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51. 거룩한 낭비
요한복음 12:1-8
1.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 곳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라
2.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마르다는 일을 하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3.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4.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7.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를 가만 두어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
8.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우리가 지난 주 까지 나사로의 부활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을 통해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7개의 표적사건이 마무리 된 것입니다. 마지막 표적을 통하여 예수는 죽음에서 부활하신 분으로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부활시켜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한편 예수를 믿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지난 시간 나누었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나사로의 부활을 보고 믿었지만 그들의 믿음은 가짜로 판명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길은 자기 부인과 십자가이며, 그것은 예수님께서 참 인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보여주신 믿음의 길을 통해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환호와 열광에 휘둘리지 않으시고 묵묵하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는 것을 봅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지난 시간에 나누었던 말씀과 연속선상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명의 상반된 인물이 등장합니다. 마리아와 가롯유다입니다. 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가져야 할 바른 신앙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후 예수님은 에브라임이라는 동네로 가서 제자들과 머물러 계셨습니다. 이유는 예루살렘 산헤드린 공회에서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마침내 현상수배가 된 것입니다.
11장 53절에 보면,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4.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예수님께서 에브라임으로 피신하신 이유에 대하여 밝히고 있습니다.
또 57절에 보면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신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때는 유월절이 가까워 오고 있었습니다. 이 명절은 유대인에게 있어 가장 큰 명절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방방 곳곳에서 이 명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게 됩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먼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예루살렘으로의 순례의 길을 출발했을 시기입니다. 이제 서서히 명절의 분위기가 시작되는 시점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멀지않은 베다니 마을을 다시 찾으셨습니다. 여전히 긴장된 분위기였지만 예수님은 위축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시간표를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요란하여도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완벽한 시간표 안에서 이루어지기에 조급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곳을 다시 찾으신 이유는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있었던 나사로의 부활 사건으로 인해 그의 가족이 예수님께 감사하는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2절을 보시면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새”.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곳은 나사로의 집은 아닙니다. 이 사건을 다루고 있는 다른 복음서를 보면 ‘나병환자 시몬의 집’(막14:3)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나사로의 가족들이 다 모였습니다. 아마도 평소 시몬과 친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감사의 잔치에 예수님은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셨을 것입니다.
주님은 잔치를 좋아하셨습니다. 막11:19에 보면 예수님께서 받으셨던 비난 중에 하나가 이것입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예수님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시기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하기도 하셨습니다(눅14:16).
마태복음 22:2 “천국은 마치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으니”
마침내 이루어질 우리의 구원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계시록 19:9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기록하라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고 또 내게 말하되 이것은 하나님의 참되신 말씀이라 하기로 ”
요한복음서의 첫 번째 표적 사건도 보면 가나에서 열린 혼인잔치였습니다.
예수님은 잔치를 즐기셨습니다. 잔치는 즐겁습니다. 풍성합니다. 웃음과 흥겨움과 노래와 춤이 어우러져 모두가 행복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잔치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그런 곳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은 자들이 모여 함께 축제를 즐기는 곳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을 위한 잔치였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흔쾌하게 그의 제자들과 함께 그 자리에 참여하셨을 것입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마르다는 음식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사로는 예수님과 함께 자리에 앉아 있었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 난 후인지 아니면 식전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과 나사로 그리고 제자들과 이웃들은 기쁨의 잔치를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며칠 후 있을 자신의 죽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이 잔치를 즐기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날이 유월절 전날이니까 닷새 후면 그 참혹한 십자가의 형벌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불안해하거나 초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예수님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라면 비록 자신이 죽는 길이라 할지라도 담담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에 주어진 잔치를 기쁨으로 맞이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편23편의 말씀을 떠올리게 됩니다.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이때였습니다. 마리아가 향유가 들어있는 옥합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머리털로 발을 닦기 시작합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사람들은 순간 당황했을 것입니다. 마르다는 하던 일을 멈추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나사로를 비롯한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마리아의 이러한 행동에 아무말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입니다. 그 향유는 자신의 결혼을 위해 혼수품으로 모아둔 것이었을 것입니다. 나드 향유는 인도의 나드라는 식물의 뿌리와 줄기에서 채취한 것으로 당시에 굉장히 귀하고 값비싼 향유에 해당했습니다. 양이 꽤나 많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머리에도 부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 요한은 발에 부어진 것에 집중합니다. 한 순간에 예수님의 발에 부은 것입니다. 순간 그곳은 향유 냄새로 진동했을 것입니다.
