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03-14 23:42

요한복음 강해 1.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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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1. 말씀으로 오신 하나님/2016.3.13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5.빛이 어둠에 비치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오늘부터 요한복음 강해를 시작하겠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어려운 책이 무엇인가 했을 때 그것은 요한복음입니다. 요한복음만큼 심오하고 어려운 책이 없습니다. 반면 성경에서 가장 쉬운 책이 무엇인가 했을 때 그것 또한 요한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권하는 책이 요한복음이기도 합니다. 어떤 신학자가 말한 것처럼 요한복음은 어린이가 건너갈 만큼 이해하기 쉽고 코끼리가 헤엄칠 만큼 깊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쉽게 이해하고 설교할 수도 있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그 내용의 깊이가 너무 방대하여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도 많습니다. 그만큼 이 책이 아주 정교하게 구성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단어나 문장 하나하나가 깊은 영적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이 책의 저자는 요한입니다. 성경에는 요한이 두 사람 등장하죠. 세례요한과 사도요한입니다. 이 책은 사도요한이 쓴 것입니다. 요한복음 21:24절에 보면 이 글을 쓴 사람이 최후의 만찬석에서 예수의 품에 의지하여 주님을 파는 자가 누구이니까 묻던 자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직접 밝히지 않고 예수께서 사랑하는 자라고 소개하고 있죠.
요한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더불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핵심 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중요한 순간에는 이 세 사람을 따로 데리고 가시죠. 대표적으로 변화산 사건 때 그랬었습니다. 
요한은 야고보와 형제입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이죠. 예수님께서는 이들에게 보아너게 즉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주십니다. 성경에 보면 그의 가족 전체가 예수님의 사역을 도왔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27:56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그 곁에 누가 있었는가 하면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그는 예수님과 각별했던 사이 같습니다. 요한복음 19장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자신의 어머니인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요한복음 19:26-27절에 보면
“26.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왜 요한에게 마리아를 부탁하셨을까?
그것은 아마도 요한이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오랜 산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기록연대를 AD85년에서 90년까지로 보니까 90세 이상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가 쓴 성경책이 요한복음, 요한1,2,3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입니다.

 

이 책의 기록목적은 20장 31절에서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말씀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두 가지를 말하고 있죠? 첫 번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두 번째는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천 년 전에 팔레스타인 땅에서 33년을 살고 십자가에서 죽었던 한 인물에 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이름이 예수인데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전체에는 예수가 하나님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있음을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분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그 예수가 하나님이신데 그것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보면 어떤 사본은 이 구절을 미래형으로 쓰기도 하고, 또 어떤 사본은 현재형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이것이 어떤 차이인가?  

 

