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9. 인간의 믿음의 한계와 하나님의 은혜 2/2017.3.5
요한복음 11:17-44
17.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18.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19.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20.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21.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22.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23.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24.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7.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28.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29.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30.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31.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32.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33.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34.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35.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36.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37.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38.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39.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40.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41.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42.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43.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44.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사건이 어떤 의미인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삶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을 위해 경영되고 섭리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시간표 안에서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성도들의 삶에 보여지고 체험되는 것은 믿음을 통해서 였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들 속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며 푸르고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시편19:1)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눈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우리 삶의 여러 가지 일들이 해석이 되어 집니다. 왜 내 삶에 그러한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믿음의 렌지를 끼고 보면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당장에는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감정의 소용돌이가 가라앉고 하나님 앞에서 잠잠해 질 때 비로소 이해되어지는 일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합리화시키는 것도 아니고 모든 것이 잘 될 거야 하는 긍정적 사고도 아닙니다. 나 중심의 사고와 시각에서 벗어나 하나님 중심으로 생각할 때 결국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과정이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그것을 깨달게 되면 감사함으로 그 상황을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장은 나사로의 죽음과 그의 남매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그들을 둘러선 무리들의 반응을 보여주면서, 우리 삶에 일어나는 죽음이라는 가장 참혹한 결과 앞에서 우리가 보여야 할 반응이 무엇인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최선을 다해 보인 믿음의 반응일지라도 그것이 주님 앞에서는 얼마나 부족한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는 그 믿음조차도 하나님 편에서 우리를 위해 주시는 선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예수님에게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면 오늘을 이 사건을 대하는 사람들의 믿음의 측면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먼저는 마르다와 예수님의 만남의 장면을 살펴보면서 마르다의 믿음이 어떠한가를 보겠습니다.
성경저자는 이 만남 전에 먼저 어떤 정보들을 제공해 줍니다.
첫 번째가 나사로가 무덤에 나흘 동안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17절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유대적 관습에 의하면 사람이 죽으면 곧바로 장사 지내게 되는데 이때 영혼은 삼일동안 죽은 몸에 머물다 그 후에 완전히 떠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나흘동안 무덤에 있었다는 것은 나사로가 완전히 죽은 상태라는 것을 확증해 줍니다
두 번째는 베다니와 예루살렘의 거리에 대한 정보입니다. 18절입니다.
오리쯤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리는 3Km지만 지도상으로 정확히 2.8Km 정도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감람산을 넘게 되면 바로 나오는 도시가 베다니입니다. 매우 가까운 위치입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종교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보는 앞으로 일어날 일이 긴장감속에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7,8절을 보시면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류합니다.
“7.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8.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세 번째 정보는 많은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위로하기 위해 와 있다는 것입니다.
19절을 보시면,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이 사실은 나사로가 유대인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순식간에 모인 것입니다. 아마도 심각한 질병으로 인한 갑작스런 죽음이었고 젊은 나이었음을 감안하면 많은 위로가 필요했을 것이라 생각한 것입니다.
이러한 정보들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공개적이었고,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공적인 사역의 차원에서 일어난 일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은 신화적인 전설이 아니라 실제로 요한이 이 글을 쓰고 있을 당시에도 여전히 그 목격자들이 생존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목격했던 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했던 유대인들 중에서도 있었음을 말함으로 부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 이렇게 우리가 당시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시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듣게 됩니다. 마르다는 마리아에 비해 활동적인 여성이었습니다.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여인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기다리지 못하고 예수님께로 향합니다.
20절에 보시면,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이하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님을 만나자 첫 번째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21절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이 말속에서 마르다가 얼마나 예수님을 애타게 기다렸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다면 죽지 않았겠지만 오시지 않으므로 결국 죽게 되었다는 원망이 섞여있습니다. “예수님 왜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결국 사랑하는 저의 오라버니가 죽었습니다.” 하는 원망과 탄식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2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언뜻 보면 마르다가 예수님께서 지금이라도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믿는 듯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39절에 보시면 마르다는 나사로가 살아날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말한 이제라도 예수께서 무엇을 하실 수 있다는 말은 나사로의 회복에 대한 강렬한 소망을 표출한 것일 뿐 살아날 것에 대한 참다운 믿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고 했을 때, 마르다의 대답을 보시면 잘 알 수 잇습니다.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지막 부활 때는 다시 살 것을 믿지만 그것이 현재에 실제로 일어날 것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25-26절을 보십시오.
