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11-15 14:38

요한복음 강해 35.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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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35.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2016.11.13

 

요한복음 7:53-8:11
53.[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1.예수는 감람 산으로 가시니라
2.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3.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4.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5.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6.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7.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8.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9.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10.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먼저 오늘 본문을 유심히 보신 분들은 괄호로 묶여 있음을 발견하실 것입니다. 왜 괄호로 묶여 있는가? 그것은 본문의 내용이 원래 성경의 원본에는 없었던 것으로 사료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후대에 삽입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괄호안의 내용이 없으면 오히려 글의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7장 52절에서 8장 12절로 곧장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하지 않기도 합니다. 그래도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이 본문을 설교하는 이유는 첫 번째로 이 내용이 비록 성경원문에는 없었을 지라도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내용을 설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중 어거스틴이나 칼빈이 해당됩니다. 두 번째는 이 내용이 이곳에 삽입됨으로 인해서 7장과 8장의 내용을 하나의 그림으로 잘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한복음은 굉장히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내용이 왜 이곳에 삽입되었을까 하는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을 이해하고 또한 요한복음 전체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7장 53절과 8장 1절을 보시면,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예수는 감람산으로 가시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이 이제 저녁이 되어 다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감람산으로 가셨습니다. 왜 감람산으로 가셨을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머물 거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8: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갈릴리에서부터 예루살렘에 올라오셨지만 편하게 머무실 수 있는 거처가 없었던 것입니다. 초막절 행사가 8일 동안 진행이 되니까 그 긴 시간 동안 머무실 곳이 없이 저녁이면 감람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과 교제하고 기도하며 또 피곤한 육신을 잠시 쉬셨을 것입니다. 인간의 육신으로 얼마나 피곤하셨을까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리고 2절에 보니까 아침에 성전으로 다시 들어오셨습니다. “다시 들어오셨다는”것은 이러한 일들이 반복적으로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저녁에는 감람산으로 가셨고 아침이 되면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셔서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2절을 한번 잘 보시고 그 장면을 연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들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그들을 가르치시더니”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랬더니 백성들이 예수님께로 다 나옵니다. 예수님은 앉으시고 이제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제사장이나 랍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칠 때 보여주었던 모습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백성이라는 표현은 독특합니다. 그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을 무리라고 표현한 것과는 다릅니다(7:10, 40). 왜 백성이라고 했을까?

그것은 이사야 2장 3절의 말씀을 연상케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2: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이 글을 쓰고 있는 요한은 바로 이 구절을 염두해 둔 것입니다. 그래서 ‘무리’라는 표현대신 ‘백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배경으로 하여 본문의 장면을 보면 여호와의 산 예루살렘에서 그것도 하나님의 전인 성전에서 그의 길을 백성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었던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성전이라는 장소에 대한 것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이 성전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가 하면,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가 설교를 하고 마침내 돌아 맞아 죽게 되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당시 설교를 듣고 있었던 사람들이 굉장히 분노하고 흥분한 모습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스데반이 하나님은 너희가 손으로 지은 성전에 계시지 않는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는 유일한 곳이기에 그곳에 가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생명처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니까 굉장히 분노한 것입니다. 그만큼 성전을 소중히 여겼던 것입니다.

 

당시 성전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는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성전에 들어가면 제단이 있습니다. 이 제단에 자신이 가지고 온 짐승들 죽이고 태우게 됩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송아지나 염소 같은 가축을 가지고 오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비둘기를 드리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 자신의 죄가 사함 받아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성전에서 제사를 통해 자신들의 죄들이 용서받았다고 여겨지면 이제 그들은 그곳에서 제사장이나 랍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기뻐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성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엄숙하고 거룩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한 무리 때가 들이닥칩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감정이 격한 상태로 몹시 흥분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한 여인을 질질 끌고 와서는 사람들 가운데 세웠습니다. 아마도 그곳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적잖이 놀랐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저 여인이 누구기에 마치 개처럼 이곳에 끌려오게 되었는가?
4절에 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이 여자는 간음죄로 걸린 현장 범이었습니다. “현장에서”라는 말은 전문적인 법률용어입니다. 만일 현장이 아니라면 두세 사람의 증인이 필요한데 간음의 경우는 증인을 세우기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매우 당당한 태도며 또 잡혀온 여인이 아무런 이의 제기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간음 현장에서 잡혀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왜 그녀를 끌고 예수께로 왔을까요? 이상한 것은 여인만 있고 간음한 남성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간음이라는 것은 현장에서 발각하기가 어려운데 어떻게 해서 붙잡혀 온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군가 파놓은 함정에 이 여인이 걸린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추측컨대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미리 모종의 음모가 꾸며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음모 중에 하나가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 사람들에게 세우고 과연 예수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5절에 보면 여인을 끌고 왔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이렇게 묻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에 능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보면 간음한 죄는 죽음을 면치 못합니다(레20:10, 22:22). 그러나 돌로 쳐 죽이라는 명령은 없습니다. 돌로 쳐 죽일 수 있는 경우는 신명기 22장 23-24에서 여자가 약혼한 경우입니다. 이때 간음한 두 사람을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돌로 쳐 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는 이미 약혼한 여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돌로 쳐 죽이면 될 것을 왜 예수님께로 끌고 온 것일까요? 그것은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한 계략이었습니다.
그래서 6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말함은 고발할 조건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려고 머리를 맞대고 계략을 꾸몄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이 장면인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예수님을 굉장히 난처한 상황으로 몰고 간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모세의 율법대로 돌로 쳐 죽이라고 하면 그것은 로마에 반역하는 자로 몰릴 수 있는 여지가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식민지 였기 때문에 로마의 법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만일 로마의 허락 없이 사형집행을 하게 되면 그것을 빌미로 고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예수님의 말씀이나 행보는 은혜와 사랑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돌로 쳐 죽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동을 위선이라고 몰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그녀를 용서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안 그래도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자들에게 있어 이것은 명백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봐라, 이 자는 율법을 범하고 어지럽히는 자라고 하여 예수를 고소할 수 있는 명분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안 되는 아주 난처한 상황인 것입니다. 아마도 이 계략을 생각해낸 자들은 무릎을 쳤을 것입니다. 예수가 빠져 나갈 구멍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했을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실까?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몸을 굽히시더니 땅에 무언가를 쓰기 시작하십니다. 과연 무엇을 쓰셨을까? 여러 가지 의견들이 있지만 대부분 추측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무엇을 쓰셨는지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긴장된 상황가운데 예수님은 평정심을 잃지 않았고 그들에게 끌려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주도해 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빨리 예수님의 허물을 들추어내고 발견하려고 조바심을 내고 있었지만 예수님은 침착하게 그 상황을 이끌어 가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언가를 땅에 쓰셨습니다. 저들은 예수를 향하여 답을 내라고 재촉하기에 이릅니다.
7절에 보니까 “그들이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계속해서 재촉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동안의 시간이 흘렀을까요? 땅에 쓰시던 것을 멈추시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잘 보시면, 먼저는 모세의 율법에 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돌로 치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죄가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먼저 치라는 것은 율법에 의하면 그 죄를 발견한 증인이 먼저 돌로 치게 되어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이 여인이 간음한 현장을 처음 발각한 증인들이 있다면 먼저 돌로 치라는 것입니다. 대신 죄가 없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상식적으로도 너무나 합당한 말씀인 것입니다. 간음한 여자에게 돌을 들어 칠 수 있는 사람은 간음한 일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돌을 들어 친다면 그것은 나또한 돌에 맞아 죽어야 된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그들은 에수님의 이와같은 말씀이 떨어지자 자신들의 모습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는 과연 죄가 없는가?

