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02-07 17:12

요한복음 강해 45.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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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45. 양의 문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한복음 10:6-15
6.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10.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11.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12.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13.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우리는 지난 시간 예수님께서는 양과 목자의 비유 통해 하나님과 그분이 백성들과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목자가 되십니다.
그분은 그의 양들의 이름을 아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면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은 자신이 양의 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선한목자가 되시며 또한 양의 문이 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양의 문이라는 것은 양우리의 출입문을 의미합니다.

먼저 이 비유가 어떤 상황에서 주어졌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6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예수님은 1-5절의 말씀을 통해 자신이 양의 목자가 되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목자는 문으로 들어가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내어 그를 따르게 하다고 하셨습니다.
반면, 절도며 강도는 양의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양들을 움치려는 목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 목자와 강도가 등장합니다.
목자는 정당한 방법으로 문으로 들어가 자신들의 양의 이름을 불러내어 그들을 푸른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여 냅니다.


반면 강도는 다른 데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양들을 훔치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왜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9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9장에서 예수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하니까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이런 일을 행한다고 하여 예수님을 배척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바리새인과 유대인들 향하여 하신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은 선한목자여서 그의 양들을 정당한 방법으로 불러내어 인도하지만, 너희들은 도적들이어서 양들을 훔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비유로 설명하셨음에도 그들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6절을 보시면, “예수께서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그가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래서 예수님은 추가적으로 자신이 양의 문이라는 비유를 하셔야 했던 것입니다.


7절과 8절을 보시면
“7.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8.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나는 양의 문이므로 이곳을 통해서만이 양들이 출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그 나라의 삶의 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 그 외에 모든 방법으로 통해 우리로 들어가려는 시도는 절도요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이 아닌 다른 곳을 통해 우리로 들어가려는 시도, 즉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유대인들 시도했던 구원의 길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인간 스스로의 지혜와 노력과 의지를 통해 구원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로 하면 종교적인 열심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이나 도를 깨우치는 것, 선행 등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되려는 것은 오히려 절도며 강도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왜 절도며 강도일까요? 그것은 자신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그러한 길로 인도하기 때문에 절도며 강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표면적으로 보면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들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닙니다.
불교에서 하는 수행이 얼마나 좋습니까?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난 탐욕과 번뇌를 버리는 것,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행위들, 이런 것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선한일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절도며 강도라고 하는 것일까요?

 

왜냐하면 이것이 결국 인간이 구원 얻을 수 있는 길을 막고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사는 데는 도움이 될지는 모르나 구원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길을 방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본질이 없는 형식적인 종교적 행위를 통해 자신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 백성으로 살아 갈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지적하신 금식이나 구제 기도를 예를 들어봅시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는 아름다운 경건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없이 단지 이러한 행위를 지속적으로 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 동안만큼은 자신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더욱 열심히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구원과 거룩한 삶뿐만 아니라 삶의 풍요함과 안정은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만큼 열심을 내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삶에 간혹 일어나는 사고나 안좋은 일들은 결국 내가 하나님 앞에서 열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더 열심을 내기 시작합니다.

이러한 신앙의 모습이 얼마나 위험한가 하면, 결국 인생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노력을 하는가에 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 삶이 평안하고 안정된 것은 결국 내가 열심히 기도하여 봉사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는 것도 결국 내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가 노력해서 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내가 기도해서 응답받은 것은 내가 기도해서 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푼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보좌를 흔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로 만사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인 것입니까? 내가 하나님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릴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런 신성모독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이러한 표현이 담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습니다. 우리를 더욱 기도에 집중시키고 격려하기 위한 것임을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침해하는 이러한 표현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구원을 얻는 것도 나의 노력 여부에 달려 있는 것이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도 나의 노력여부에 달려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내가 노력해서 들어가는 것이며 그 나라에서 거하며 살아가는 것도 나의 의지와 노력으로 해야 된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은 정상적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당대의 최고의 석학이며 종교지도자였던 니고데모를 만나십니다. 니고데모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분이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분이라고 말을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은 니고데모, 너는 거듭나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알 수 조자 없는 자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거듭남의 길을 말씀하시는데, 구약의 놋뱀사건을 언급하십니다.

민수기 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원망하여 죄를 범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불뱀을 보내어 물게 하심으로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그때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을 마련하십니다. 그것은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높이 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뱀에 죽어가던 자들이 그 뱀을 보게 되면 살게 하신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한편에 하나님 앞에 범죄하여 심판받아 죽어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살 수 있는 구원을 길을 열어놓으십니다. 그것은 놋뱀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4-16
14.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여야 된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십지가 사건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하여 열어놓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 외에는 구원의 길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예배, 구제, 기도, 헌금....그저 종교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생활 하는 자들은 도적이며 강도들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을 그러한 종교적 행위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반석입니다. 따라서 모든 사역자들, 주일에 선포되는 모든 말씀들, 교회에서 진행되는 모든 행사들, 그 모든 것들은 양들을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께로 갈 때만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그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침상에 누워 가냘픈 호흡으로 생존을 연명하는 생명이 있고 청년의 기상으로 펄펄 뛰는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께로 갈 때만이 우리가 생명을 얻고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절도며 도둑들은 어떠합니까?
그들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킵니다.
내 영혼을 도둑질하고 내 영혼을 파괴하고 결국 죽입니다.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때로는 광명한 천사로 둔갑하여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지 못하는 교회, 목사, 선교사 어떠한 사역자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다 도적이며 강도들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십니까?


11절을 보시면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님께서는 처음에 목자라고 하셨고 또 양의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선한목자라고 하십니다. 선한목자라고 하신 것은 삯꾼 목자와 비교하기 위하여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선한목자가 되사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양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죽으신다는 것입니다. 즉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심으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는 것입니다.
14, 15절에 다시 반복합니다.
“14.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15.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그것은 우리를 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절에서도 목자는 자기의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낸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름을 아시는 분, 우리를 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여기도 안다라는 표현은 단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관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순신장군을 압니다. 저는 세종대왕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은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수준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제 아내를 압니다. 처음엔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혼하여 14년을 살다보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함께 살면서 아내가 어떠한 사람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이렇게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경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가면서 아내를 더욱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아신다는 것은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경험적으로 아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의 어리석음도 아시고 연약함도 아시고 부끄러운 죄도 다 아십니다. 그때도 우리와 함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것입니다.

그 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하신 그분이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목자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그 사랑이기에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삯꾼목자는 어떠합니까?
삯꾼목자는 돈을 받고 고용된 목자들입니다.
12절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양이 자기 양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리가 오면 도망갑니다.

결국 자기를 위해서 목자노릇 한 것입니다. 그런 자들은 자기가 손해 보거나 위험한 순간 도망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참 목자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을 따라갈 때 가장 안전합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주시고 더 풍성히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목자이신 주님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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