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7.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2016.9.18
요한복음 6:22-29
22.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25.바다 건너편에서 만나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하니
2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27.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28.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우리는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셔서 풍랑 속에서 헤매고 있는 제자들을 구해내시는 사건을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며 또 어떤 일을 행하시는가? 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 분은 저주와 심판의 바다에서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목적지인 하나님의 나라에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함께 동행 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지금 어떤 상황인가 하면 군중들이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이들은 오병이어 사건을 체험한 자들입니다. 다음날이 되어 예수님을 찾으려고 하니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지난밤 제자들이 풍랑 속에서 헤매고 있을 때 물위를 걸으셔서 그 배로 가셨고 배는 그들이 가려고 했던 가버나움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군중들 생각에는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는 것은 보았지만 예수님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오병이어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찾아 간 것입니다.
22절-24절에는 이러한 이들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2.이튿날 바다 건너편에 서 있던 무리가 배 한 척 외에 다른 배가 거기 없는 것과 또 어제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그 배에 오르지 아니하시고 제자들만 가는 것을 보았더니
23.(그러나 디베랴에서 배들이 주께서 축사하신 후 여럿이 떡 먹던 그 곳에 가까이 왔더라)
24.무리가 거기에 예수도 안 계시고 제자들도 없음을 보고 곧 배들을 타고 예수를 찾으러 가버나움으로 가서“
그곳에도 계시지 않자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향합니다. 아마도 그곳에 예수님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갈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함께 계실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보게 되는가 하면 동방서주하면서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무리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메시야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면서 예수님이 모세와 같이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한 것처럼, 예수님도 우리를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 마침내 다윗왕 때의 태평성대를 이룰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남자만 5천명 여자와 어린아이들까지 합쳐 2만명이 넘는 사람들의 떡의 문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풍족하게 먹고 열두 광주리를 남길 정도로 놀라운 이적을 일으키신 분이라면 능히 자신들의 떡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그래서 자신들의 삶에 경제적인 안정과 풍성함을 주실 것이라는 기대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신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산으로 피하셨지만, 그들은 이 믿음과 기대를 계속해서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토록 예수님을 찾으러 다닌 것입니다.
결국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납니다. 59절에 보면 예수님을 만난 장소가 회당이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이제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아마도 그중에 리더격인 사람이 대표로 나서 이 말을 했을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랍비여 언제 여기 오셨나이까”
이 말속에는 우리가 예수님을 찾으려고 열심히 돌아다니가 결국 이곳에서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하는 반가움과 우리가 그토록 동분서주 하면 찾아다닐 때 도대체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는 약간의 불평어린 어조로 보입니다. 여하튼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았고 기뻤을 것입니다. 저는 그들이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하루 동안 어떻게 보냈을까를 상상해 보았습니다. 아마도 예수님 이야기만 했을 것입니다. 삼삼오오 모여서 그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이적들에 대한 이야기로 간밤을 보냈을 것입니다.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든 이야기며,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채찍을 들어 쫒아낸 이야기,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친 이야기...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져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이 되어 예수님을 만나고자 모두가 분주해 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자 결국 가버나움까지 와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반가움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제 자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내가 꿈꾸고 바라던 인생을 살게 해줄 것이라는 부푼 꿈을 꾸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들의 기대에 찬 눈빛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마치 그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듯이 말씀하십니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그들의 열심과 노력을 아신다면 따듯한 말씀으로 그들을 품어주셔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당시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단지 이 말씀만을 추려서 읽으면, 썩을 양식은 세상에서 우리가 먹는 양식을 말하고 결국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는 것은 너희가 먹고 살기 위해 일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이해되어 집니다. 