 

원래 그들의 정죄의 칼날은 간음한 여인뿐만 아니라 예수를 향하고 있었고 그들의 시선 또한 그랬던 것입니다. 그런데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말씀 앞에 그들의 정죄의 칼날과 시선은 자신에게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게 된 것입니다. 나는 과연 간음한 사실이 있는가? 나는 과연 여인을 향해 돌을 던질 만큼 의로운가?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우리의 심령을 꿰뚫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에서 간음한 그 행위만 간음이 아니라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도
간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복음 5:27-28). 사람들은 행동으로 나타난 것만 죄로 여기죠.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마음과 생각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음욕도 동일하게 간음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 둘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표현되었거나 표현되지 않았거나 입니다. 물론 행동으로 나타났을 때 그 죄의 파괴력은 강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각에서 간음이나 음욕이나 그것은 동일한 간음죄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는 말씀 앞에 사람들은 자신들도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한명씩 자리를 뜨기 시작합니다.


9절을 보시면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그 자리에서 흥분해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다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과 그 여인만이 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땅에 쓰시던 행동을 멈추시고는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는 그 여인에게 다가가십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 여인의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그 수치심과 자괴감 ,뿐만 아니라 그 상처받고 찢겨진 마음으로 벌벌 떨며 움츠려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11절입니다.
“10.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먼저 그녀의 상한 마음을 어루만지십니다.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는 말씀은 너를 정죄할 만큼 의로운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확인 시켜 주는 것입니다. 너를 정죄하려고 했던 그 모든 사람들도 너와 똑같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죄를 허용하신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죄는 간음죄를 의미합니다. 다시는 간음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장면을 통해서 아주 중요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죄인을 심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인을 용서하시고 다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이 지금 성전이라는 장소적 배경속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우리의 죄가 짐승의 제사를 통해 사함을 받아 하나님께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그 장소에 예수께서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요한복음 2장에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이 진짜 성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위해 모형으로 주어졌던 것입니다. 여기 건물을 세우는 것을 보니까 거푸집을 먼저 세웁니다. 그리고 그 안에 콘크리트를 넣습니다. 콘크리트가 다 마르면 거푸집을 해체합니다. 더 이상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성전을 허락하신 것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오시면 해체되고 사라질 것입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가 오셨음으로 이제 성전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 성전에 참 성전이신 예수께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앞에 섰던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들은 것입니다. 바로 그 말씀은 에스겔의 환상처럼 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이었기에 생명을 주는 생수였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물이 흘러나가 죽어있는 생명을 살려낸다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앞에 섰던 그 간음한 여인, 율법에 의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그 여인, 그는 죽음의 상태에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참 성전이신 예수를 통해 정죄받지 않고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전의 두가지 기능을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여, 우리의 죄를 속하는 곳입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길이며 우리의 죄를 속하실 유일한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간음한 여인은 누구입니까? 바로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들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우리들은 간음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돈과 명예와 쾌락을 사랑했던 우리들이 간음한 자들입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율법을 들이대면 우리는 모두 죽어야 마땅한 자들입니다. 지옥형벌을 받는 다고 하여도 아무말 할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우리가 어떻게 용서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참 성전이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사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속하는 화목제물이 되사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던 우리를 찾아 오사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죄가 아무리 주홍 같을 지라도 예수님은 흰 눈처럼 깨끗하게 하십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아오면서 지었던 수많은 죄들과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수치스러웠던 죄들 때문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에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가서 죄를 짖지 말라”

 

참 성전이신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금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출발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습니다. 더 이상 과거의 죄에 얽매이지도 않습니다.
로마서 8장
“1.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로마서 8장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