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84. 각자 사명의 길로
요한복음 21:18-25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20.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24.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25.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2016년 3월 13일에 시작된 요한복음 강해가 오늘 마무리가 됩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처음 함께 나누었던 성경은 빌립보서였습니다. 그것은 빌립보서를 통해서 우리 교회가 과연 어떠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요한복음을 강해했습니다. 이유는 우리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되어야 겠다는 바램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신앙의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이어서 성경은 마지막으로 베드로의 모습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왜 요한복음의 마지막 장면이 베드로로 끝나는가 하는 것에 대해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의 비장함과 환희에 찬 모습과는 다릅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은 베드로에게 주목하고 있는 그와 예수님께서 나누신 짤막한 대화로 마쳐집니다.
1.베드로는 죄와 허물 뿐인 우리의 모습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으셨던 주님, 그리고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며 자신의 사랑을 주께 고백했던 베드로.
모든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릴지라도 자신만큼은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했지만, 결국 세 번씩이나 예수를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요한의 아들 시몬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우리 자신들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은 자신의 의지와 결단 그리고 노력으로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는 교회의 모습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제자들의 대표였느니 그의 실패는 결국 제자 전체의 실패이고 또한 성도 전체의 실패이며 그 속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신앙생활은 우리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며 연약하고 허물 많은 존재인지를 보여주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신앙생활을 똑바로 하면 -여기서 똑 바로 한다는 것은 신앙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지고 삶의 현실을 살아내려고 하는 분들을 의미합니다.- 여지없이 깨닫게 되는 것은 내 존재의 형편없음입니다. 내가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죄인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졌던 믿음 그리고 나름 성숙했다고 자부했던 인격조차도 나를 자극하고 힘들게 하는 상황 앞에서는 번번이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분노했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양을 돌보라고 했지만, 내게 허락되어진 가족들조차도 인내하고 참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믿음과 인격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 앞에서의 그것이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이 진짜 내 믿음과 인격이고, 집에서 보이는 내 믿음과 인격은 다른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아니요. 그게 내 믿음의 수준이고 인격의 수준입니다.
그 믿음과 인격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주를 위해서 무엇을 하겠습니다 하는 그 모든 결단과 서원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최근의 삶을 한번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그때 그 상황에서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그렇게 분노하고 무시하고 고함을 지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하지만 그때 나의 모습은 예수님과 같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결코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래서 불안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한 자들은 불안합니다. 어떻게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을까?
요한복음에서 왜 마지막 결론부분에 베드로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의 모습이기 때문이고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만큼 예수님과 가까이 했던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수많은 이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는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직접 보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변화산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의 형체로 변형되시는 것을 보았던 자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주님 여기가 너무 좋습니다. 여기에 초막을 세 개 짖고 살고 싶습니다(막9장)고 했던 자입니다. 그리고 구름이 와서 덮으며 그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던 자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수많은 이적들을 체험하면서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쉽게 부인합니다.
우리 삶에 하나님께서 주신 얼마나 많은 은혜의 사건들이 있었습니까?
그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몇 가지 일 것입니다.
그 수많았던 은혜의 사건들이 우리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가고 또 사라졌을 지라도 그때 그 순간만큼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생생하게 체험했습니다. 그때 그 큰 사랑으로 인하여 내가 하나님 앞에서 했던 결단들과 고백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삶의 현실 속에서 번번이 실패하였고 좌절하였던 것입니다.
2.요한복음은 베드로와 같은 그러한 죄인들을 결국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것을 결론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8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베드로가 내가 주를 사랑합니다라는 고백 이후 예수님께서 내 양을 먹이라는 목양의 사명을 주신 후 하신 말씀입니다.
젊어서는 네 계획과 뜻대로 살았지만, 앞으로는 네 삶이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이것은 무슨 말일까요? 네 팔을 벌린다는 것은 무엇이고 남이 띠를 띠운다는 것은 또 무슨 말일까요? 19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팔을 벌린다는 것은 당시 십자가 처형 방식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가로 막대기를 지고 가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베드로는 로마의 네로황제치하에서 복음을 전하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당합니다. 결국 너는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게 될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게 될 것을 말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께서 네 인생을 하나님의 계획과 뜻대로 인도하실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것이 비록 십자가의 죽음 일지언정 말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베드로의 이러한 삶이 결국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삶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결국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인도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비록 십자가일지언정 말입니다.
3.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우리 삶을 주관하실 때 어떤 방식으로 하실까요?
< 누가복음 22:31-34>
31.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32.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33.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이 장면은 요한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최후의 만찬석에 있었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가 어떤 존재인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자신을 부인하게 될 것도 아셨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 그가 돌이킬 것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가 돌이킨 후에 형제를 굳게 하는 사명을 감당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자로 만들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통해 하나님께 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신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은 인성을 가시진 분이십니다. 그분은 부활의 몸을 입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부활 후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계십니다. 그곳에서 무엇을 하실까요?
로마서 8장 33-34
33.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예수님이 지금 무엇을 하십니까?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십니다. 베드로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 그를 돌이키게 하시고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 것처럼, 지금도 실패한 우리 인생을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28절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이 구절을 잘 아는데 이 전구절과 연관시켜서 읽어야 그 의미가 명확해 집니다.
26-27절을 읽겠습니다.
