길 원하셨습니다. 광야 가운데 있는 푸른 초장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들이 원하지도 그리고 노력하지도 않았지만 거져 주어진 음식을 들고 배부르게 먹고 있는 무리들의 모습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분명 구약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로 배부르게 먹고 있는 모습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로 날마다 배부르게 먹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먼저 빌립에게 시험하십니다. 왜 빌립을 시험하셨을까? 그것은 신명기 8장의 말씀을 떠올리도록 하신 것입니다.

  

신명기 8장
2.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를 먹기 위해서 하나님의 시험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시험은 광야 길을 걷게 하시면서 그들을 낮추신 것입니다. 광야는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살아갈 수 없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씨를 뿌리거나 파종할 수 없습니다. 동물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양식만을 기다려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만나를 주시지 않으면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그들에게 날마다 만나를 내려주심으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만나를 통해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날마다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한가지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죠.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에 꼭 필요한 것들을 구하라는 기도입니다. 그중에 가장 기본적인 것이 먹는 것입니다. 먹는 것이 충족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음식은 생존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그것을 채워 주심으로 우리의 생존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며 살라는 것이 이 기도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나의 인생이 먹고 사는 것에 메이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구나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먹고 살기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며 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신 후 마귀가 시험한 것입니다. 이 돌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할 때, 그것은 먹는 것에 대한 시험, 생존에 대한 시험이죠. 네가 가진 힘과 능력으로 먹을 것을 만들어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로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입니다.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결국 예수님께서 빌립을 시험하시고 광야와 같은 곳에서 군중들을 먹이신 것은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로 먹이신 분이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며 그 하나님이 바로 예수 자신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남은 조각을 담은 12광주리는 구약의 12지파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구약의 12지파는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죠.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떡을 통해서 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풍족히 먹고 남는 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또한 시편23편을 떠오르게 합니다.
1.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
3.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잔디가 많은 푸른 초장에 그들을 앉게 하시고 풍족하게 먹게 하신 것입니다. 봐라,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만나를 주었던 하나님이다. 그리고 너희 조상 다윗이 찬송한 그 여호와가 바로 나다 라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짐작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붙잡아 억지로 임금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15절).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을 피해 산으로 가십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의 의도한 것을 잘못 오해하여 자신들의 떡의 문제를 해결할 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 다윗 왕 때의 부흥을 일으켜 정의로운 사회와 경제적 풍요를 가져올 분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한 것은 세상의 떡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해주고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어 보다 윤택한 삶을 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그 어떤 것을 기대하고 예수님을 따른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나중에 예수님께서 오병이어 사건을 풀어 해설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은 너희가 원하는 세상의 떡을 주러 온 것이 하니라 하늘로부터 내리는 생명을 주기 위해 왔다고 합니다. 그러자 그의 제자 중 많은 사람이 떠나갑니다.
66.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이 오병이어 사건은 이후에 최후의 만찬으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꼭 1년 후 유월절에 제자들과 함께 모입니다. 그리고 오병이어 때 하셨던 것처럼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그들에게 떼어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길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잔도 그와 같이 하시고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통해 오병이어 사건은 단순히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건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떡, 즉 십자가에게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를 통해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실물로 교훈하신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생명은 떡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조금 더 편안함과 풍족함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임을 깨닫게 해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른다고 이곳에 모여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세상의 떡을 쫓는 자들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자들입니까?
겸손하게 성찬의 떡과 잔 앞에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