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4. 선한목자/ 2017.1.29
요한복음 10:1-5
1.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2.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3.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4.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남편이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양입니다. 이러한 표현들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친밀한 관계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우리 주변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비유들을 통하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중에 목자와 양의 관계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 뿐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도 매우 친숙하게 다가왔습니다. 그것은 유목생활에 익숙한 그들에게 있어서 일상적으로 경험했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족장들 대다수가 유목민들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그리고 다윗 등 그들의 직업이 목축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의 백성들과의 관계를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유목민들이 아니어서 목자와 양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합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님 당시의 유목문화에 대한 배경설명이 필요합니다.
이스라엘 북쪽 지역은 비교적 비옥한 땅이어서 양을 키우기에 적합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양을 키웠습니다. 낮에는 목자들이 양을 데리고 풀을 먹이려 이동하게 됩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우리로 돌아오게 되는데 이때 양들은 각 마을에서 준비한 공동우리로 들어가게 됩니다. 흙벽돌로 높게 쌓은 우리라고 합니다. 그곳에 마을의 여러 주인들이 소유한 양들이 함께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우리에는 들어가는 문이 있고 그 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게 됩니다. 이 문지기는 당연이 양의 주인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양들은 문지기의 보호아래 밤을 보내게 됩니다.
아침이 되면 양주인들이 공동우리에 오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문지기가 진짜 주인인지를 확인하고 들여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목자는 자신들의 양을 찾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섞여있는 양들중에 어떻게 자기양을 알게 되는가 하면, 먼저는 주인이 자신의 양을 알아봅니다. 비슷하게 생긴 것 같지만 자신의 양을 알아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점박이, 흰둥이, 느림보 등. 그러면 양들도 자신의 주인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따라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목자는 지팡이를 들고 앞장서게 되고 양들은 그 뒤를 졸졸졸 따라서 목자가 인도하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을 염두해 두고 오늘 말씀을 보시면 이해가 되어질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첫 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양을 부르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3절에 보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문지기는 목자를 확인하고 문을 열어주면 목자는 우리에 들어가 자신의 양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양들을 우리 밖으로 인도하여 먹이가 있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림은 우리들의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가 어떠한 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분이 우리의 이름을 아시고 불러내신다는 것입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여리고성에 들어가셨을 때 수 많은 군중들이 있었지만, 그 가운데 돌무화과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에게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눅19:5)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의 이름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을 부르실 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7-48
47.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이르시되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48.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오기 전에 예수님은 이미 그를 알았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이렇게 나를 아시고 찾아오시고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14절에도 보면,
“나는 선한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목자 되신 주님은 자신의 양을 압니다. 세상이라는 혼탁한 우리에서 양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어느 날 목자의 음성이 들립니다. “지형아! 나와라” “효철아 나와라 나와 함께 가자”
우리를 아시는 주님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고 죄악 된 세상으로부터 불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여기 있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주님을 찾은 것 같고 그 분앞에 나온 것 같지만, 주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오셨고 우리의 이름을 부르신 것입니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우리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여러분! 정말 진솔하게 여러분 자신을 누군가에게 다 내보인 적이 있습니까? 나의 아픔과 절망과 외로움을 누군가에게 솔직하게 말해본적 있습니까?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죠? 그만큼 나를 이해하고 받아줄 사람이 없기 때문 아닌가요?
그런데 목자 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다 아십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의 절망과 고독을 아시고,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죄악된 나의 과거도 아십니다. 사람들이라면 손가락질하고 떠나갔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찾아오신 분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해하신다는 것이고, 받아주신다는 것이고,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내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속에서 들려오는 이러저러한 소리들이 많지만, 가장 먼저 들어야 될 소리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라디오는 세상에 떠 다니는 수많은 주파수 중에 내가 원하는 소리를 맞추어 들을 수 있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파수를 예수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세상에 많은 소리들이 있습니다. 성공을 하려면 좋은 대학에 가야한다. 결혼을 하려면 최소한 얼마는 있어야 한다. 최근에 들은 말 중에 여러분을 절망케 했던 소리는 무엇이었나요?
세상의 소리를 자꾸만 들으면 절망하게 되고 두려워집니다. 그래서 인터넷이나 TV를 절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눈을 흐리게 하고 위축시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 소망이 생깁니다. 두려움이 사라지죠. 들으면 들을수록 우리 마음에 평안과 기쁨이 생깁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님이 음성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옵니다. 그래서 올 한해 우리가 힘써야 될 것 중에 하나가 홀로 말씀 앞에 서는 것입니다. 분주하고 바쁘지만 시간을 내어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통해 주님께 많은 말씀을 올려드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이러한 자세로 말씀앞에 서야 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여러분 심령가운데 기록된 말씀을 통해 말씀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 힘이요 능력이 될 것입니다.