“25.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마르다는 죽음이후에 부활이 있을 것임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음 이후의 부활이 아니라 그 부활이 현재에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그랬더니 마르다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이르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완벽한 신앙고백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이 신앙고백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고백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나사로가 부활할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는 그리스시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예수님은 창조주이시며 전능하신 분이라는 고백과 다름 아닙니다. 따라서 이 믿음이 실제라면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마르다의 믿음이었고 인간이 가진 믿음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고백과 우리의 실제 믿음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화)줄타기 곡예사 블론딘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어떻게 확증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 정말로 내가 가진 믿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임을 어떻게 증명해 보이시겠습니까? 사실 그것은 우리가 절망적인 순간을 마주하기 전까지는 잘 모릅니다. 당장에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을 것 같고 내 목에 칼이 들어온다 할지라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상황에 서보지 않고서는 우리의 믿음의 실체를 모릅니다.
누가복음 17:6절을 보시면
“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그만큼 우리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사실 저도 저의 믿음을 잘 모릅니다. 정말 내 목에 칼이 들어오는 순간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신실하게 고백할 수 있을까 장담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마르다의 이러한 고백과 실제가 다른 믿음 -현실에서 역사하는 믿음이 아니라 –은 결국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것이 우리가 발휘하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할 때도 그 믿음의 나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이 은혜로 말미암아 나에게 주신 믿음 때문에 구원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사로를 생각해 보십시오. 나사로가 살아난 것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인가요? 죽은자가 어떻게 믿음을 발휘합니까? 생명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일방적으로 그에게 임한 것입니다. 그는 요구한 적도 없습니다. 죽어있던 자가 깨어난 것입니다. 깨어난 보니 자기가 죽었다는 것을 알았고 깨어나 보니 예수님께서 자신을 살리신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믿음으로 된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발휘한 믿음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내 믿음을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질 때 그 믿음 때문에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우리가 죽음에서 살아났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살아났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살아났기 때문에 내가 죄인임을 안 것이고, 살아났기 때문에 회개하게 된 것입니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나사로가 어떻게 살아났습니까?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부르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그러자 그가 살아났습니다. 그가 의롭게 된 것입니다. 그가 영화롭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정한 자들을 부르십니다.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하나님의 저항할 수 없는 은혜가 택정된 자들에게 무조건적으로 임한 것입니다. 이것을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로마서 8:31절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셨다면 누가 항변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이것을 목격한 유대인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유대인들은 이 사건을 처음부터 목격했습니다.
마르다로부터 예수님께서 찾으신다는 말을 들은 마리아는 급히 뛰어나갑니다. 사람들은 그녀가 너무 슬픈 나머지 무덤에 가서 곡하려는 줄 알고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함께 따라 나섭니다. 그러나 그녀가 달려간 곳은 무덤이 아니라 예수님 앞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자 그녀는 마르다와 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님께서는 그녀가 우는 것과 함께 온 사람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는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말합니다.
33절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여기서 비통히 여겼다는 것의 원어적 의미는 분노를 느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 임한 죄의 권세, 그것의 가장 강력한 형태가 죽음인데 죄의 권세인 죽음이 그 사랑하는 자들이게 임한 것에 대한 분노였던 것입니다.
38절에도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분노가 또 다시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는 죄의 권세 가운데 억눌린 자들, 사망의 고통에 눌린 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바로 우리의 이름을 불러내시는 것입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마치 양의 우리에 섞여 있는 자들에게 목자의 음성이 들리듯 사망의 권세아래 있던 자들에게 주님의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생명이 임합니다.
나사로가 죽음의 권세를 깨고 살아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유대인들은 목격했습니다. 죽은지 사흘이나 되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믿음을 갖게 된 자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습니다.
우리 생각에는 죽은 자가 살아난 것을 보았다면 모두가 예수님을 믿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도 바로 기독교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진리입니다. 그것은 죽으자가 살아나는 것을 본다고 믿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풍족하게 살다가 죽었고 나사로는 비참한 삶을 살다가 죽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죽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나사로는 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부자가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면서 이렇게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간청합니다.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28절)
그랬더니 아브라함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29.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그러자 부자가 말합니다.
30.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그랬더니 아브라함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31.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여러분! 믿음은 그렇게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세와 선지자는 성경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입니다. 즉 믿음이라는 것은 반드시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오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을 체험한다고 오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죽은 자가 살아나 증거 할지라도 그것이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말씀에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가 믿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내가 발휘한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마침내 우리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것입니다. 그 일을 하나님이 지금 우리안에서 역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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