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75. 악의 평범성
요한복음 18:28-40
28.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30.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32.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33.이에 빌라도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34.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35.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36.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37.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38.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39.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40.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
오늘 본문의 말씀은 빌라도에게 심문받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짐작하시는 것처럼, 빌라도는 우리가 매주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등장하는 본디오 빌라도입니다. 그는 당시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이었습니다. 당시 유대민족들에게도 왕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헤롯입니다. 그러나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었기에 실제적인 권력은 빌라도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빌라도의 법정에 세운 것입니다.
때는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28절에는 새벽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난밤에 포박되어 안나스와 가야바에게 심문받았던 예수님께서 는 당시 최고 법정인 빌라도의 법정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하면, 그들이 공식적인 재판과정을 통해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법에는 지난주에 말씀드린 바 있는 것처럼, 거짓 선지자들을 돌로 쳐서 죽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사형권은 로마에게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사회에서 일어나는 돌발적인 상황에 대해서는 눈을 감았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7장에 보면 스데반집사의 경우 그들은 재판과정 없이 바로 돌로 쳐 죽이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과 동등 되다고 주장하실 때 마다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분명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적인 재판과정을 통해 예수를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빌라도의 법정으로 왔을까?
빌라도 역시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듯합니다.
빌라도는 당시 예수라는 인물을 당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불과 한 주전에 예루살렘으로 입성할 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유대전역에서 모인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하며 그를 환호할 때 그 소식이 빌라도에게 보고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보들이 그의 지휘체계를 통하여 계속해서 수집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판단은 예수는 그렇게 위험한 인물이 아니며 당시 유대사회에서 탁월한 랍비(선생)나 새롭게 주목받는 영적 지도자 정도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른 아침 유대인들이 예수를 포박하여 데리고 왔을 때 그의 반응이 이랬던 것입니다.
29절에 보니까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나가서 그들에게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빌라도가 밖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밖은 관정 밖으로 나간 것을 의미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대인들이 관정으로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를 28절에 설명합니다. “그들이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이방인이 거주하는 곳에 들어가는 것은 당시 정결법에 위배되었기 때문에 들어가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만이 관정의 심판석에 서 계시고 유대인들은 밖에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번거롭게도 빌라도가 관정에 들어왔다 나갔다를 반복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너희가 무슨일로 이 사람을 고발하느냐”
이것은 이제 공적 재판이 진행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30절에 유대인들이 대답합니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라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행악자로 몰아세웠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이미 이 상황이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온 것임을 알았기에 이렇게 다시 말합니다.
31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빌라도는 현재까지 볼 때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의 종교적인 문제이기에 너희의 종교법으로 예수를 심판하면 될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유대인들이 대답합니다. 31절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 하니”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였고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신들에게 사형권이 없다는 명목으로 예수를 공식적인 재판에 회부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십자가형으로 죽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가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심문하게 됩니다.
33절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여기서 “네(쉬)가”라는 단어의 원어적인 뉘앙스를 보면 경멸하는 표현입니다. “니까짓게 유대인의 왕이라고”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의 최고 권력기관인 산헤드린공회(대제사장을 비롯한 종교, 정치인들로 구성된 오늘날의 국회와 같은 곳)가 예수를 빌라도에게 고발할 때 붙인 죄목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십자가에 형을 당하실 때 죄목을 쓴 패가 붙게 되는데 그것이 ‘유대인의 왕’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은 메시야이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결코 로마정부에 고소할 죄목이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빌라도의 입장에서 그것은 다분히 종교적문제로 보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고안해 낸 죄목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계속해서 주장해서 결국 예수를 반란세력의 주동자로 몰아 십자가형으로 죽이려 한 것입니다.