만일 이렇게 이해가 되면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 예를 들어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고 하는 일들을 그만두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생업을 썩을 양식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심히 일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엡4:28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또한 데살로니가후서 3:10에도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그만두고 하나님 일에만 열중하라는 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또는 이렇게 이해하는 경우입니다. 우리가 어차피 먹고 살기위해서는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해야 하는데 주님께서 너무 그 일에만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애쓰라는 말씀일 것이라는 삶의 우선순위를 말씀하는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잘못된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가 이 대화가 어떤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무리들은 예수님을 찾으려고 안달이 나서 아침부터 서둘러 이곳까지 열심을 내어 달려온 것입니다. 지금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즉, 너희가 나를 열심을 내어 찾고 있는 것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이들이 예수님을 찾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들에게 무언가를 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6절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26.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그들은 오병이어의 표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단지 예수가 주시는 떡에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병 고침이었고, 귀신을 쫒아내는 것이었으며, 또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자신들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지금보다 무언가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이 바로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그토록 찾고자 애쓰고 노력하여 여기까지 왔지만 결국 너희들은 나를 통해 썩을 양식을 구하고 있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후에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늘로부터 온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또 생명의 떡이라고 하십니다. 즉 너희들이 오병이어를 통해 관심을 가져야 하고 기대해야 하는 것은 내가 주는 떡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다. 내가 떡이고 내가 생명이다. 그러니 너희는 나를 믿고 의지하고 기대해야 된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자 무리들이 다 떠나갑니다. 그중에 많은 제자들도 떠나갑니다.
66절에 보면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우리가 예수님 자신이 아니라 그분께서 주시는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하는 모든 노력과 열정들...결국 그것이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입니다. 전혀 무가치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씀을 지금 예수님께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에 주목하셔야 합니다. 예수님에 대하여 무관심하거나 전혀 믿지 않는 자들이 아니라, 그 분을 기대하고 따르는 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즉 우리와 같은 자들에게 하시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주님께서 이 자리에 있는 나에게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믿고 예배하기 위해 이곳에 있지만, 무엇을 위해 이곳에 있느냐는 주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 각자가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 자신이 아닌 예수님을 통하여 얻어지는 유익들에 관심이 있다면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고 있는 것입니다.
청년시절 친구가 좋아서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 교회에서 또래의 친구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이 즐거운 것이죠. 간혹 연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또래의 청년들이 많은 교회를 찾기도 합니다.
사업에 어려움이 생기거나 질병에 걸리는 등 삶의 문제 가운데 예수님을 찾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어려움 가운데서 우리를 부르시는 경우가 많기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느 누가 처음부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려고 오는 경우가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각자가 여러 가지 상황 속에서 저마다의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후에도 계속해서 이러한 자세로 주님을 따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헌금을 드리고 전도도 하고 교회의 여러 가지 활동을 열심히 하지만 만일 그 중심가운데 예수님자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을 통해 자신과 가족의 삶의 평안과 윤택한 삶을 보장받으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 또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자신의 죄를 깨닫고 십자가의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우리 삶은 달라지게 됩니다. 그 변화는 삶의 주인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노릇하며 살다가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말합니다. 우주의 중심이 지구이며 태양계는 그것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처럼, 내가 내 삶의 중심인줄 알고 살았던 우리가 하나님이 우주만물의 중심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서 먼지만도 못한 존재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러면서 그러한 자신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고 인도하신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성경을 통하여 바르게 깨닫게 되면서 내가 이전에 예수님을 향해 가졌던 기대와 소망이 얼마나 헛되고 무가치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아이들이 장난감 하나를 손에 꼭 쥐고 빼앗기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아이이게 있어 그것이 가장 소중한 것처럼 말입니다.
