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04-11 14:58

요한복음 강해 54. 버려두시는 하나님의 심판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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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54. 버려두시는 하나님의 심판

 

요한복음 12:37-43
37.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
38.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39.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41.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42.그러나 관리 중에도 그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 때문에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43.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요한복음은 치밀한 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요한이 요한복음 20:31절에서 밝혔듯이 이 기록을 통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려는 것이고 또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요한복음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있습니다. 세부분으로 나뉜다고 말씀드렸지요? 프롤로그가 1장 그리고 본론이 2-20장까인데 첫 번째 본론이 2-12장까지이고 표적들의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13장-20장까지가 영광의 책입니다. 그리고 21장이 에필로그 또는 부록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읽고 있는 본문이 표적들의 책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단락이 마무리되는 것을 볼게 됩니다. 37절에 보면 “많은 표적을 행했으나 그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7가지의 선별된 표적만을 기록하고 있으나 요한복음 21:25절의 보면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의 공생에 기간 동안에 수많은 표적들을 보여주었으나 사람들이 믿지 않았다는 것이 첫 번째 본론의 결론인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표적을 보고 믿는 무리들의 살펴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믿음은 피상적 믿음이며 거짓 믿음임을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믿음을 참 믿음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믿지 않았고 그것에 대한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또한 수 많은 이적을 통하여 그 나라가 임하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을까요?
간혹 그런 분들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한번만 제 눈앞에 보여주시면 제가 믿겠습니다. 또는 제 삶에 놀라운 기적을 일으켜 주시면 제가 믿겠습니다.” 우리들도 간혹 그럴 때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내 삶에 기적과 같은 일들을 체험케 하시면 우리의 믿음이 더 확고해 질 것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 그분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보다 더 많은 이적을 체험한 사람은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이 4일 만에 살아나는 기적을 본 자들입니다. 그 정도 보여주셨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체험이 많아지면 신앙이 막 자라고 성숙해 질 것 같죠?
믿지 않는 우리 주변에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기적과 같은 일들을 보여주시면 믿음이 생길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생기는 것도 아니고, 그것 때문에 믿음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표적들의 책의 결론부분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너희는 내가 이렇게 보여주어도 믿지 못하는 존재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인식 가능한 방식으로 보여주신 것이 기적입니다. 기적은 그 자체가 의미가 있기 보다는 이 죄악 된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을 가시적으로 보여준 사건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침노하여 임하는 것을 우리로 깨닫게 하시려고 보여준 사건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본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38절에 보면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르되 주여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 53:1절의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성취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지적하는데 첫 번째는 우리의 메시지를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서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두 번째는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나이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것과 같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믿지 않았고 또한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고 있지만 믿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렇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증거하였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권능을 행했지만 또한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사야가 예언한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원인에 대하여, 39-40절에 말하고 있습니다.


39,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40.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이것은 이사야 6:10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잘 보시면 불신의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눈으로 보고 믿지 않았고 마음으로 깨닫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개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표면적으로 보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원인이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아래에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는 원인을 하나님께 돌릴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고 따라고 자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아래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좀 더 깊은 의미는 이렇습니다.


