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42. 맹인의 개안의 통해 살펴본 죄인의 구원/2017.1.15
요한복음 9:1-12
1.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3.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4.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5.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6.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7.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8.이웃 사람들과 전에 그가 걸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이르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9.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라 하며 어떤 사람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자기 말은 내가 그라 하니
10.그들이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11.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12.그들이 이르되 그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 태어나면서부터 예수께서 태어나면서부터 맹인된 사람을 고치는 사건을 통해 인간의 고난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해는 인과율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또 하나의 커라단 거시적인 시선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앵글로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이 사건이 의미하는 영적의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본문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는 능력이 있는 분이라던가, 또는 소경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는 말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은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구원은 마치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가 눈을 뜨는 것과 같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맹인, 즉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또한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맹인과 다름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 자신을 알게 되는데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에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나는 누구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그리도 또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인 것 같고 내가 경험하고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맹인들이 코끼리를 만지면서 이렇게 말하죠. 다리는 만지던 맹인은 코끼리는 둥그런 원통 같다고, 꼬리를 만지던 사람은 밧줄이라고 말합니다. 상아를 만진 맹인은 무처럼 생겼다고 말하지요.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는 방식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진리를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맹인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찾아오심으로 시작됩니다.
기독교의 진리의 핵심은 하나님이 죄인을 찾아오신다는 것에 있습니다. 맹인이 자신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눈을 뜨게 할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나의 노력을 통해 얻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한다고 하여도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죄인들에게는 구원을 향한 의지도 없고 그 방법도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찾아오심으로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맹인은 예수님께 나오지도 않았고 눈을 뜨게 해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일방적으로 그의 눈을 뜨이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까?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았나요? 나의 힘으로 도무지 어쩔 수 없는 삶의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로 나왔습니까? 또는 태어나보니 부모님이 믿음이 신실한 분이어서 자연스럽게 예수님을 믿은 분도 있습니다. 또는 어릴 적 성탄절행사에 선물 받고 싶어 교회에 나온 분도 있습니다.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교회에 갔다가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내 의지와 내 선택으로 하나님께 나온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지 않으면 그 누구도 하나님께로 나올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그분께서 일방적으로 나를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를 특별히 선택하시고 부르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해서 된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선택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나를 선택하셨을까요? 내가 다른 사람보다 착한 일을 많이 했거나 신실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내가 어떤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착각하는 것 중에 하나는 내가 하나님의 호의를 받을 수 있는 어떤 조건들을 많이 만들어 놔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것이 우리 편에서 어떤 조건에 충족이 되어서가 결코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을 받은 이유는 하나님이 이런 나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 외에는 달리 어떤 이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왜 하나님께서 세상에 수많은 민족과 족속이 많은데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는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명기 7:7-8
7.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엡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그것 밖에는 설명이 안됩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훨씬 착하고 괜찮은데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 것입니다. 나를 향한 그 사랑 때문에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게 하사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고통스러운 순간을 허락하시고 다른 곳이 아닌 교회에 발을 디디게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연히 교회에 나오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신앙의 여정 가운데 계속해서 깨닫는 것이 이것입니다.
어떻게 나를 사랑하셨는가?
세 번째, 우리의 눈을 열어주심
이러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찾아오심으로 구원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어두웠던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창조주의 능력으로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맹인의 눈을 뜨게 하실 때 침을 진흙에 이겨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리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굳이 이러한 방법으로 그렇게 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 아담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창조하신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그와 같이 우리의 구원은 창조주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다는 것은 눈이 없거나 아니면 눈이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한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웃들이 그를 알아보지 못한 것으로 볼 때 아마도 눈이 없었던 상태였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눈을 창조하여 붙여주신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에스겔서 37장에 보면 마른뼈의 환상이 등장합니다.
