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6-11-22 23:06

요한복음 강해 36. 세상의 빛, 예수 그리스도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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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36. 세상의 빛 예수/2016.11.20.

    

요한복음 8:12

12.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한복음 강해 26번째 시간으로 “세상의 빛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전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내용이 어떠한 맥락과 흐름에서 주어지고 있는지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내용은 예수님께서 자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증언하신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초막절이라는 유대인의 명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 살펴본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사건은 성경원문에는 없던 것인데 이곳에 삽입되었다고 말씀드린바 있습니다.

이것이 지금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 하면, 7장 3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초막절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 부분은 이미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8절이 의미하는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그 배”라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자들의 배이기 보다는 “예수님의 배”, 즉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이루신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생명수가 흘러나온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자 그리고 오늘 본문이 연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8장 12절에 보면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또 말씀하셨다고 하시죠.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는 말씀을 하시고 이어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7장 37절에 보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외쳐 이르시되”. 모든 사람들이 주목할 수 있도록 외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어디에서 하셨는가 하면, 8장 20절에 보면 성전의 헌금함 앞에서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간음한 여인의 사건이 왜 이곳에 삽입되었는가? 그것은 7장의 예수님이 생수의 근원이라는 것과, 8장의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는 것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그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되시죠? 예수님이 생수의 근원이다. 세상의 빛이라 라고 하면 좀 추상적입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하면 이러한 말씀이 구체적으로 와 닿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을 용서하신 사건을 보여줌으로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다시 지난 주 사건을 보시기 바랍니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이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셨던 예수님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들 안에 숨겨져 있던 죄를 들추어 내셨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무엇으로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빛을 비추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어떻게 됩니까? 어른으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들에게 이르기까지 모두가 사라져 버립니다. 빛이 비추자 어둠이 물러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곳에 여전히 서 있던 여인, 그가 누구입니까?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여인입니다. 죽음의 상태에 있던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다가가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그녀를 용서하시고 새롭게 출발하세 하셨던 것입니다.

 

죄에 용서의 선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지금 어디에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성전인 것이죠(8:2). 성전이 무엇입니까?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유일한 장소, 짐승을 드리는 속죄 제사를 통해 우리의 죄가 사함 받는 곳입니다. 그곳에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참 성전 되신 예수님께서 그 배에서 나오는 생수를 통하여 그녀의 모든 죄를 씻기신 것입니다. 그 배에서 나오는 생수가 무엇입니까? 구약의 그림으로 하면, 에스겔이 본 환상입니다. 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입니다. 요한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목격했던, 그 배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인 것입니다. 즉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신 사건이 우리의 죄를 깨끗하게 하는 성소의 물이 터져 나온 사건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간음한 여인이 성전에서 예수를 통하여 용서함을 받은 사건이, 이러한 모든 내용을 하나의 그림으로 보여줌으로 말미암아 예수가 생수의 근원이며, 또한 동시에 세상의 빛이심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초막절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초막절에 행했던 여러 가지 의식중에 하나가 먼저는 제단에 물을 붓는 것입니다. 실로암 연못에서 떠온 물을 성전앞 제단에 붓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들의 조상들이 광야에서 반석을 통하여 물을 먹었던 것을 기념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기우제로 하나님께서 비를 주셔서 자신들이 농사하여 수확할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 또한 내년에도 때를 따라 비를 주시기를 염원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의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성전앞 뜰에 큰 기둥을 세우고 그곳에 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성전의 여인의 뜰에 약 23미터 되는 높은 기둥을 세우고 그 곳에 네 개의 촛대와 금대접이 놓여있습니다. 그리고 네 개가 사다리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횃불이 타오르게 되는데 기름을 올리브유를 사용하고 심지는 제사장이 입던 낡은 예복으로 합니다. 의식이 시작되면 4명의 젊은 제사장 훈련생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기름을 붓게 됩니다. 그리고 불을 붙이면 축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손에 횃불을 들고 춤을 추고 노래를 하면 축제를 즐겼다고 합니다.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도 그 불빛을 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이러한 의식을 했던 이유는 조상들이 출애굽 하여 광야를 지날 때 하나님께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일을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의식이 진행되고 초막절에 예수님께서 외치신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에서 7개의 “나는...이다 시리즈 중에 두 번째에 해당합니다. 첫 번째는 오병이어 사건이후에 ”나는 생명의 떡이다“라는 것이었죠. 요한복음에는 총7개의 “나는..이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은 저자 요한이 이 글을 치밀하게 구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나는..이다”라는 의미는 영어로는 “I am”. 이고 원어로 보면 “에고 에이미”입니다. “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은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름을 계시하실 때 사용하셨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나서 출애굽을 명하시면서 자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에고 에이미”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나라말로 번역할 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을 때의 의미는 자신은 하나님으로서 세상을 비추는 빛이라고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너희 조상들을 인도하였던 그 하나님,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약속의 땅까지 인도하신 그 하나님이 바로 ‘나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 말씀을 횃불 의식을 배경으로 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할 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빛에 대한 이해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빛이라고 할 때 그것이 담고 있는 의미는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빛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세기 1장입니다. 
창세기 1:1-5
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빛은 태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태양은 넷째 날에 창조하십니다. 태양이 없어도 빛은 존재합니다. 불도 빛을 발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빛이 오기 전에 모습이 어떠한가 하면 땅이 혼돈하고 공허했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풀면 틀도 없고 내용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프레임도 없고 콘텐츠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임하자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땅이 된 것입니다. 혼돈과 공허가운데 빛이 임하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좀 쉽게 이렇게 설명 드리겠습니다. 깜깜한 밤에 여러분이 이 예배당에 들어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때 전기불을 켜자마자 이곳에 있는 모든 사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의자는 널브러져 있고 강대상은 쓰러져 있고 화분은 깨지고 온통 흙이며 쓰레기들이 가득 차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빛이 들어오자 혼돈과 무질서가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왜 이러한 것이 혼돈이고 무질서로 보인 것입니까? 강대상이 쓰러져 있고 화분이 깨어진 것을 왜 혼돈이고 무질서로 규정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인식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식 가운데는 정돈, 질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더라고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바르고 아름답고 조화로운지에 대한 그 인식을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그러한 것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을 근거로 혼잡스럽다 또는 무질서하라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이 “옳다” 또는 “그르다”는 것을 판단할 수 있으려면 옳고 그름의 근거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비추자 옳고 그름이 판별되어 집니다. 아름다움과 추함이 판별되어 집니다. 질서와 혼돈이 판별되는 것입니다.