두 번째, 양들도 자기 목자의 음성을 알고 목자를 따라갑니다.
4절을 보시면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예수님 당시 목자들이 양을 인도하는 방식은 독특했습니다. 뉴질랜드에서 양을 치는 것을 보면, 목자가 훈련된 개에게 호각을 불어서 양을 몰아갑니다. 뒤에서 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지역은 목자가 앞서 가면 양이 뒤를 따르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 목자가 앞서가면 양들이 따라온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아주 좋은 그림입니다. 우리는 간혹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하면 죽어서 가는 어떤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삶입니다. 이것을 구원 또는 영생이라고도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삶은 언제부터 시작이 되는가? 우리를 부르시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라가면서 그 나라의 삶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추구하고 따라갔던 삶은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가치들, 그것은 결국 돈과 명예와 쾌락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그것을 따라갔습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우리가 깨닫고 경험한 것은 공허함이었고 두려움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기 시작하면서부터 주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과 감사가 경험되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시편 23편에 보면,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삶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러분! 이 표현이 얼마나 기가막힌가 하면, ‘풍족합니다’라는 표현이 아닙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 아니죠.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자신의 소유가 많아도 부족함을 느끼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작은 것에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은 풍족한 사람입니다. 결핍이 없는 것입니다. 만족하기에 헛된 수고를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의 목자가 되시면, 부족함이 없어집니다.
소유가 많아져서가 아닙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없는 것을 보지 않고 있는 것에 만족하며 감사해 합니다.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최상의 가치,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고 그분을 따라가고 함께 하기에 부럽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이 되길 기도합니다.
목자되신 주님께서는 그의 양들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주시고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분의 영광을 위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행복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는 삶이 가장 행복할 것 같죠. 그러나 그 자리에 가면 허망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일시적이고 잠깐 있다가 없어질 안개와 같은 것을 쫒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게 될 때 우리 가운데 세상이 주지 못하는 기쁨과 만족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위해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거닐기도 합니다. 왜 선한 목자께서 이러한 곳으로 나를 인도하시는가? 예수 믿으면 만사형통해야 되는데.... 사업도 잘되고 자녀들도 형통하고 질병도 없고...그런데 왜 나에게는 이러한 어려움과 아픔들이 계속되는가? 당황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목자되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의 여정에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는 있습니다. 그것이 꼭 내 잘못 때문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주님께서 그곳으로 나를 인도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저도 뉴질랜드에 살 때 이런 광경을 자주 보았는데, 양들이 푸른 초장에만 있지 않고 비탈진 산에 아주 위험하게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발을 조금만 헛디디면 바로 추락할 수 있는 그런 위험한 곳에 있는 양들을 본적이 있습니다. 그러한 곳에 먹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는 면역력을 키울 수 있는 영양이 풍부한 식물들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목자들이 그곳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탈진 산길을 가면서 목자와 양 사이에 친밀함과 신뢰가 생긴다고 합니다. 양이 철저하게 목자만을 의지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삶에 비탈길을 걸을 때가 있습니다. 한발만 잘못디디면 내 인생이 추락해 버리는 위태한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내 곁에서 강한 손으로 나를 붙잡고 계시는 주님의 손길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나를 강하게 하시고 담대케 하시는 주님의 연단과 훈련을 받게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편 23:4)
그 결과 우리에게 생기는 것이 자신감입니다.
주님은 신실하신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은 실수가 없으신 완전하신 분이라는 믿음의 확신입니다. 그 신실하심에 대한 신뢰가 있을 때,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용기와 담대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목자되신 주님을 따라가는 그의 백성들의 삶인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삶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따라가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것은 순종입니다.
이것은 나의 한 걸음을 주님이 원하는 길로 순종하여 따라가는 것입니다.
한 걸음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을 위해 거대한 비전을 세우고 나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도 지금 한 걸음부터 시작됩니다. 그 한걸음 한걸음이 모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은 매 순간 닥쳐오는 선택의 순간에 결정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의 길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길이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때 내 생각과 의지를 따라갈 것인지 아니면 주님을 따라갈 것인지를 결단해야 합니다.
중요한 선택들이 많이 있습니다.
결혼할 때 어떤 배우자를 선택할 것인지, 직업을 선택할 때 어떤 직장을 선택할 것인지로 부 터 시작하여 이 물건을 사야할지 말아야 할지 등의 작은 선택에 이르기 까지...
그때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당장에 나에게 유익되지 않더라도 주님이 원하시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것이 늘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습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것일 때도 있고, 경제적인 손해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이 가장 안전한 길이고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시는 주님, 우리의 모든 것을 잘 아시기에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는 목자이십니다. 그분을 신뢰하시고 한 걸음씩 따라가는 복된 인생이 되시길 주님이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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