성령께서 그를 골짜기로 데리고 가십니다. 그곳에 마른뼈가 즐비한 것입니다. 그때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5.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6.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또 내가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리라 하셨다 하라“
그러자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입니다. 그러나 생기가 없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생기가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 말씀을 대언합니다.
“10. 이에 내가 그 명령대로 대언하였더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매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
이 부분은 제가 자주 인용해서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이와 같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른뼈와 같은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 임할 때만 살아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맹인이었던 우리가 눈을 뜨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이 임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은 재창조의 역사인 것입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고, 이것을 요한복음 3장에서는 거듭남, 중생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5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7.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구원은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잘 보십시오. 맹인은 예수님을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눈을 뜨이게 하신 분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라는 이름과 그 목소리만 알뿐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합니다. 11절에 보면,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묻는 이웃사람들에게 “예수라는 그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고, 바리새인들에게는 그가 “선지자(17절)”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해가 온전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달려있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처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이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 때문에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먼저 우리를 구원하시고 알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먼저 죽어있던 우리를 살리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닫혔던 눈을 열어주시고 하나님을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네 번째,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셨을까요? 진흙을 바른 것만으로는 안되었을까요? 여기에는 중요한 영적의미가 있습니다.
7절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여기서 요한은 실로암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괄호를 통해 굳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요한복음에서 보냄을 받았다고 할 때 가장 먼저 연상되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7장
28.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9.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7장의 초막절 사건은 9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7장을 강해할 때 초막절 때 행해졌던 물의 의식을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길러와 제단 앞 은잔에 붓습니다. 그러면 물이 흘러넘쳐 제단 앞 계단을 흐르게 됩니다. 이러한 당시의 의식은 구약에서 광야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함으로 생명을 주셨던 사건과, 에스겔서 47장의 성소로부터 흘러내린 물이 죽어 있는 모든 만물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이 최고조에 달할 때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서서 외치셨습니다.
요한복음 7:37-39
37.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8.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9.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러한 말씀들을 염두하고 실로암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생명을 주는 그 물의 근원이 실로암으로 상징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실로암은 보냄을 받은 분, 즉 예수 그리스도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능력과 그 분의 찾아오심은 결국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사건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유일한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는 것은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씻겨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창에 찔려 죽으실 때 배에서 터져나온 물과 피가 우리의 죄를 씻고 생명을 주는 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요한만이 피와 물이 나오더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9: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우리의 구원의 모습을 구원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것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이사야 12:2-3
2.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이 구원의 우물 실로암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의 십자가의 죽음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다섯 번째, 눈을 뜨다.
구원을 맹인이 눈을 뜨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떠보니 세상도 보이고 내 자신도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구원하신 분도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이 회개에 앞서는 것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우리가 눈을 뜨기 전에는 회개하지 않습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로 우리의 삶의 방향을 돌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른뼈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 들어와야 가능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자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눈을 떠보니 내가 살아온 인생이 헛되고 허무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 상태였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일방적인 부르심으로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러자 우리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고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가를 보게 되었습니다. 내 자신의 비참함과 초라함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 세상에 아무런 소망이 없음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자 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본다는 것은 믿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믿음이 너무 실제적이기에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고난의 끝에 고백하기를
욥기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우리는 이제 주님을 봅니다. 주님을 믿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힘과 의지와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내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눈을 떠서 이 세상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임을 봅니다.
우리를 눈을 떠서 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를 봅니다.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보내주신 그 하나님,
그분을 보게 될 때, 내 자신의 가치를 깨닫습니다.
우리는 눈을 떠서 내가 내게 주어진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 성도들, 이웃들...
그들이 얼마나 귀한 존재들인지 봅니다.
우리는 눈을 떠서 세상 사람들이 가치 있어 하는 부와 명예가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봅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작은 것들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봅니다.
우리는 눈을 떠서 천국을 봅니다.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우리의 호흡이 다하는 날 영원한 천국에서 눈을 뜰 것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를 반겨 안아주길 예수 그리스도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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