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7. 기독교의 믿음과 그 결과/2017.2.18.
요한복음 10:22-39
22.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23.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 거니시니
24.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7.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30.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31.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32.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로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 하느냐
33.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로 말미암아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신성모독으로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
34.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35.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36.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
37.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38.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
39.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신앙생활은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부터 이미 주어진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사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맛보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여전히 세상의 염려와 근심속에 살아가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함께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고 있을때에 큰광풍과 파도가 몰아칩니다. 이에 제자들이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께 탄식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어찌하여 무서워 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은 염려하지 말것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당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마실까 염려하는 자들에게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30절)”라고 하십니다. 반면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에 대하여 죽 열거하면서 그들이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삶을 살았는가를 보여줍니다.
히브리서 11장 6절.“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히브리서 11장 38절에 보면 그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들은 “믿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것이 어떤의미로 다가 오십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피스티스)’이라는 것은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안다는 것과 신뢰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머리로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속에서 알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이순신 장군을 압니다. 저는 세종대왕도 압니다. 그러나 이러한 앎은 책을 통해서 또는 누군가의 가르침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저는 무씨와 배추씨가 어떻게 다른 가를 알지 못합니다. 만일 무씨가 무엇인지 배추씨가 무엇인지를 알려면 몇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인터넷이나 책을 찾아보면 됩니다. 두 번째는 전문가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마지막으로 심어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심어서 자라는 것을 보면 무씨가 무엇인지 배추씨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서 깨달은 지식은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라는 의미는 세 번째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인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과 교제를 통해 알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아는 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는 신뢰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신뢰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일관되고 변함이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변함이 없으십니다. 그것을 경험하여 알게되면 신뢰가 생깁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는 결국 충성과 순종으로 이어집니다.
스탠포드 대학의 심리학자 미셀박사는 1966년 653명이 네 살 유아들을 대상으로 마시멜로 실험을 했습니다. 유치원 놀이방에서 네 살 아이에게 마시멜로를 하나 줍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말합니다. “네가 원한다면 지금 마시멜로를 하나를 먹을 수 있어. 그런데 15분 동안 먹지않고 기다리면 상으로 한 개를 더 받을 수 있단다”. 이렇게 말한 후 실험자는 방에서 나갑니다. 네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들이 15분 동안 먹지 않고 참을 수 있을까요? 너무 달콤하고 말랑말랑해서 지금 당장 먹고 싶은 마시멜로. 아이들의 반응은 갈렸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기다리지 못하고 마시멜로를 먹어 버렸고, 어떤 아이들은 15분을 잘 참고 기다려 한 개를 더 받았습니다. 실험결과 15분을 기다려 한 개를 더 받은 아이들은 전체의 1/3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소한 행동인 아이의 미래에 엄청난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15년 후 실험에 참가했던 635명의 아이들을 추적 조사해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비교해 보았습니다. 차이는 확연했습니다. 순간의 만족을 참았던 아이들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먹어버렸던 아이들의 차이는 다양한 곳에서 나타났습니다. 대학수학능력 시험(SAT)의 점수 차이는 21점이나 났고, 참아 낸 시간이 짧았던 아이일수록 순간 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정학처분을 받은 아이들도 많았으며, 약한 친구를 괴롭히는 행동도 훨씬 많았습니다. 잘 참아냈던 아이들은 참지 못했던 아이들에 학교성적도 우수하고,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비율도 현저히 낮았으며, 스트레스 상황에서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의 추적연구에서는 인내력을 발위한 아이들은 성공한 중년의 삶을 살고 있었고, 참지 못한 아이들은 비만, 약물중독, 사회 부적응 등의 문제를 가지고 살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이러한 차이의 원인은 무엇 때문일까요?
2012년 록펠러 대학의 키드교수팀이 발표한 실험은 그 해답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세 살에서 다섯 살 사이의 아들 28명에게 컵을 꾸미는 미술 작업을 할 거라고 설명하고 크레용이 있는 책상에 앉게 했습니다. 그리고는 조금 있다가 다른 재료를 더 줄 테니 기다리고 합니다. 몇 분 후 열네명의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미술 재료를 주었습니다. ‘신뢰’를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다른 열네명의 아이들에게는 재료가 있는 줄 알았는데 없다고 사과하며 약속했던 재로운 재료를 주지 않았습니다. ‘비신뢰’를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선생님의 신뢰와 비신뢰를 경험한 아이들에게 마시멜로 실험과 똑같은 실험을 했습니다. 그 결과 신뢰를 경험한 아이들은 먹지않고 평균 12분을 기다렸습니다. 열네명의 아이들 중 아홉명은 15분 동안 마시멜로를 먹지 않았습니다. 반면 비신뢰를 경험한 아이들은 평균 3분밖에 기다리지 못했고, 15분까지 기다린 아이는 단 한 명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실험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결국 부모에 대한 신뢰가 자녀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뢰는 부모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일관성이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통하는 이야기입니다.
