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57.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31-38
31.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3.작은 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것이나 일찍이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내가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34.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35.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36.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37.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38.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오늘 말씀 31절을 보니까 “그가 나간 후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가롯유다를 말합니다. 전에 언급한 것처럼, 예수님께는 잡히시기 전날 밤에 제자들에게 세족식을 거행하신 후에 최후의 만찬을 하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고 하셨고, 내가 떡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떡조각을 가롯유다에게 내미셨습니다. 가롯유다는 그것을 취하자 마귀가 곧 그를 장악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는 이제 자신이 하려는 계획, 즉 예수님을 팔려는 계획을 실행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가롯유다는 이제 관원들과 유대 지도자들과 함께 예수를 잡으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열한명의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말씀을 하십니다. 이를 다락방강화라고 부릅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셨고 인자도 영광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또한 곧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고 인자도 영광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31.그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도다
32.만일 하나님이 그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그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31절에 지금 인자가 영광을 받았고 하나님도 인자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다고 하십니다.
32절에는 하나님이 그, 즉 인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말미암아 예수님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이 선뜻 이해되지 않습니다. 가롯유다가 나간 후에 예수님은 왜 이러한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그리고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먼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은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이르는 전과정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사건입니다. 또한 인자도 하나님으로 부터 영광을 얻게되는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고 인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얻는 것은 특별히 십자가 사건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진행되는 부활과 승천의 과정을 영광의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7:39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요한복음 12:16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요한복음 7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셔서 성령이 그들에게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성령이 그의 제자들에게 임하게 된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의 일입니다. 즉 영광을 받았다는 의미가 예수님의 죽으심, 부활, 그리고 마침내 승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일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 12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나귀를 타신 의미를 사람들이 모르다가 나중에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게 된 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승천이후 성령이 오심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최후의 만찬석에서 예수님께서 이제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께서도 영광을 얻으셨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의 사건이 이미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예수님은 이미 일어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시공간에 대한 개념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우리 인간은 시공간의 제약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 있으면서 집에 있을 수 없습니다. 공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고 있지만 과거나 미래에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시간에 제약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십니다. 100% 하나님이시며 100% 인간입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전지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이시기에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나 계십니다. 그런데 동시에 인간이십니다. 그래서 인간이 느끼는 희로애락을 느끼십니다.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시공간의 제약 속에 묶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인간이신 예수님이시기에 때로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미래의 사건을 현재의 사건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공간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으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중학교 국어시간에 전지적 작가시점에 대하여 배운 적이 있습니다. 소설가는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의미입니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과거 현재 미래를 알고 있습니다. 작가는 등장인물이 그가 무슨생각을 하고 있는지 까지도 알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처럼 전지, 즉 모든 것을 다 안다는 의미에서 전지적 작가시점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소설을 볼 때 현재를 보고 있습니다. 그가 결국 어떻게 되는지는 소설의 끝에 가서야 알게 됩니다. 그래서 흥미진진하게 때로는 초조하게 스토리를 읽게 됩니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에게 감춰져 있는 미래까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시각으로 현재를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전지전능하신 분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진실로 믿을 만하고 신뢰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을 잘 알고 계시고 미래까지도 알고 계신 분이라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입니까?
요한복음 8:13-14
13.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4.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우리는 여기서도 예수님의 시공간의 개념을 보게 됩니다. 그분은 역사 가운데 33년을 사셨지만 이미 영원 전부터 계셨던 분이셨고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왜 이 땅에 와야 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지, 아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누구의 말에 귀 기울이고 들어야 하는지는 명백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현재 가운데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것은 반드시 일어날 일이기에 그 말씀을 신뢰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비록 현재 일어나지 않았고 비록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될 것임으로 보는 것, 바로 믿음입니다.
히브리서 11:1
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렇게 현재에 살고 있지만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동시에 통찰하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지금까지의 말씀은 예수님이 어떠한 분이시고 왜 오셨는지에 맞추어서 이적을 행하시며 말씀하셨다면, 그리고 그 대상이 무리들이라고 한다면, 이제부터는 좀 다릅니다. 이제부터 하시는 말씀은 그분의 제자들, 오늘날로 하면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그 분의 자녀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룻유다가 빠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끝까지 사랑하셨지만, (요한복음 13:1) 끝내 악한 길을 선택한 가롯유다가 빠지고, 예수님의 섬김의 손길로 더러운 발이 씻긴
무리, 그들이 누구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발을 씻긴 것은 죄사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더러운 죄가 예수님의 십자가로 깨끗하게 된 것을 미리 상징적인 행동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바로 그들에게 하시는 말씀, 그 첫 번째가 바로 이것입니다.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을 하실 때 먼저 그들을 이렇게 부르십니다.
33절에 “소자들아” 이 말씀의 원문을 보면 teknia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여기에서만 쓰입니다.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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