3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하여 네게 한 말이냐”
예수님의 이 대답은 빌라도가 진정으로 예수에 대하여 알고 싶은 마음에서 한 말인지 아니면 산헤드린 공회가 고소한 내용을 묻고 있는 것인지 되물으신 것입니다. 만일 예수가 누구신지 알기 원하는 마음에서 질문했다면 예수님은 진지하게 그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단지 고발한 내용을 묻는 것이라면 이것에 대한 해명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최고 권력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죄수가 재판관이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에 대해 35절에 “내가 유대인이냐”
무슨 말입니까? 나는 유대인들의 문제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유대인의 왕이든 아니든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관심꺼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죽고 살리고 하는 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에겐 이것은 골치 아픈 문제이지 자신이 나서서 해결해야 될 문제라고 여겨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묻습니다.
35절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빌라도는 지금 궁금한 것입니다. 그가 아는 바로는 예수는 결코 위험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의 종교, 정치권력이 주도하여 자신 앞에 서 있는 초라하게 생긴 한 젊은이를 죽이려 데에는 무언가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묻는 것입니다. “네가 도대체 무엇을 하였기에 이토록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는가?”하는 질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3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이 대답을 왜 하시는가 하면, 빌라도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고 또 네 나라 사람들이 너를 넘겼는데 네가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이 왕이기는 하지만 이 세상 나라의 왕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나라의 왕이 아니시죠. 그분은 창조주로 우주만물이 창조되기 전부터 왕이셨습니다. 그분께서 말씀으로 세상(코스모스)를 창조하셨지만 하나님을 반역한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가 장악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빌라도는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내 나라가 있다”고 하셨기 때문에 이렇게 다시 묻습니다.
37절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이 말의 의미는 “네 말이 지금 네가 왕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아니냐”의 의미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거짓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솔직하게 자신이 왕임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이 고소할 죄목으로 붙인 유대인의 왕이거나 또 빌라도가 이해하는 세상 나라의 왕이 아니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에 대하여 하실 말씀이 많으셨겠지만 예수님께서는 필요한 말씀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37절 계속 보시면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왕으로서 이 땅의 소임을 다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소임은 바로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빌라도가 대답합니다.
38절 “진리가 무엇이냐”
이것은 진리가 궁금해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냉소적인 말투입니다. “진리를 증언한다는 사람이 지금 그 모양 그 꼴이냐” 또는 “진리가 밥먹여주냐” 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빌라도의 심문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를 위시한 예수를 고소한 자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을 통해 인간의 죄악의 잔혹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이 왜 이렇게 예수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었을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행하신 일들은 결코 죽일만한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왜 이토록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까?
전에 우리가 살펴본 바가 있지만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차원에서 살펴보겠습니다.
요한복음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아니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함이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의 일들을 악하다고 증언하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지적하시고 들추어내시고 폭로해 내신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엇까지 포함되었는가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인간이 행하는 모든 종교적인 열심과 헌신, 대표적으로 예배, 헌금, 기도, 구제, 율법지킴 등 그 신앙행위로 자신의 죄악을 포장한 것까지도 다 발가벗기시고 폭로해 내신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 당시 죄인의 대명사였던 세리와 창기 그리고 문둥병과 같은 저주의 상징들이었던 사람들에게는 소망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한 죄인이라 것이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8:9-14
9.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0.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11.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2.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13.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14.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자신의 종교심과 신앙행위 뒤에 숨어서 마치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것처럼 살아가는 자들,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가 무엇입니까?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의 죄인됨에 대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는 자가 오히려 의인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1장
37.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한 바리새인이 자기와 함께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므로 들어가 앉으셨더니
38.잡수시기 전에 손 씻지 아니하심을 그 바리새인이 보고 이상히 여기는지라
39.주께서 이르시되 너희 바리새인은 지금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40.어리석은 자들아 겉을 만드신 이가 속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41.그러나 그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하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너희에게 깨끗하리라
42.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는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43.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을 기뻐하는도다
이렇게 자신들안에 숨겨진 죄악을 들추어내신 예수님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웠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누가 나에 대하여 조금만 뭐라고 해도 자존심 상하고 싫은데, 그 안에 감추어진 죄악의 더러움을 폭로시키신 예수님이 왜 죽이고 싶지 않겠습니까?
