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03-14 12:44

요한복음 강해 50. 믿음의 길, 자기부인과 십자가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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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50. 믿음의 길, 자기부인과 십자가

 

요한복음 11:45-54
45.마리아에게 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그를 믿었으나
46.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께서 하신 일을 알리니라
47.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49.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53.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54.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거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머무르시니라

 

요한복음 11장을 통해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것은 나사로라는 사람의 부활의 통해 예수께서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어떻게 살려내는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내용은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난주에도 살펴본 바가 있습니다만 오늘은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45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믿었다고 말합니다.
이들은 죽은 나사로가 살아날 때 그 자리에 있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나사로의 죽음을 확인했고 그가 살아나 무덤에서 걸어 나온 것을 직접 보았던 자들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신화나 꾸며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베다니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지나쳤던 것입니다. 시골 작은 마을에서 은밀하게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장에 보면 나사로가 살아난 것 때문에 예수를 믿는 자들이 급속하게 늘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종교지도자들에게 상당한 긴장감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만나고자 혈안이 되었고, 뿐만 아니라 나사로가 살아났다는 소문을 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베다니 마을로 모여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12장 9-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9절의 ‘유대인들의 큰 무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예수는 한 순간에 스타가 된 것입니다.
물론 전에도 그런 적이 있습니다. 들판에서 말씀을 전하실 때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남자만 5천명, 어린아이와 여인들 까지 합하면 약 2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던 것입니다. 그때도 사람들은 예수를 억지로 붙잡아 왕으로 삼으려 했었습니다.

한편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이 사건을 말미암아 본격적으로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를 하게 됩니다. 그 동안 지켜보던 단계에서 더 나아가 반드시 붙잡아 처단해야겠다는 결정을 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은 로마의 압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도층들은 대부분 로마에 충성하고 협조적이었던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권력과 부를 누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의 압제가운데 있을 때에 친일파들이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가능하면 로마의 비유를 맞추어 자신들의 삶에 풍요와 안정을 보장받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 사건으로 인해 상당히 충격을 받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킬 메시야로 믿고 따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 사실이 로마 지도층에 전해진다면 그것을 막아내지 못한 책임을 본인들이 져야 했기 때문에 긴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산헤드린 공회를 소집하기에 이릅니다. 산헤드린 공회는 유대인들의 최고 의결 기구입니다. 47절과 48절을 보시면
“47.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를 모으고 이르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48.만일 그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우리는 당시의 정황을 이렇게 그려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따르고자 하는 수많은 군중들, 그들은 예수를 정치적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경제적인 풍요를 가져다 줄 사람으로 기대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소식은 급속도록 전파되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동안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놀라운 일들도 함께 전해졌을 것입니다. 대표적으로 오병이어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적들은 제자들과 그곳에 있던 한정된 사람들만 경험했지만 오병이어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에 덧붙여진 여러 가지 일들이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기되어졌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는 수많은 군중들이 나와 종려나무 가지를 손에 들고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환호하기에 이릅니다.  
12장 12-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12.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2절에 ‘온 큰 무리’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호하며 그를 맞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난주에 말씀드린 것처럼 예수님은 이러한 자들의 믿음을 인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적을 보고 믿는 자들을 신뢰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곧 그들은 돌을 들고 예수를 죽이려는 자들로 돌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무죄도 없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외쳤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허상이고 거짓임이 곧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2장 23-24
23.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24.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요한복음 6장 14-15
14.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5.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사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 처음부터 이적을 베푸는 것에 대해서 매우 신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정치적, 경제적 메시야로 오해하여 믿을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주 이런 말씀을 하셨지요. 마태복음 9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9:30 “예수께서 엄히 경고하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 하셨으나”