믿음은 신뢰인데 이것은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들을 얼마나 신실하게 지키셨는가를 경험하게 될 때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신실한 분이십니다. 내 자신은 상황과 환경과 감정에 따라 늘 변했지만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셨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은 신실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지식과 경험들이 쌓여 믿음을 형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 좋은 것을 위해 순간의 쾌락을 참는 것을 만족지연능력이라고 부릅니다. 우리에게는 최고의 순간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시작됩니다. 그것을 위해 이 땅에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참아낼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초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믿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우리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여기서부터 누리며 살 것인가 그렇지 않는가가 믿음으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내용은 믿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장하신 내용을 믿는가 안 믿는가의 싸움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특히 10장에서는 예수를 목자로 양의 문으로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가져올 결과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믿지 않았던 자들, 성경은 그들을 유대인들이라고 소개합니다. 저들은 믿지 않는 자들의 대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행하신 일들과 그분의 말씀을 직접 보았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2천년전에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그것이 얼마나 확실한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여러 가지 이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24절 25절입니다.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이르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하게 하려 하나이까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 하니 2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거늘 26.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25절에 보면, 예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셨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놀라운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일관되게 말씀하셨고 행동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직접 보았고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독교 신앙, 믿음이라는 것은 듣고 본다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보여주면 믿을께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디 하나님이 계시면 보여줘바 믿을께” 하는 분들말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시고 놀라운 기적을 보여준다고 하여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그렇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처음에 선물로 주어집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인격적 교제와 동행 가운데 강화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물은 하나님의 택정된 자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입니다.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믿지 않는 것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26절입니다.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참 무서운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계속해서 말하였고 보여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지 않는 것은 너희가 내 양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믿는 자들은 누구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된 자들입니다. 똑같은 그분의 말씀과 사역 앞에서 어떤 이들은 믿음을 갖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27절을 보시면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그들은 예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압니다. 그리고 그분을 따라갑니다.
우리의 믿음을 설명하는 아주 중요한 단어들입니다. 듣고, 알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이 들립니다. 당시에는 직접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면 지금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알아갑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경험으로 알아갑니다.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기에 따라갑니다. 내가 가고 싶은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따라갑니다. 주님을 따라간다는 것은 주님이 사셨던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이 이 땅에서 보여주셨던 삶의 모습을 내가 살아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있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반면, 믿음이 있다고 하지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분을 알지도 못하며 안다고 하여도 머리로 지식으로 알고, 결국 자기 맘대로 살아가는 자들은 믿음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2장 17절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따라가지 않고 말씀에 순종함이 없는 삶을 사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장 19절에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머리로 지식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 또한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귀신들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압니다.
믿음은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알며 그분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주님을 더욱 알아갈수록 깨닫는 것은 내가 얼마나 부족하고 연약한 죄인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를 붙잡고 사랑하시는 주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막연하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 아니라 현실로 실제로 경험되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나를 가장 사랑하는 분이기 때문에 그분이 선한목자이기 때문에 신뢰하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의 목표는 성공이 아닌 것입니다. 명문대학, 안정된 직장, 풍성한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한걸음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만약 성공이 우리 삶의 목표였다면 예수님은 가장 실패한 인생을 사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시고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것입니다.
주님을 신뢰하고 한걸음 한걸음 따라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길에 찾아오는 고통일지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과 목적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목자가 양들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는 이유는 그곳에 영양이 풍부한 좋은 풀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 길을 걸으면서 목자와의 친밀함이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저희 아이가 병원에 입원해서 힘들어 잠들지 못할 때, 제가 끌어않고 새벽까지 토닥였습니다. 우리가 고통당하는 순간에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강하게 붙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28절-29절입니다.
“28.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 믿음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를 멸망하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그 손에서 우리를 빼앗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붙잡으시면 그 어떤 것도 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2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정한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주님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만물보다 크신 창조주요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 중요한 진리가 선포됩니다. 30절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니라” 즉 예수님이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이요 창조주요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어 이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 손을 붙잡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는 엄청난 축복입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유보다 크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내가 담당해야 하는 죄의 진노와 댓가를 대신 담당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 까지 나를 사랑하신 분이라면, 그분을 믿고 따라가는 것처럼 축복된 길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화)한국에 귀국하여 부목사로 사역할 때입니다. 두분의 권사님을 모시고 1시간 정도 되는 거리를 운전하여 심방을 가는 길이었습니다. 한국과 뉴질랜드의 차의 방향은 반대입니다. 그래서 간혹 혼란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아시는 한 권사님은 차가 도착할 때까지 불안해 하셨습니다. 손잡이를 꼭 잡으시고는 “차간 거리를 넓이세요, 브레이크를 밞으세요.” 그 한 시간동안 불안해 하셨습니다. 반면 또 한 권사님은 편안하게 바깥 풍경을 즐기기도 하시고 저와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잠깐 눈을 붙이시기도 하셨습니다.
똑 같은 한 시간동안의 운행 시간이었지만, 한분은 불안해 하셨고 한분은 즐기셨습니다.
두분의 차이가 무엇 때문입니까? 한 분은 운전자를 믿지 못한 것이고 한분은 믿음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의 운전대를 잡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만큼 믿느냐에 따라 즐겁고 평안하게 살아가느냐 아니면 늘 불안해하고 염려하며 살아가는가 하는 것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믿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신뢰의 문제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입니다. 인간은 실수하고 넘어질 수 있으나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완전하신 분으십니다. 그분이 우리 인생의 운전대를 붙잡고 계십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과 같은 인생길에 주님을 신뢰하고 따라가시는 복된 삶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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