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04-25 12:49

요한복음 강해 55. 세족식의 의미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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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55. 세족식의 의미

 

요한복음 13;1-11
1.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2.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3.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4.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6.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7.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8.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9.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10.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11.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은 몹시 힘든 하루를 보냈습니다. 예루살렘에서의 사역은 이른 아침부터 늦은 저녁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유월절 명절을 앞두고 수많은 인파가 예루살렘에 모였고 예수님은 그 인파속으로 들어가셔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은 성전의 뜰에서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열정을 다하여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해가 저물어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가고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은 미리 마련된 숙소로 거처를 돌아왔습니다. 그곳은 마가의 다락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날따라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저녁을 먹는 중에도 예수님의 무거운 침묵은 이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자들도 눈치를 봐가며 목소리를 낮추었습니다. 그때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기셨던 예수님이 일어나셨습니다. 겉옷을 벗으시고는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대아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 앞에 가져왔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의 발을 닦기 시작하셨습니다.

제자들 모두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예수님은 너무나 진지했고 그분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어떠한 권위와 거룩함이 느껴졌기 때문에 그들은 그저 예수님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제자들의 대표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러한 부적절한 행동에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낍니다. 

 

당시 팔레스타인 문화에서 발을 닦는 것은 종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던 일이었습니다. 이 지역은 덥고 먼지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샌들을 신고 다녀서 발이 쉽게 더러워지고 냄새가 납니다. 그래서 집에 들어가면 먼저 가장 낮은 신분의 사람이 대아에 물을 받아와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느낀 부담감이 어떠했겠습니까? 이에 대해 베드로는 예수님의 행동이 부적절함을 지적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의 차례가 되었을 때 그는 예수님의 손길을 만류하며 말합니다.
“주님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그의 발에 손을 대려고 할 때였습니다.
베드로의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베드로를 바라보십니다. 인자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베드로는 이러한 상황도 예수님의 이 말씀도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나와 상관이 없다”는 말에 당황해서인지 아니면 수제자로서 인정받으려고 했는지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그는 자신의 이러한 말로 이 무거운 분위기가 조금이라도 반전되길 바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되돌아온 예수님의 대답은 그 무거운 분위기를 한층 더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베드로는 순간 자신이 괜히 나섰다는 후회가 밀려옵니다.
잘해보려고 한 말과 행동이 오히려 더 어색한 상황으로 몰고 갔기 때문입니다.

이제 제자들의 발을 모두 씻기신 예수님께서 옷을 입으시고는 다시 앉으셨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3.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14.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5.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이제 제자들은 모두 안심되었습니다.
이 어색하고 황당한 세족식 사건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해되지 않는 예수님의 행동과 말씀이었지만 그것을 묻고 토론하기에는 너무 지치고 피곤한 하루였습니다. 빨리 하루가 마무리되어 끝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표정과 말씀이 점점 심각해져 갔습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그분의 목소리가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바로 곁에 있었던 요한은 그분의 심령이 심히 괴로워함을 보았습니다. 요한은 21절에서 당시의 예수님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21.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예수님은 그 밤에 심령이 심히 괴로우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사랑했던 제자중 하나가 자신을 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때가 다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제자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서 기쁨과 슬픔을 나누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예수님을 팔 것이라는 것은 이해할 수 없었고 받아들일 수도 없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아무도 물을 수 없었지만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이때도 무언가 행동을 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세족식에서 이미 두 번이나 난감을 상황을 접한 터라 직접 물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워있던 요한에게 머릿짓을 하여 물어보라는 의사를 표시합니다.
“23.예수의 제자 중 하나 곧 그가 사랑하시는 자가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누웠는지라
24.시몬 베드로가 머릿짓을 하여 말하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하라 하니
25.그가 예수의 가슴에 그대로 의지하여 말하되 주여 누구니이까“

 

요한은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집중합니다. 과연 누구라고 말씀하실까? 그런데 예수님은 누구라고 직접적으로 이름을 거명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순간 마치 시간이 정지된 듯싶었습니다. 제자들의 모든 시선은 예수님께서 내시신 떡을 쥔 손과 그것을 마주하게 된 가롯유다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가롯유다의 본격적인 대결이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포도주에 적셔 가롯유다에게 내밀었습니다. 
가롯유다는 이 떡을 받을 수도 있고 또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가롯유다만이 알고 있는 대결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 상황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마귀는 가롯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집어넣었습니다.
“2절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가롯유다는 이제 그 생각을 수용할 것인지 거절할 것인지 그 선택의 자리에 선 것입니다.
만일 이 조각을 받는다면 그것은 마귀가 주는 생각을 수용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조각을 거절한다며 마귀가 주는 생각을 거절하고 회개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잠시 망설이던 가롯유다는 예수께서 내민 떡 조각을 취합니다. 