저는 설교를 준비하면서 마르다의 모습을 그려보았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이 장면을 어떻게 그려보시겠습니까?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떻게 그리시겠습니까? 또는 영상으로 만들 수도 있겠죠.
모든 사물과 사람들은 정지되었습니다. 사람들의 행동도 웃음과 대화도 일하는 마르다의 손길도 멈추었습니다. 다른 것들은 희미하지만 오직 마리아와 예수님은 선명합니다. 마리아가 옥합을 깨뜨려 예수의 발에 붓고 있습니다. 슬로우비디오로 그녀의 행동은 조심스럽게 이어집니다. 자신의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정성껏 닦아드리고 있습니다. 굉장히 엄숙하고 경이롭게 보입니다.
여러분! 그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그녀의 최선의 예배였던 것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매우 사모했던 여성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녀의 집에 방문했을 때 마르다는 분주히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했지만 마리아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눅10:38 “주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이 오신다는 말을 듣고 뛰어나간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립니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그리고 지금 그녀는 예수님의 발을 닦아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의 말씀을 사모했고 주님을 사랑했던 그녀, 예수님께서 자신의 오빠를 죽음에서 살려내신 이후에는 예수님을 더욱 깊이 사랑했을 것이며 더 깊은 헌신을 드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감사함을 어떻게든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소유한 것 중 가장 가치있는 것을 드려 주님을 경배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발을 닦았던 것은 주인을 대하는 종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인의 머리털로 발을 닦았다는 것은 예수님을 가장 존귀한 분으로 대하는 그녀의 표현방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그 뜨거운 사랑과 경배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반면 가롯유다는 그녀의 이러한 행동을 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5절에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다른 복음서에 보면 제자들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아마도 가롯유다가 대표하여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마26:7 “제자들이 보고 분개하여 이르되 무슨 의도로 이것을 허비하느냐”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의 1년치 임금에 해당됩니다.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1데나리온이니까 안식일을 제외하면 1년치 임금인 삼백 데나리온이 되는 것입니다. 상당히 값비싼 향유를 순간에 허비하였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 정도의 가치라면 팔아서 가난한 자들을 도울 수 있었겠다는 판단입니다.