만일 미래형으로 본다면, 아직 예수가 하나님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깨닫고 믿어 생명을 얻게 되는 즉 그 목적이 바로 전도를 위한 것입니다.
반면 현재형으로 해석하면, 이미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이 책을 다시금 읽고 묵상함으로 더 확실하고 분명하게 깨닫고, 그래서 그 분을 더욱 잘 믿어, 영생의 풍성함을 누리게끔 하는 교육적인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그 목적이 조금 차이가 있죠?
우리는 이 두 가지의 견해를 다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으신 분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현재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즉,  우리가 앞으로 요한복음을 공부하면서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더 확신있고 분명하게 깨닫게 될 것입니다. 더욱 그 분을 믿게 되고 의지하게 됨으로 하나님의 생명이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 10:10절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얻을 뿐만 아니라, 더 풍성히 얻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데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풍성히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생명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생명은 병상에 누워 가느다란 호스에 산소를 공급받아 살아가는 생명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생명은 청년의 기상으로 활기있게 살아가는 생명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요한복음을 공부하게 되면 그 하나님의 생명을 풍성하게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우리가 믿는 만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크게 네 부분으로 나뉩니다.
첫째는 서론으로 1장입니다. 서론은 머리말인 1:1-18절, 그리고 증언들인 1:19-51절까지로 나뉩니다. 그리고 본론으로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 1권은 표적들의 책으로 2:1-12:50입니다. 그리고 제2권은 영광의 책으로 13:1-20:31절입니다. 마지막은 부록인 21장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요한복음은 “태초에”로 시작됩니다. “태초에”라고 하면 뭐가 떠오릅니다. 창세가 1장 1절이 떠오릅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요한은 지금 요한복음을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의 사건을 기억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실 때에 말씀이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여기서 말씀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을 말씀이라고 표현하는 것일까요?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해도 될 텐데 말씀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것은 요한복음이 당시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헬라인들을 대상으로 쓰여 졌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말씀”이라는 단어는 원어로 “로고스”입니다. 이 “로고스”라는 단어는 헬라인들이 사용하던 철학용어였습니다. 로고스는 합리적 생각과 그 생각의 외적 표현인 말을 뜻합니다. 이 로고스는 우주에 편만한 이치이며, 그것의 씨가 인간 영혼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우주의 로고스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 이치를 터득하여 지식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로고스는 우주의 원리를 이해할 수 있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로고스를 통해서 지식을 얻습니다. 그리고 지식은 헬라철학에서 구원의 수단입니다.
그러니까 헬라사람들에게 있어서 로고스는 우주의 이치를 이해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이해하고 깨달아 앎으로 구원에 이른다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당시 헬라 철학에 푹 젖어 있던 독자들에게 너희들이 평소 “계시의 수단”이요, “구원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그 로고스가 오셨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다”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이 단순히 헬라 철학만을 염두에 두고 로고스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이 ‘로고스’라는 단어는 히브리 사람들의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지혜 사상을 나타낼 때도 쓰였던 단어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말씀으로 창조하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이라는 것이 창조의 수단이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말씀으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의 율법으로 잘 표현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말씀을 잘 연구하고 그 뜻을 터득해서 그 뜻에 맞게 살다보면 구원을 받게 받는 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은 창조의 수단이고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요한은 당시 유대교와 헬라철학을 융합하여 그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한 것이 바로 “로고스”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무한하신 창조주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들에게 어떻게 자신을 알리시고 이해시킬 수 있겠습니까?
저의 아이가 이제 110일이 좀 지난 것 같습니다. 이 아이에게 제가 아빠라는 사실과 너를 사랑한다는 것, 그리고 너를 보호하고 책임지는 존재라는 것을 어떻게 알게 하겠습니까? 그것은 아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낮추어 표현할 때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말과 행동으로 밖에 드러낼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줘”한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말과 행동이 수반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유한한 인간을 대상으로 자신을 드러내실 때 과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언어와 행동으로 밖에 자신을 드러내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인식의 한계 내에서만 하나님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 그것을 계시라고 하는데, 그 수단으로 말씀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두 가지로 나타내셨는데 하나는, 말씀으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행동인데 그것을 말씀을 통해 표현하신 것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창조됩니다. 그리고 그 빛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빛을 보면서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미루어 짐작해 봅니다. 그렇죠. 뜨거운 태양을 단 5분도 직접바라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광채는 얼마나 위대할까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을 수단으로 하나님은 자연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속에 아름다움이 있고 질서가 있고 신비함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당시 헬라철학자들은 로고스라고 불렀습니다. 즉 우주만물 가운데 우주적인 이치가 담겨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했으니까 이렇게 까지 밖에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우주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구원에 이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헬라철학에 물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로고스라는 것은 우주의 이치가 드러나게된 수단이고 또 그것을 깨닫게 될 때 구원에 이름으로 구원의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비로 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통해 예수님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 로고스(말씀)은 창조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구원의 수단이기도 합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주만물을 창조하심으로 자신을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인류 역사 가운데 드러난 것이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돌판에 새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인간들의 언어를 통해 기록하여 남기시고 그것을 사람들로 하여금 이해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즉 로고스(말씀)은 구원에 이르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잘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로고스(말씀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수단이며 구원에 이르는 수단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로고스라는 단어를 사용해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헬라철학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바로 창조주이시며 그분이 세상의 원리와 이치시며 그 분을 알 때 구원에 이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유대인들에게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이시기에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에 이른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전체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보여주고 설명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기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내주셨고 그를 통하여 말씀하셨고 행동하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인격과 삶 그분의 말과 생동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2장의 포도주가 떨어진 혼인잔치를 회복시키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기쁨의 잔치를 일으시키는 분임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죽은 나사로를 예수님의 모습은 죄와 허물로 죽은 우리를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용서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분 자체가 하나님이시고 또한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 외에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이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그리고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하면...
“7.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그러니까 빌립이 말합니다.
“8.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러면 족하겠나이다.”
예수님이 대답하시죠?
“9.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이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요한복음의 초점이 여기 있습니다. 인간이 되신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자비와 용서의 은혜, 부활의 능력과 권세 그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4절에 보니까...그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우리를 죽은 존재로 봅니다. 에베소서 2장의 말씀처럼 우리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들입니다.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와 같은 자들입니다. 죽은 나사로와 같은 자들입니다. 뿌리 뽑힌 나무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명력으로 얼마간 살아갈지 모르지만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생명을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가 죄로 말미암아 죽었기에 인류 밖에서 인류를 위한 생명이 와야 되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모습은 빛으로 표현됩니다. 왜 빛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어둠이기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어둠속에 갖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참 모습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세상도 알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5:8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임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골로새서 1:13절에서 우리가 흑암의 권세 아래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빛이 우리 가운데 비추어지면 어떻게 됩니까?

가장 먼저, 자신을 자각하게 되는데 그것은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 순간 이미 우리에게 빛이 비추인 것입니다.   

 

요한1서
7.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8.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빛이 비추인 것 만큼 우리는 자신을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허물과 더러운 죄의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빛되신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을 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분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주님을 더욱 사랑하고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더욱 의지하고 기대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을 위해 살게 될 것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알고 그분을 믿어 생명력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책입니다.
이제 돌아사셔서 요한복음을 정독하시고 시간이 있을때마다 펼쳐 읽으시면서 예수님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으로 인도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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