26.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 삶에 최선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가장 선하고 의로운 것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에게 무엇이 가장 선하고 의로운 길인지 아십니까? 내 삶에 하나님의 가장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모릅니다. 바로 그것을 성령님께서 안타깝게 여기시면서 기도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함께 이곳에 계시면서 말입니다. 그 결과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시고, 하나님 우편에서는 주님께서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그분의 선한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사명은 각자가 감당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바닷가를 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제자들도 그 뒤를 따랐을 것입니다. 왜냐햐며 베드로는 그 뒤에 따르고 있는 요한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0절에 보면
“20.베드로가 돌이켜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따르는 것을 보니 그는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오니이까 묻던 자더라
21.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하시더라
23.이 말씀이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제자는 죽지 아니하겠다 하였으나 예수의 말씀은 그가 죽지 않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머물게 하고자 할지라도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하신 것이러라“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의 부르심은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당해야 할 사명도 각자입니다. 이러한 예수님과 나 사이에 부르심과 따름은 그 누구도 방해할 수 없고, 그 누구와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까운 부부사이일지라도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사명은 각자가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은 다른 그 누구가 아닙니다. 나와 예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배타적입니다.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나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도 이 부분에서 만큼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비록 내 자녀이지만 그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을 우리가 건드리거나 흔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러니 그들의 사명이냐 어떠하겠습니까?
갑자기 여러분의 자녀가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간다고 할 때, 아니면, 중동의 이슬람지역으로 간다고 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우리 각자의 사명입니다.
이 부분에서 만큼은 우리가 홀로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감당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나중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나 혼자 서게 됩니다.
그래서 사명이란 부분 만큼은 누구를 의지해서는 안됩니다.
또 주변의 상황이나 사람들에 의해서 흔들려서도 안됩니다.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잊었겠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최춘선 할아버지의 영상과 책을 보았다. 내게 깊은 인상을 남긴 몇 장면 중 하나는 할아버지 방 한 모퉁이에 적혀 있던 찬송가 가사였다.
“온 세상 날 버려도 주 예수 안 버려.” 늘 불러서 입에 익숙한 찬송가 가사였지만, 영상을 보는 순간 그 가사가 내 마음을 쳤다. 내 가슴을 때린 또 하나의 고백은 “사명은 각자 각자”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에게 주신 주님의 사명을 누가 막을 수 있냐는 뜻이다.
통일이 올 때까지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니며 전도를 하시는 게 할아버지의 사명이라고 하셨다. 그 분은 이상한 차림으로 걸인처럼 다니며 지하철에서 전도를 하셨다. 엄동설한에도 신발을 신지 않고 맨발로 다니셨다.
그 행색이 정상인은 아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투와 이상한 전도지.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향해 미쳤다며 손가락질했다. 하지만 미쳤다는 소리를 들어도, 손가락질을 당해도, 그것이 할아버지의 사명이었다.
누구도 그 분이 오래전 동경에서 유학을 한 지식인이고 목사라는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 분의 행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도전과 은혜의 눈물로 할아버지를 대했다.
이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 알려진 할아버지의 비밀. 할아버지는 버젓이 성공한 자녀들, 좋은 집, 든든한 학벌, 고마운 아내, 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사명의 길을 가셨다.
할아버지는 집이 아닌 사명을 감당하는 자리, 곧 지하철 한구석에서 주께로 가셨다. 이 땅에서 사는 마지막 날도 그 사명을 다하시기 위해 맨발로 거리에 나오시고 지하철을 타신 것이다. 지하철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할아버지의 발을 만져보고 싶었다.
“엄동설한에도 동상이 없어요. 추운 줄 몰라요.” 할아버지의 한 마디 한 마디는 가슴을 때리고 마음에 박힌다. 왜 춥지 않겠는가. 그 발은 여러 번 동상과 상처와 고난을 겪은 발 같았다. 오직 하나, 하나님이 주신 사명의 길을 가기 위해 할아버지는 자기의 추움도, 발의 고통도,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마다하지 않았다.
마치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그 못 자국 난 손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것 같은 느낌이다. 내가 만난 진짜 하나님의 사람이다.
이 땅에 살면서 그런 사람을 만나볼 수 있을까? 나의 의문에 하나님이 할아버지를 소개해주신 것 같았다. 지금도 나는 이분의 영상과 책을 본다. 볼 때마다 나는 여전히 이분으로 말미암아 심장이 뛴다.
말할 수는 있지만 그대로 살지는 못 하는 게 우리다.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는 말씀은 어떤 유창한 언어로 구사해도 떠도는 메아리가 될 것이다. 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삶으로 말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삶은 그들이 이 땅을 떠난 후에도 누군가의 심장을 뛰게 한다.
의인의 믿음은 이런 것이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을 온 맘으로 예배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나를 드리며 살지만, 이 땅이 나의 집이 아니고, 나의 고향도 아니며, 나의 창고도 아닌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이 땅의 기름진 삶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아이들의 가방을 무겁게 하지 않는다. 성공을 위해 몸을 버려 가며 밤낮으로 뛰지도 않는다.
이 땅은 지나가는 곳이다. 우리가 정말 바라보는 땅은 하늘의 본향이어야 한다. 최춘선 할아버지는 그렇게 사셨다. 이 땅이 아닌 주님이 계신 그 본향을 위해.
-이시온 선교사 “나를 떠나지 말라 중에서(규장)”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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