너희가 하나님 말씀과 그분의 권능을 보지만 믿지 않는 것은 그 만큼 강팍하고 완고한 죄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심판을 하셔도 그 심판은 공의롭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러한 말씀을 대하면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하나님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자비롭고 인자하신 분인데 왜 모든 사람을 구원하지 않으십니까? 세상에는 착하게 살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고 법이 없어도 살아가는 양심적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왜 저들을 구원하지 않습니까? 하며 마치 우리가 하나님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공의롭지 못하고 속 좁은 사랑을 하시는지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하여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교만함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나는 너희의 눈을 멀게 하고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돌이키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사실  그렇게 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선택한 죄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은 너희를 그냥 버려두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심판받는 것이 얼마나 마땅한 가를 드러내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표적들의 책의 결론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보내시고 그들을 향하여 자비와 은혜의 손길을 뻗쳤지만 인간은 돌이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기적을 보여주며, 마침내 죽은 자를 살리기 까지 하였지만 너희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을 뿌리쳤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하나님의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만큼 죄인인 인간이 받아야 할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롭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불과 삼사일전에 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들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내가 조금 있으면 너희를 떠날 것이다. 내가 빛으로 세상에 왔지만 이 빛이 이제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너희가 나의 초청을 받아들이고 있지 않구나 하는 안타까움이 이 말씀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35-3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35.예수께서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둠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둠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느니라
36.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이 말씀이 예수님의 마지막 초청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을 떠나 숨으십니다.
이제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죄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은 잠시 동안이었습니다. 3년 동안의 공생애가 거의 끝나가는 시점인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고 그들을 떠나실 것입니다. 그 빛이 너희 가운데 있는 시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이 빛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죄인들은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5절에서 이렇게 말한바 있습니다.
“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이것은 결국 이사야 말씀의 성취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창조주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극악무도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너희를 향한 심판은 공의롭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제가 구원받지 못하고 결국 지옥형벌을 받게 된다면 아무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저는 제 자신이 아무런 소망이 없는 잔혹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깨달으라고 제 인생가운데 방황하는 기간을 허락하신 것 같아요. 저는 오히려 그 시절의 실수와 죄로 인해 저 자신의 무가치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저 또한 죄인 중에 괴수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저에게 심판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표적들의 책 결론은 이것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너무나 더러워져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지만 믿지 않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 누구도 항변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16-17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심판받아 마땅한 자들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독생자 예수를 보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하기 위해 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독생자인 자신을 보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안타까운 예수님의 초청을 그들을 거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회의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토록 죄악으로 가득한 인간에게 믿음을 통하여 구원얻게 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우리의 눈이 어둡고 마음이 강팍한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구원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창세기의 노아 때의 홍수사건을 잘 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죄는 과격하게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그 결과 창세기 6장에서는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것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땅에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 인류를 물로 심판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인류가운데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그냥 덮어주시기 않습니다. 반드시 추적하여 끝까지 심판하시는 두려우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놀랍게도 구원받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노아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6장 7-8절
“7.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런데 그 뒷구절에 놀라운 반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8.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들 가운데 구원받는 자들이 있는데 그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소망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는 길 뿐입니다. 은혜를 주시지 않아도 우리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이 사랑하는 택정된 자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바로 우리들입니다. 성도들이며 교회입니다.

그래서 사실,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놀라운 일입니다. 어쩌면 믿지 않는 것이 당연할것입니다. 우리의 죄성은 믿음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죄로 허물로 죽은 우리들입니다. 죽은 새가 어떻게 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강요한다고 생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는 논리적으로 잘 설명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기적을 보여주어도 안되고 죽은자가 살아난다고 해도 안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은혜로만 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믿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 이렇게 둘로 나뉘게 되었습니다. 중간지대는 없습니다. 우리중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순종하던지 믿지 않고 죄악가운데 살아가던지 둘 중에 한편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 섭리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오늘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구약성경에서부터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기록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귀를 가리워 진리를 듣지 못하게 하였고, 마음을 강팍하게 하여 회개하지 못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비록 그렇게 하였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는 굳이 그분의 능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그 은혜의 손길을 거두시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셨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가장 무서운 심판입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결국 멸망 길로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 반대가 무엇입니까? 붙드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구원이라는 것은 멸망길로 가는 죄인을 하나님께서 붙드시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엄마아빠 손을 붙잡고 갑니다. 아이가 붙잡은 것입니까? 부모가 붙잡은 것입니까? 부모가 붙잡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자신이 붙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멸망길로 가는 우리들에게 귀를 열어 하나님 나라를 진리를 듣게 하신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자신의 죄를 보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게 하신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우리를 붙잡고 가시는 것입니다. 내가 붙잡고 가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지만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손길은 죽음조차도 떼어 놀 수 없습니다.

 

주와 같이 길가는것 즐거운일 아닌가
우리 주님 걸어가신 발자취를 밟겠네

어린 아이 같은 우리 미련하고 약하나
주의 손에 이끌리어 생명길로 가겠네

꽃이 피는 들판이나 험한 골짜기라도
주가 인도 하는대로 주와같이 가겠네

한걸음 한걸음 주예수와 함께
날마다 날마다 우리는 걷겠네

 

우리를 구원으로 붙드시는 그 은혜의 손길이 지금 우리 가운데 머물고 있음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시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