마태복음 12장에는 안식일에 손마른 자를 고치신후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5.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16.자기를 나타내지 말라 경고하셨으니”
막1장에서 나병환자를 고치신후에 44절을 보면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막5장에서 죽은 회당장의 딸 야이로를 살리신 후에는
“43.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그들을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이것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메시아 은닉사상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분명 메시아 이셨지만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꺼리셨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그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성경에서 말하는 메시아가 아니라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아로 믿게 될 것을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요한복음에서 확인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아무리 이 부분을 신경을 쓰시고 조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대부분의 군중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경제적 메시아로 믿고 따랐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당시 예수를 따랐던 수많은 군중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외치며 예수를 칭송했던 그들의 믿음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예수를 따랐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것은 정치적 해방이었고 경제적 풍요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분으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것도 그분을 따르는 것도 나에게 어떠한 유익을 주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유익은 대부분 이 땅에서 누리는 풍요로움과 안정된 삶과 관련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삶과 안정된 삶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풍성함과 안정된 삶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로 말미암아 누리는 영적 풍성함이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붙들고 가시는 영적인 안전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말씀을 읽거나 설교를 통해 들을 때도 내가 듣고 싶은 것만 듣습니다. ‘영적인 풍성함’이라고 할 때 ‘풍성함’이라는 단어만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풍성함은 내가 생각하는 물질의 풍성한 삶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안에서 영적으로 안전한 삶을 말하면, ‘안전함’이라는 단어에 꽂혀 무사,무탈한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빌립보서 4:13절의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의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는 앞 뒤 구절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하나님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계획하고 있는 일들을 떠올리면서 하나님이 능력주시기에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 구절을 조금만 살펴도 그런 말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삼서 3장은 요한이 장로 가이오에게 편지하면서 인사말로 이렇게 말합니다.
3절에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과 범사 즉 사업과 강건 즉 건강에 축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을 삼박자축복이라고 명명하고 예수 믿으면 삼박자 축복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아도 이것은 약속이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기원의 형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예수 믿으면 당연히 삼박자 축복을 받는다고 믿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많은 설교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본의를 드러내지 않고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은혜 받고 모인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6.25이후에 한국 사회가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에 이러한 말씀이 위로가 되었고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1960, 70, 80년대 도시화로 인해 많은 사람이 도시로 몰리면서 자연히 대형교회의 형태들이 생겨났습니다. 사람들은 자연히 삼박자 축복을 외치는 교회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마치 성공인 것처럼 포장했고 성공한 사람들을 교회의 장로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돈을 모았는지 살펴보지도 않은 채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의 기준에 도달한 사람들을 대표자들로 세워 “보십시오. 우리교회에 나오면 이렇게 됩니다”라는 것을 선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회는 대형화 되었고 한때 기독교인구가 25%를 육박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들이 그렇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했나요?
사회의 각종 비리와 사건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있었습니다. 멀리 갈필요도 없이 우리주변에서 만나는 기독교인들의 모습이 세상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 삶의 선택, 일을 하는 방식 등, 과연 차이가 나던가요?

 

우리가 신중하지 않은 결과
예수를 믿는 목적이 어느 순간 자신의 삶의 풍요함과 안정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것입니다. 복음이란 진리입니다. 진리라는 것은 시대나 상황에 상관없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리는 변질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예수 믿으면 병이 낫고, 부유해지고, 삶의 문제들이 해결됩니다 라는 것을 복음으로 포장하여 아프리카의 가난한 마을에 전할 수 있겠습니까? 평생을 질병과 가난 가운데 살다가 이제 노년에 이른 분에게 그렇게 전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변질시킨 결과 혹독한 대가를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에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삶의 상황을 보면서 속았다고 느껴본적은 없으셨습니까? 어려분! 솔직히 무엇이 달라졌나요. 거의 없습니다. 삶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그것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죠.

 

성경은 오히려 예수를 믿는 것은 자기가 죽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손해보는 길이고,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는 길이며, 자기를 죽이고 남을 살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예수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참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타락한 대제사장 가야바의 입술을 통해 진리가 선포되고 있습니다.
49-52절입니다.
“49.그 중의 한 사람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가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50.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51.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52.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가야바는 냉소적인 말투로 예수를 죽이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의미로 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결국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죽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살려내고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가복음 10장 45절에서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분을 따라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께서 사셨던 삶을 따라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자기부인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8:34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삶의 행복을 위해 예수님을 수단으로 삼으려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를 따르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을 따라는 길은 내가 죽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계속해서 자기가 부인되어지는 과정입니다. 대표적인 것인 자존심입니다. 우리는 누군가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려도 참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동시에 인간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인간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의지를 꺾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자기 부인이었습니다.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며 낮은 자리에 임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겨달라고 눈물이 피물이 될 때까지 기도하신 주님은 마침내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순종을 통해 십자가의 고통을 지나 부활의 영광을 이룬 것입니다.
예수님은 순종하였고 부활의 영광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보여주신 그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자기 부인과 십자가를 지는 것. 우리는 평생 이것만 하나다가 주님 나라에 갈 것입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과정 가운데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힘든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자아가 너무 강력한 것입니다.
 
아직도 ‘자아’를 부둥켜안고 하나님나라에 들어가려 하십니까?
많은 크리스찬들이이 주님을 위해 산다고 하면서 사실은 자신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욕심덩어리 자아를 버리고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의 십자가만을 품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