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68. 빼앗을 수 없는 기쁨
요한복음 16:16-24
16.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17.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며 또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하신 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고
18.또 말하되 조금 있으면이라 하신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거늘
19.예수께서 그 묻고자 함을 아시고 이르시되 내 말이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므로 서로 문의하느냐
20.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21.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면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22.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23.그 날에는 너희가 아무 것도 내게 묻지 아니하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
24.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기독교의 구원의 목적은 천국에 들어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와 연합이라고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천국을 황홀한 장소에서 고통 없이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충만하게 거하시는 곳으로 표현합니다.
<요한계시록 22:22-23>
22.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
23.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즉 하나님 나라 또는 천국은 장소적 개념이기보다는 누구와 함께 있느냐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아름다운 곳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고 해도 내 앞에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떠하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정말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면 비가 새는 판잣집에 간장 종지 하나 놓고 밥을 먹어도 행복한 것입니다.
찬송가 가사처럼,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다 하늘나라”
그래서 천국은 주님 모시고 사는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임재인 성령님을 모시고 살 때, 이 땅에서부터 천국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살고 계신 성도님들의 특징은 감사와 기쁨입니다. 입술가운데 늘 찬송이 있고 감사와 기쁨이 끊이지 않습니다. 처해진 삶의 상황을 보면 그리 녹녹하지 않지만 감사하고 기뻐합니다.
행복은 항상 감사와 기쁨을 동반하죠. 감사하는 만큼 행복하고 기뻐하는 만큼 행복합니다. 성도는 주님 때문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인생을 행복하게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전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22절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너희가 지금 당장은 근심가운데 있지만 조금 후면 기쁠 것이고 그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최후에 주실 기쁨을 약속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여기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동일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본문은 고별강화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중에 마지막 부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동안 살펴본 것처럼 고별강화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자 하는 주제는 근심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곧 있으며 내가 너희를 떠나게 될 것이고 또 너희가 이 세상에서 환난과 핍박을 받게 될 것이지만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보혜사 성령님께서 오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께서 오셔서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오시면 책망할 것인데 우리의 죄에 대하여 우리가 쌓은 의에 대하여 그리고 우리가 가진 의의 잣대로 예수님을 판단한 것에 대하여 책망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책망으로 인해 우리의 더럽고 추악한 죄악을 폭로해 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 땅에서 아무런 소망이 없는 존재들임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우리를 죄를 사하는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하시는가? 성령님께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으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당시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경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을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하신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들었던 사람들 그리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했던 그 사람들 그들이 사도입니다. 그들이 저술한 것이 신약성경입니다. 그래서 신구약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진리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신구약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그 동안 우리가 살펴본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제 예수님께서는 미래를 전망하십니다. 그것은 자신이 없는 동안 잠시 너희가 근심하고 두려워하고 슬퍼하겠지만 그것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다시금 너희 가운데 오실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16절을 보시겠습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가 나를 보지 못하겠고 또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 하시니”
여러분 이것이 무슨 말씀일까요?
학자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릅니다. 조금 있으면 보지 못하겠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조금 있으면 나를 보리라는 것에 대하여 의견이 갈립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의 재림을 의미한다는 견해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그때 다시금 볼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은 당시 제자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의 순간 그 분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성령님의 임재를 의미한다는 견해입니다. 14,15장에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주신다는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는 예수님의 부활하셔서 다시 보게 될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입니다.
그 중 저는 세 번째 견해를 취합니다. 왜냐하면 “조금 있으면” 이라는 말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때나 오순절 성령님의 임재 때를 의미하기에 조금 있으면 이라는 말이 부적합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제 곧 잡히시고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겪게 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 제자들은 두려워했고 슬픔과 비탄 가운데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삼일 후 부활하사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그 슬픔은 곧 기쁨으로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잠깐 동안의 슬픔 뒤에 오게 될 그 기쁨을 아기가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21절에 보면 “여자가 해산하게 되면 그 때가 이르렀으므로 근심하나 아기를 낳으며 세상에 사람 난 기쁨으로 말미암아 그 고통을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느니라”
아마도 어머님들께서 이 말씀을 잘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잉태할 때가 되어 진통이 오면 당연히 두려울 것입니다. 그것은 해산의 진통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만나게 될 생명으로 인해 그 진통을 담담하게 겪어내는 것처럼,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을 기대함으로 잠시당할 고통과 슬픔을 견뎌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시자 마다 흩어져 버립니다. 3년 동안이나 함께 동거 동락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한 순간에 흩어져 숨어 버렸습니다. 행여 자신들도 예수님처럼 붙잡혀 고문과 죽음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신들을 그토록 사랑하셨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끔찍하게 죽으실 때 그들의 두려움과 슬픔은 어떠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은 잠깐 뿐이었습니다. 금요일에 돌아가셨던 예수님께서 삼일 만에 살아나신 것입니다. 주일 아침 새벽 무덤에 갔던 여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고 달려갔던 베드로 또한 예수님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함께 있을 때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며 못자국난 손과 창자국난 옆구리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어떠했을까요?
죽으시고 살아난 존재 앞에서 놀라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했을 것입니다. 분명 죽으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것을 목격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무덤에 안치되는 것을 보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앞으로 있을 자시의 부활을 말씀하시면- 물론 제자들은 이해하고 있지 못하지만- 그때 너희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이고 그 기쁨을 그 누구도 빼앗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22절입니다.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그렇다면 여러분 이 기쁨은 어떤 기쁨이겠습니까? 그것은 자신에게 찾아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그 확신 가운데서 느껴지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도마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주님이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동안 자신과 함께 3년 동안 계셨던 분이 하나님이시며 자신의 주님이라는 사실에 그들은 감격했고 기뻐했던 것입니다. 그 동안에는 이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들은 달라진 것입니다.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권세와 능력과 영광이 무궁하신 하나님께서 미천한 자신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에 그들의 기쁨은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 부활의 주님께서 이제 여러분과 저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분이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구원자라는 사실로 인해 기뻐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3장
17.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성도들의 기쁨의 원천은 하나님의 임재하심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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