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01-24 11:44

요한복음 강해 43. 참된 신앙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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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43. 참된 신앙 

 

요한복음 9:13-34
13.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24.이에 그들이 맹인이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25.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26.그들이 이르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27.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28.그들이 욕하여 이르되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29.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30.그 사람이 대답하여 이르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31.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32.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34.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 맹인의 개안 사건을 통해서 인간의 구원이 어떠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지를 살펴보았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구원은 여러 가지 그림으로 그려지고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자가 눈을 뜨게 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방적이고 무조건적인 은혜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진리를 보게 하십니다. 자연만물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셨고, 나의 무가치함과 누추함을 보게 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 결과 우리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알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진리에 눈을 뜨게 됨으로 얻게 된 현실적인 가장 큰 유익은 삶의 목적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전에 일시적이고 변하는 것들을 붙잡고 그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물질과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던 헛된 삶에서 돌이키게 된 것입니다. 내 인생의 행복을 성취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고 달렸던 삶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행복했던 순간보다 불행했던 순간이 더 많았고 염려와 근심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또한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눌렸던 순간들도 많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에 눈을 뜨자 내 삶의 목적이 나의 행복을 추구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그 영광 안에서 기뻐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살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될 때 오히려 내 삶에 풍성해지고 만족함이 있고 행복해짐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향방 없이 살지 않습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고 흔들이지 않는 진리를 붙잡고 살아가기에 우리 삶이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오늘 살펴볼 본문은 눈을 뜬 맹인의 주변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는 얼마나 기쁘고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지켜보았던 이웃들과 바리새인 그리고 부모는 전혀 의외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기뻐하거나 축하하지 않았고 오히려 공격적인 자세로 맹인을 대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왜 무엇 때문에 이렇게 반응하는 것일까를 살펴보면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것이 왜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것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바리새인들의 반응을 보겠습니다. 13-17절입니다. 일단 바리새인들은 맹인이 눈을 뜬 것에 대하여 궁금해 합니다. 15절을 보시면,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묻습니다. 그러자 맹인이었던 자가 대답합니다. “그 사람이 진흙은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그런데 그들은 이러한 놀랍고 기이한 일 앞에 이렇게 반응합니다. 16절을 보시면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잘 보시면 바리새인들은 맹인이 눈을 떴다는 것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눈을 뜨게 한 그 사람, 즉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당시 안식일법에 의하면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중에 하나가 빵을 만들기 위하여 반죽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침을 뱉어 진흙을 이긴 것은 일을 한 것이고 따라서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사람의 인생이 바뀐 기쁘고 놀라운 사건 앞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안식일법을 어겼다는 것을 이유로 쟁론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바리새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왜 그들은 함께 기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놀라운 일을 행하신 예수님을 배척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들이 전통과 관습 그리고 형식에 얽매어 본질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원래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거룩한 삶을 추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예배와 거룩함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적이 삶에도 구체적으로 실현되기를 바라는 아주 좋은 취지에서 시작되었던 운동으로서 나중에는 바리새파라는 하나의 종교적분파를 형성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함이 제사의식을 통해서 뿐만이 일상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법들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법, 음식법, 정결법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안식일에 금지한 39가지의 노동목록을 보면, 씨뿌리지 말 것, 반죽하지 말 것, 염색하지 말 것, 불을 켜지 말 것 등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이러한 것을 지키면서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거룩함의 본질을 인간이 만든 여러 가지 형식적 행위로 규정하자마자 어떠한 현상이 생겼는가 하면, 본질은 없어지고 형식만 남게 되는 왜곡된 신앙의 형태가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런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본질은 반드시 말이나 행동의 표현을 통해서 전달이 됩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를 보고 싶고 만나고 싶고 함께 하고 싶어집니다. 사랑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작은 선물을 준비하여 그 사랑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느순간 이런 결정을 합니다.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이 더욱 깊고 변하지 않기 위해서 한주에 한번 사랑한다고 말하자. 또 한달에 한번 꽃다발을 선물하고, 열흘에 한번 편지를 쓰자. 등등의 나름대로 지켜야 할 내용을 만들어 놓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의 마음 가운데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밥을 먹는 모습만 바도 짜증나고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지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계속해서 한달에 한번 꽃다발을 선물하고 열흘에 한번 편지를 씁니다.