이제 예배당에 불을 켜고 강대상을 세우고 화분의 흙을 치웁니다. 의자를 가지런히 세워놓습니다.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예배당의 목적에 맞게 정돈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기에 가장 최적의 상태로 의자를 배열하고 모든 기물을 배치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공간은 제가 배치한 것입니다. 목적에 맞게 모든 것을 조화롭게 배치한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좋다, 예쁘다, 아름답다”라는 것입니다. 

 

빛, 나는 누구인가? 를 밝혀줌
자, 혼돈가운데 빛이 비추면 사물의 정체가 드러납니다. 빛이 우리가운데 비추자 첫 번째로 깨닫게 된 것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입니다. 내 모습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내가 더럽고 추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역겨움을 느낍니다. 내가 내 자신의 모습을 보니까 역겨울 정도로 너무 추악한 것입니다.
어둠 가운데 있을 때는 내가 나를 모릅니다. 그러나 빛이 비추자 내 실체를 정확히 보게 되었는데 너무나 추악한 죄인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존재가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변화의 시작입니다. 우리 삶의 변화는 내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정확히 아는 그 시점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인인지, 그리고 그 죄에 대항하여 얼마만큼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새롭게 세우기 시작합니다. 무엇을 근거로 세웁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동안의 내 삶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삶의 목적과 가치기준을 근거로 하고 있었습니다. 또는 내가 내 자신의 삶에 목적과 기준을 세워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하여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빛이 비추자 나를 지탱하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헛되고 무의미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어둠이었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삶은 어둠 가운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빛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아 거기서부터 나의 삶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빛, 존재의 목적을 밝혀줌
그럴 때 두번째로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왜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알지 못하면 우리 삶의 방향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목적지가 분명해야 가는 길을 정하지 않습니까? 예배당 불을 켰을 때 이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먼저 파악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 그 목적에 맞게 물건들을 정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빛 아래서 우리 존재의 목적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하여 우리 삶의 목적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내가 살아가는 목적이구나. 그리고 그 분 안에서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구나.” 이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목적이 정해졌으니 우리 삶의 방향도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야될지 보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상황속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꼭 목사와 선교사가 되는 길을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현재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입니다. 직장인이면 그 직장속에서, 학생이면 학생으로서, 가정주부이면 주부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을 걸어갑니다.

빛을 따라가는 것
중요한 것은 이때부터입니다. 우리 삶의 목적과 방향이 정해졌으면 이제 그 길로 가야 되는데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2절에 보시면,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나서 “나를 따르는 자는” 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광야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불기둥을 따라 간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적용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우리 삶에 원칙과 질서를 세우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의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고 말하지 않고 원칙과 질서를 세운다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공허와 혼돈상태였습니다. 그때 말씀이 임하자 하나님 보시기에 아릅답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꽃을 볼 때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이러한 아름다움을 분석해 보면 그것은 조화와 질서입니다. 사물이 조화와 질서를 가지고 있을 때 아릅답습니다. 우주를 보아도 무질서하고 불규칙하게 보이지만 완벽한 조화와 질서 속에서 움직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물의 입사귀와 꽃잎은 완벽한 조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겨울에 내리는 눈꽃송이 하나만 보아도 얼마나 정교하고 완벽한 조화를 가지고 있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질서 있는 삶 조화로운 삶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 삶에 원칙과 질서로 자리 잡을 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간음한 여인이 현장에서 붙잡혀 왔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성적인 욕망은 결혼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그럴 때 가장 안정되고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그런데 그 원칙과 법을 깨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삶의 질서와 조화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질서가 파괴되면, 부모와 자녀의 질서가 파괴되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이 확장되어 우리를 둘러싼 공동체도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빛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명을 거는 것입니다. 성경의 진리가 우리 삶에 원칙과 질서로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합니다. 제가 자주 말씀드리지만, 원칙이 없으면 다급한 상황에서 흔들립니다. 갈등합니다. 우리가 흔들리고 갈등한다는 것은 원칙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되는지 생각해야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원칙을 적용할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원칙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원칙을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 삶에 진리의 말씀으로 세워진 수많은 원칙의 기둥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기둥들을 반복해 갈 때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견고하게 세워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고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어둠에 다니지 않습니다.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길 수 없습니다. 참빛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자 사람들의 죄가 폭로되어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그 빛을 십자가에 죽여 꺼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 빛을 더욱 찬란하게 비추셨습니다. 


요한계시록 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광야와 같은 이 세상에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도 그 빛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비추는 참빛이 아닙니다. 발광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예수의 빛을 따라가면 그 빛을 반사하는 반사체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 14절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빛을 반사하여 세상에 비출 때 세상은 우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 사랑하는 모습을 통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될 것이고, 우리의 용서함을 통하여 세상은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할 것입니다. 우리의 정직함과 겸손함을 통해 세상은 자신의 어둠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빛으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참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면 그 빛 가운데 거하며 또한 그 빛을 반사하여 세상을 비추시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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