가롯유다가 가난한 자들의 형편을 살피는 것 같으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6절에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우리가 지난주에 자신의 유익을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가롯유다가 바로 그런 자였습니다. 그는 제자들 중에 회계업무를 맡았습니다. 회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뢰가 있어야 하고 믿을 만하며 계획성이 있고 치밀함이 있어야 합니다. 가롯유다가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돈을 관리하고 만지면서 탐욕이 생겼을 것입니다. 그리고 공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작은 돈이었지만 점점 그 액수가 불어났을 것이 확실합니다. 결국 그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은30에 팔게 됩니다. 그러한 그의 시각에 향유를 팔아 자신의 돈궤에 들어오면 얼마를 횡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돈을 목적 삼아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목사들 중에도 있습니다. 그것처럼 추악한 것이 없습니다. 예수를 팔아 돈을 버는 자들, 축복기도, 치유기도에 수백만원 수천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자들에게 속지 마십시오. 가롯유다가 처음부터 돈 때문에 예수님을 따랐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돈을 만지기 시작하면서 그의 마음은 돈을 향했던 것입니다. 처음에 작은 액수였지만 점점 양심이 무뎌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신앙을 보면서
결국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은 우리의 가치관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 가치관이 변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의 모습이나 신앙의 모습은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이 땅의 일시적인 가치에 우리의 노력과 열정과 시간을 허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생명을 얻게 되니까 눈이 열려 정말로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집에서 쉬거나 놀러가는 것 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더 가치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선택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라고 하지만 여전히 세상적인 가치에 함몰되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들의 가롯유다처럼 모든 것을 물질적 가치와 연관시킵니다. 삶의 목적과 방향에 돈이 있습니다. 그러니 선택의 순간에 돈을 중심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만큼의 경제적 이득을 주는 가를 살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돈을 따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상위가치에 돈이 있고 예수님은 그 밑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위해서 예수님도 포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주일학교 때 예수님을 믿었던 아이들이 고등학교 대학교에 들어가면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까? 신실하게 청년부 생활을 했던 형제자매들이 직장에 들어가면 교회를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들이 세상이 제시하는 돈의 위력 앞에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봅니다. 그것은 어릴적 부터 그리스도인으로 가져야 할 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부목사로 사역할 때 심방했던 권사님 가정은 참으로 신실한 믿음의 가족이었습니다. 권사님은 자녀가 고3이 되자, 일 년 동안은 교회를 다니지 말고 공부에 전념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자녀가 교회의 회장을 할 만큼 믿음 좋은 아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녀가 명문대학에 진학했습니다. 그리고 그 길로 지금까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며 그것이 너무 후회된다면서 한탄하듯 울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지, 성공적인 결과 보다는 과정 속에서 성실하고 정직한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사람을 그가 가지 소유로 판단하지 않고 그의 존재자체로 귀히 여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치지 못했고 배우지 못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에 대하여 가르치지 못했고 배우지 못한 것입니다.
가롯유다의 가치관은 세상 사람들의 가진 가치관을 대표합니다. 그들이 볼 때 한순간에 삼백 데나리온의 향유를 부은 것은 낭비이며 쓸모없는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판단에 그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눈에는 주일에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은 시간낭비이며,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금은 돈낭비이며, 하나님을 향한 기도는 무의미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얼마나 귀하고 가치있는 일인가를 압니다.
다시 마리아에게로 돌아와 봅시다.
마리아가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주님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들이는 물질과 시간은 결코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위하여 준비한 100송이 장미꽃이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신 주님 앞에 드려진 그 어떤 값비싼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낭비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실 마리아는 그 사랑 때문에 그리고 주님이 베풀어주신 그 은혜에 대한 감격으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께서 미리 예정하신 일이었습니다. 이것은 두가지 차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께 기름을 부어 왕으로 제사장으로 세운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기름을 붓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왕이나 제사장 선지자가 등극할 때 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하는 사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가가지 상징적 의미가 하나로 모아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죽으심이 하나님의 나라의 왕과 제사장으로서 통치권을 얻으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전혀 그러한 것을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았지만 사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되어진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 귀한 일에 그녀가 쓰임받고 있는 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가 되신 예수님께 기름을 붓는 일에 그녀가 쓰임 받으리라고는 결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영광스런 일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 앞에 드린 사랑과 헌신의 행위들이 하나님 나라에서 얼마나 위대하게 작동하는지 아직 우리는 모릅니다. 저희 할아버지께서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것이 저희 아기 희수에게 믿음으로 연결되고 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그리고 교회를 위해 드려졌던 기도와 눈물과 물질들, 나에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던 부모님이 보여주신 그 때의 그 헌신들, 경제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 드려진 헌금, 그때는 그것이 낭비라고 생각했고 무능함이라고 여겨졌던 그 행위들이, 이제 돌이켜 보면 교회가 세워졌고, 복음이 전파되었으며,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곳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드려진 것들을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그것은 씨앗처럼 심기어져 자라나 마침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위대하게 쓰일 것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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