 

그는 과연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까? 본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5장에서 이러한 그들의 모습을 이렇게 진단하십니다.
마태복음 15장
7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 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것 중에 하나가 여러 가지 경건의 행위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지킴으로 거룩해 진다고 생각하거나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기 위해 나름대로 세운 행위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 신앙생활을 기쁨이 사라지고 외식과 가식적인 종교생활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위험성이 늘 우리 주변에 있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중요합니다. 우리 소득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새벽기도는 우리의 경건생활에 큰 유익을 줍니다. 주일성수는 우리 삶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경건의 형식들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본질을 담고 있을 때만 의미있는 것입니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래서 여러분! 신앙생활은 강요한다고 해서 되지가 않습니다. 
우리가 실수하는 것이 이것입니다. 십일조를 강요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본질을 담고 있지 않으면 결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강요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하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단지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강요하고 그것을 억지로 하는 순간부터 외식적 신앙으로 흐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시는 신앙의 모습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흐르는 신앙적인 의식구조가 바로 이와 같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구조를 가지고 있으면, 본질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형식이라는 틀로 모든 것을 파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 되었던 자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 기쁘고 놀라운 사건을 안식일을 범했다는 형식적 논리로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본질이 없는 형식으로 세우려고 하고 또 그 형식에 매이게 되면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함께 기뻐하지 못하고 축하하고 감사하지 못하고 정죄만 있는 것입니다.
율법과 형식이 강조되는 교회들을 보면 서로가 감시자들 같습니다. 성경을 몇 번 읽었는지 헌금은 잘 하는지 기도회는 빠지지 않는지 체크합니다. 그래서 성도들과의 온전한 교제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중요한 것들이 많이 있지요. 그런데 그것에 매이지는 마십시오. 이것을 오해없이 이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십일조, 주일성수, 새벽기도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에 매이지는 마십시오. 매이다는 것은 빚을 내면서까지 할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급한일로 주일예배 빠졌다고 해서 또는 출장으로 인해 빠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런 신앙을 갖게 되면 사람들도 그 시각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신앙을 정죄하게 됩니다. 

 

마태복음 6: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그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으로 나와야 합니다.

시편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하나님은 멋있고 화려한 제사가 아니라, 상한심령의 제사를 받으십니다.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는 멸시치 않으십니다. 사람들은 형식을 봅니다. 외모를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두 번째로 맹인되었던 자의 부모의 반응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의 부모를 찾아가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묻게 됩니다. 그 부모가 대답합니다.
20절에 보면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부모는 바리새인의 질문에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합니다. 부모는 분명 예수가 자신의 아들의 눈을 뜨게 한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답을 회피하는 이유에 대하여 22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부모는 출교를 두려워 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출교를 당하게 되면 유대교 공동체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회속에서 살아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아무도 그 부모를 상종하지 않을 것이기에 경제적 활동을 할 수도 없고 이웃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슬람종교와 비슷합니다.

요한복음이 쓰일 당시,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50년 동안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아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의 고백은 출교를 각오해야 했고 가족들에게 버림받음과 극한 경우 죽음까지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두려워 진실을 외면했던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가 진리를 알지만 그것을 거절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경제적 두려움, 사람들로부터의 외면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핍박을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부모마저도 진질을 외면할 수밖에 없을 만큼, 두려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데 있어서 커다란 걸림돌입니다. 그러나 맹인은 달랐습니다.
그도 출교되는 것이 두렵기는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그는 끝까지 예수가 자신의 눈을 뜨게 한 분이라는 것을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진실은 구원받은 자들만이 간직할 수 있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구원받은 자들은 세상의 어떤 손해나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일이고 내 체험이고 내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죄악된 세상 속에서 담대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지 못하고 또한 그 분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신앙이 아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나의 믿음이 아니라 주일에 설교를 하는 목사의 믿음이고 신앙이 좋은 내 아내의 믿음이고 주변 사람의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나에게 믿음이 없으면 죄악된 세상을 대항하여 담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골리앗 앞에 섰던 다윗은 목동시절 짐승의 위협 속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자신의 양들을 지켰던 경험들, 그 가운데서 깨달았던 하나님이 신실하심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결국 골리앗을 이겼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체험이었고 그의 신앙이었습니다.

이러한 체험적 신앙이 없으면 세상이 두려운 것입니다. 하나님 보다 세상이 더 커 보이고 하나님 보다 내 삶에 문제가 더 커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거짓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자신의 배로 낳은 눈멀었던 아들이 눈을 뜨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은 아들이 경험한 것이지 부모가 경험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이었지만 세상의 위협 앞에서는 회피할 수 밖에 없는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은 여러분 각자가 인격적으로 만난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나 사이에 친밀했던 교제와 추억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죄악 된 세상을 이겨나갈 힘과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올 한해 우리 성도들 한 사람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교제와 친밀함이 더욱 풍성해지를 기도합니다. 또한 우리의 자녀들이 아직은 부모에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습관처럼 나오기도 하지만, 예수님께서 저들을 찾아가시고 인격적으로 만나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때 우리에게 일어나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38절입니다.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여기서 절한다는 것은 경배한다는 것입니다. 예배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결국 예배로 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참된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만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를 믿게 될 때,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진리를 보게 하신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될 때, 우리는 참된 예배로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외식적 신앙을 버립시다.
그리고 본질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갑시다.
그분을 만나고 경험할 때 진정한 예배자로 서게 됩니다.
이러한 신앙으로 나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