그러자 마귀는 그의 생각을 뛰어 넘어 그를 장악하기에 이릅니다.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예수님께서는 사단이 장악해 버린 그 사랑하는 제자 유다를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제자들은 지금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발을 씻기시지 않나, 이제는 너희중에 하나가 자신을 판다고 하시고, 그리고 떡 조각을 주는 자가 그라고 하시고 그것을 가롯유다에게 내미시고, 이제는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가롯유다는 제자들 가운데 회계업무를 담당하던 자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신뢰가 두터운 사람입니다. 그만큼 가롯유다는 신뢰받던 자였습니다. 따라서 그가 예수를 판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예수님이 오늘따라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28-29절을 보시면
“28.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29.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오직 이 상황을 아는 것은 예수님과 가롯유다 뿐이었습니다.
가롯유다는 “네가 하는 일을 속히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조용히 자리를 빠져 나갑니다.
성경은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그는 어둠속으로 나갔습니다. 빛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가롯유다는 이제 흑암속으로 나간 것입니다. 그것은 그의 선택이었습니다. 마귀가 비록 생각을 심어 주었지만 그 생각을 행동으로 결정한 것은 가롯유다였습니다. 그는 어둠속으로 나갔습니다. 그것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제 가롯유다가 떠난 11명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고별설교를 하십니다.
그것이 앞으로 진행될 18장까지의 내용인 것입니다.

먼저, 이렇게 전체적으로 어떤 상황인지를 말씀드렸습니다. 이제 좀 더 세밀하게 본문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 때문에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으셨을까요? 우리는 일반적으로 섬김의 본이라는 차원에서만 본문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족식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하나의 예표라는 것입니다.
1절에 보시면, 예수님께서는 이제 곧 십자가를 지고 죽으실 것을 아셨습니다.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3절에도 보시면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앞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깨닫게 해주시고 싶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죄인들에게 내려줄 수 있는 사랑중에 가장 큰 사랑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 아니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가 사함받는 것이 구원의 목적은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죄사함 받은 그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을 왜 하는 것입니까?


너무 사랑하니까 늘 함께 하고 싶어서 결혼하는 것 아닙니까? 결혼을 통해 인생길의 동반자가 되어 모든 것을 함께 나누기 위해 결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식을 통해 그것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결혼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죠. 결혼하여 함께 살아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죄사함 받은 것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최종적인 목적은 아닙니다.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부부가 결혼하여 함께 살아도 사랑의 교제가 없다면 그것이 무슨 행복한 결혼생활이 되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자녀가 되어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바로 우리를 그 자리에 서게 하시기 위함이었고 그것을 위해 세족식을 행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발을 씻기신 것과 죄인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과 연관될 수 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려면 구약성경의 성막을 알아야 합니다. 
성막을 구조를 보면 성막 문을 열고 들어가면 첫 번째로 나오는 것이 번제단입니다. 제사장은죄인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이곳에 번제물을 쪼개어 올려 태우게 됩니다. 그리고 피를 제단 앞에 뿌리게 됩니다.
그리고 번제단을 지나면 물두멍이 나옵니다. 물두멍이 물을 담아놓은 놋으로 만든 큰 대아입니다. 이곳에서 제사장은 손과 발을 씻게 됩니다. 이것을 통해 죄를 정결하게 하는 것입니다. 물론 물 자체가 죄를 정결하게 하는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물은 더러움을 씻는데 사용되었고 하나님은 그러한 물의 용도를 차용하여 죄인들의 죄를 사하는 상징으로 사용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약시대에 죄인들의 죄를 사하는 속죄의 방식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이제 물두멍을 지나게 되면 성소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성소 정면에는 지성소와 성소를 구별하는 휘장이 쳐져 있었습니다. 이곳은 하나님의 임재가 거하는 곳으로 영어로는 Holy of Holies 지극히 거룩한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지성소라는 곳은 가장 중요한 곳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거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은 오직 대제사장만 대속죄일에 한 차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전에 제자들을 발을 씻기셨습니다.
이것은 앞으로 있을 십자가 사건이 그의 사랑하는 제자들을 하나님의 임재로 나가게 하는 번제단이며 물두멍임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죄를 속하는 완전한 속죄의 방식이며 이것을 믿는 너희들은 곧 그리스도의 손으로 발을 씻어 깨끗하게 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기지 않으면 너와 나는 상관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그중 자신을 팔아넘길 가룟유다가 있음을 아시고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제자들은 죄사함을 받게 되지만 그중 가롯유다는 제외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께서 그의 발을 씻겨주셨지만 그는 결국 사단에게 장악되어 예수님을 팔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마침내 운명하셨습니다.


그때 성전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마태복음 27:50-51
“50.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하나님께서 찢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지성소, 즉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에 그분의 모든 자녀들이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6:19
“우리에게는 이 소망이 있으니, 그것은 안전하고 확실한 영혼의 닻과 같아서,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새번역)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하는 속죄제사가 됨을 세족식을 통해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이제 하나님의 임재앞에 담대히 나갈 수 있게 됨을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세족식은 이러한 예수그리스도의 구원의 측면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섬김의 본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본받도록 하심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윤리적 측면은 우리가 너무 익숙하기에 제가 다른 한 면을 강조하여 설명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족식을 통해 사랑하는 제자들을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인도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주셨을 때 이날 저녁에 있었던 그 모든 말씀과 행위를 완전하게 이해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땅에 있을 동안 함께 하시는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임재가운데 살았던 것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 하나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의 택한 자녀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살게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의 발을 닦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담대하게 나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아버지의 품속으로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시기 바랍니다.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그분의 자녀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