최근에 간담을 써늘하게 하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여중생 둘이 모의하여 초등여학생을 살인하고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한 사건, 여고생들이 집단으로 폭력하고 그것을 촬영하여 인터넷에 올린 사건, 최근 여중생 딸 친구를 집으로 유인하여 죽이고 시신을 유익한 사건 등. 우리가 이러한 사건을 대하면서 어떻게 저렇게 끔찍한 짓을 할 수 있는가! 혐오 하지만, 사실 그들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은 일반인들과는 좀 다른 성장배경과 정신 상태를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여 우리와는 차별을 두고 싶어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러한 죄악들이 다 있습니다. 우리가 종교적 행위에 숨는 다고 하여 그 죄의 잔혹함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다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상황까지 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 우리가 선하고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은 나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지켜본 정치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기록입니다. 그는 아이히만의 법정 진술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이끌어내었습니다.
여성과 어린아이들을 포함해 수만 명의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고 가스실에서 대량학살을 수행한 아이히만은 그저 직속 상가의 명령을 잘 따랐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신의 직무를 위해 더 많은 유대인을 말살시켜야 한다고 믿었을 뿐, 어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이 수만 명을 학살했다는 사실만 놓고 보면 아이히만은 굉장히 악인일 것 같지만, 그의 정신상태를 분석한 의사들에 따르면 그는 정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오히려 보통 사람보다 더 도덕적으로 보였다고 합니다.
“여섯 명의 정신과 의사들이 그를 정상으로 판정했다. 그의 모든 정신적 상태가 정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함을 발견했다. 그리고 끝으로 대법원에서 그의 항소를 들은 후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한 성직자는 아이히만이 매우 긍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고 발표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에게 확인해 주었다“
이런 결과는 분명히 충격적입니다. 아이히만이 살인에 대한 충동에 사로잡히고 가학적인 성격의 소유자라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가 벌인 일(수백 만명의 남녀와 아이들을 죽음으로 보낸 일)을 그의 성격적 결함으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악은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라고 하는 아렌트의 말이 우리를 괴롭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이라고 믿는 내 자신도 어떤 상황에 처하면 충분히 악해질 수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악인이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인 것입니다. 이러한 우리의 악함이 바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왔지만 알아보지도 못했고, 그가 와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고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며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셨지만, 그분을 십자가로 몰고 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충분히 돌을 들어 쳐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로마법정에서 시행할 수 있는 가장 참혹한 십자가의 죽음으로 죽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래야만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받은 죄인임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것이 우리의 잔인함이며 참혹한 죄의 모습입니다.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고 그를 향하여 저주하는 것이 다름 아닌 내 자신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당시 유대지도자들과 유대인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인류의 잔혹한 죄를 폭로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걸음 더 들어가 살펴볼 것은 그들이 지금 이러한 행위를 하면서 철저하게 경건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소름끼치게 만듭니다. 그들은 유월절 식사를 하기 위해 이방인의 집인 빌라도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입니다.
여러분 진짜 악한 것이 이런 것입니다. 고상함과 교양으로 자신의 죄악을 그럴듯하게 포장한 자들. 하지만 그들 안에 숨겨져 있는 온갖 더럽고 추악한 죄의 모습들.
성경은 그러한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잔혹하게 죽이려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는 언제든지 죄의 참혹함으로 추락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인정하는 만큼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내 자신이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죄인인지 아는 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본문의 말씀이 이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고상함 뒤에 숨어있는 우리의 잔인함, 경건의 행위로 포장한 우리의 잔혹함.
두 번째, 본문은 이러한 모든 과정이 결국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았습니다.
32절입니다.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 모든 일을 계획하시고 실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렇게 더럽고 추악한 나와 여러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abcXYZ, 세종대왕,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