저희 아이가 저를 감격시킬 때가 있습니다. 제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자기 손에 쥐고 있던 장난감을 던져버리고 저에게 안길 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모습이 내가 소망하고 기대했던 것들을 손에 쥔 채 그것을 은혜로 베풀어주신 예수님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들은 사실 우리의 지혜와 경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내 수준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바라봅니다. 또는 내 옆의 경쟁상대보다 조금 더 잘되길 바라죠. 그러한 내 수준의 틀이 나를 가두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를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시야와 판단력의 수준에서 내 상황을 해석하고 받아들이기에 그것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우리들에게 썩을 양식을 위해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27절에 보니까,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준다” 말씀합니다. ‘인자’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다니엘서 7장에 근거하여 하늘에서 내려오신 인간의 모습을 한 신적존재가 인자입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시죠. 그래서 “인자는 아버지께서 인치셨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쳤다”는 것은 ‘보증하셨다, 인정하셨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예수님 그분이 우리에게 영생하는 양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식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35절에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란 예수님 자신을 의미하고 그것을 위해 일하라는 것을 그것을 추구하고 갈망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추구하고 갈망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군중들이 묻습니다.
28절에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그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을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일들이라고 풀어서 말할 수 있습니다. 곧 무리들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힘쓰라고 한 것을 ‘하나님의 일’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9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 즉 예수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바라시는 일이며 그것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며 결국 그것을 먹게 되어 영생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 것에 대하여 다양한 표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영생을 주시는 양식으로 알고 먹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은 썩을 양식이 아닌 예수님 자신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믿으라는 말씀을 먹는 것과 비유하여 표현한 것에 대하여 생각해 보다 영화 하나가 떠올랐습니다. 1989년에 나온 ‘몬트리올 예수’라는 영화입니다. 제가 고등학교때에 극장에 혼자 가서 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너무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라 기억나지 않지만 마지막 장면만큼은 인상 깊었습니다. 연극에서 예수의 역할을 맡았던 다니엘이라는 사람이 연극도중 십자가가 떨어지는 사고로 병원에 실려 갑니다. 뇌사 상태에 이르자 그의 장기가 하나하나 사람들에게 전달되게 됩니다. 실명된 사람이 눈을 받아 보게 되고, 심장을 받아 생명을 연장하게 되는 사람들의 모습들을 비춰줍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나누어 주는 모습을 중간 중간 보여줍니다.
마치 이처럼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의 찢기신 몸과 흘리신 피가 우리의 죄를 깨끗하여하고 예수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달되어 허물과 죄로 죽어있던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죽어있던 우리의 육신과 영에 접촉되어 우리가 진리를 보게 되었고, 우리의 귀가 열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죽어있던 이성이 깨어나 진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의 실체이고 의심할 수 없이 지금도 우리 곁에 살아계신 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체험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우리 삶에 영적인 배부름을과 만족함을 얻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렬한 표현인 먹는 것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를 먹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인 예수를 믿기 위해 애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을 믿는 초보적 신앙에서 더 나아가 그 분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은 결국 순종으로 표현됩니다. 그리고 순종은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할 때만 가능합니다.
이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헛된 기대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예수를 통하여 이루고 싶었던 내 삶의 유익들을 버려야 합니다. 어린아이처럼 붙들고 있는 장난감과 같은 내 기대수순의 최상의 것들도 내려놓아야 합니다.
땅속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팔아 그 땅을 사야 합니다.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하는 길이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닫고 삶의 모든 열정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내게 아무리 유익되는 길이라 할지라도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에 방해가 된다면 과감하게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신앙의 원칙이 되어야 합니다. 삶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원칙이 없으면 갈등합니다. 따라서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을 근거로 한 삶의 원칙들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원칙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자녀와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부모일수록 돈으로 때우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이 자녀를 망치게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을 소홀히 여길 때 우리 삶은 망가지고 혼잡해 집니다. 그런 상황속에서 내가 결정하고 진행하는 모든 일들도 방향을 잃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우리 삶에 중심에 모셔 들이고 예수님을 위하여 살기 시작할 때 모든 것은 정돈되고 질서를 잡게 될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내가 선택하고 걸어가는 길들은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것은 그와 동행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썩을 양식을 위해 일했다면, 이제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해 일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위해 사십시오. 내가 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을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묵묵하게 그 길을 걸어가십시오. 인내하면서 좀 더 참아내면서 기쁨으로 그 길을 걸어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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