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03-28 15:40

요한복음 강해 52.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joywoo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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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해 52.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 

 

요한복음 12:9-26
9.유대인의 큰 무리가 예수께서 여기 계신 줄을 알고 오니 이는 예수만 보기 위함이 아니요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도 보려 함이러라
10.대제사장들이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
11.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
12.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13.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14.예수는 한 어린 나귀를 보고 타시니
15.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16.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17.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18.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19.바리새인들이 서로 말하되 볼지어다 너희 하는 일이 쓸 데 없다 보라 온 세상이 그를 따르는도다 하니라
20.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22.빌립이 안드레에게 가서 말하고 안드레와 빌립이 예수께 가서 여쭈니
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25.자기의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전하리라
26.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9-11절은 어떤 배경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나사로의 부활 사건이후 예수님에 대한 명성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번져가고 있었습니다.
한편 종교지도자들은 산헤드린공회를 중심으로 모여 예수를 죽이려는 모의를 본격화하고 있었습니다.
때는 유월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이미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인파들이 모이고 있었고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소식들을 듣게 됩니다.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내어 쫒은 이야기며 오병이어 사건 등 그리고 마침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는 삽시간에 사람들에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대제사장들은 예수뿐만 아니라 나사로까지도 죽이려고 모의하기 이릅니다. 이유는 11절을 보시면 나사로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믿음은 참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죽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베다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존재 자체가 예수님의 그동안의 행적에 대한 진실을 입증하는 증거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실제였기 때문에 당시 정치, 종교지도자들은 긴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만일 군중들이 예수를 중심으로 들고 일어나 로마에 압제에 대항하기라도 하면 자신들의 입지도 위태로워 지기 때문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셨던 베다니로 다시 가셨고 그곳에서 잔치에 참석하셨습니다. 마리아는 그 잔치에서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부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반응으로 그렇게 하였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예수를 왕이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등극시키신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십니다. 나사로의 부활을 목격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고 예루살렘 성에는 예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유대인의 수많은 군중들이 모여 예수님을 기다립니다. 노인들로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을 맞이하러 기다립니다.
 
우리는 당시의 상황을 그려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사람들은 예수가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시켜줄 정치적 군사적 메시아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경제적 메시아로 알았습니다. 때는 유월절입니다. 유월절은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의 압제가운데 있을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모세의 인도로 애굽을 탈출한 날입니다. 다분히 민족적이고 해방의 분위기 충만했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은 그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나간 것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이끈 지도자가 입성할 때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가 로마군대를 몰아내고 로마제국의 지배를 종식시키며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회복시킬 것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러한 기대는 명절의 분위기와 사람들이 몰리면서 군중심리가 더해져 최고조에 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성에 입성하십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소리치며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흔들며 자신의 겉옷을 예수가 오시는 바닥에 펼쳐놓습니다. 그들은 목소리를 높여 외치기 시작합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군중들이 모였을 때 무엇을 외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구호나 외침이 그들의 기대와 소망을 압축한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호산나’의 의미는 ‘지금 구원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로마의 암울한 지배로부터 자신들을 구원해 줄 것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향하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라고 외친 것입니다. 다윗 왕 때에 태평성대를 이룬 것처럼 당신이 그러한 우리의 왕이십니다. 라고 외친 것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이러한 군중들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게 움직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어린 나귀를 타신 것입니다. 본문에는 어린나귀를 보시고 타신 것으로 되어있지만, 마가복음에 보면 좀 더 자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마가복음 11:1-7
1.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마가는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신 과정에 대하여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나귀를 타시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당시의 보편적인 인식으로는 예수께서 말을 타고 들어오셔야 어울립니다. 그것이 군중들의 열광적인 환호와 구호에도 어울립니다.
왕은 보통 위엄스럽게 말을 타고 옵니다. 말은 힘과 무력의 상징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기대했던 모습은 백마를 타고 위풍당당하게 들어오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굳이 귀찮은 과정을 통해 나귀를 준비시키십니다. 맞은 편 마을로 가서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를 풀어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귀를 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15절입니다.
“이는 기록된 바 시온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의 왕이 나귀 새끼를 타고 오신다 함과 같더라”

여기서 ‘기록된 바’라는 것은 스가랴 9장9절을 의미합니다.


스가랴 9장 9절을 한번 보시겠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을 의식하시고 그것을 성취시키시는 선지자적인 행위를 하시는 것입니다. 스가랴서에서 너희를 위한 왕 그분은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실 분이 오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 그 왕은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신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나귀새끼를 타신다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이제 성취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스가랴서에서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 무엇 때문에 나귀를 타시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째는 타귀를 탄다는 것은 온유와 겸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의 왕으로 오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 나귀와 노새는 평화시에 위대한 인물들이 이동할 때 사용된 짐승이고 말은 전쟁할 때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사들의 아들들이 나귀를 타고 다녔다는 기사가 사사기 10장에 기록되어 있고, 사무엘하17장23절에 아히도벨이 나귀를 타고 고향에 내려갔다는 기록, 사울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을 만나러 예루살렘에 갈 때 나귀를 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나귀를 타신 다는 것은 평화시에 오시는 메시야에 대한 약속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쟁을 일르켜 민중을 해방시키는 메시야가 아니라 우리에게 평화롭게 오셔서 구원을 주시는 메시아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스가랴서에 보면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는 조금 다릅니다. “시온의 딸의 두려워하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바뀐 이유는 무엇일까요?

스가랴에서는 왕이 오시기 때문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되어있고, 이제 그 예언되었던 예수님께서 이 역사 가운데 오시자 ‘두려워하지 말라’로 바뀐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엇이 두렵기에 두려워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오시는 것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은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메시야가 온다는 것은 즐거운 일입니다.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이나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가 원하는 구원자는 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내 삶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분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번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우리 삶에 풍요와 안정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구원자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있는 여러 가지 문제들, 인간관계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재정의 문제, 진로의 문제 등 이러한 문제들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줄 메시야, 그분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메시야가 우리 삶에 오신다고 한다면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까? 그런데 무엇이 두렵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그것에 대한 힌트가 16절에 주어지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이것이 예수께 대하여 기록된 것임과 사람들이 예수께 이같이 한 것임이 생각났더라”

제자들이 이 사건이 의미하는 것, 즉 예수가 나귀를 타고 입성하신 것을 기록한 스가랴서의 말씀을 말합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성취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예수께 한 것이 무엇입니까? 호산나 다윗을 자손이여 하며 외친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당시에는 몰랐다가 언제 깨달았는가 하면, ‘예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 원어적으로 보면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은 신 바로 그 때라는 의미입니다. 그때는 바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사 승천하신 그때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을 목도하면서 그들은 예수님의 전 생에가 성경의 성취임을 깨달았고 그 중에 바로 예루살렘 입성도 해당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당시의 사건을 되돌아보니까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기뻐하고 즐거워 할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은 두려움의 사건이었습니다. 왜그럴까요? 그것은 앞으로 펼쳐지게 될 사건들이 두려운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두려운 일이란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죽으러 그곳에 들어오시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러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 당시에 가장 두렵고 끔찍했던 형벌이 십자가형이었기에 이제 그것을 바라보는 시온의 딸들, ‘시온의 딸’은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히브리적 표현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고 죽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공의로운 왕이며 구원자로서 너희에게 온 것은 맞지만 너희가 기대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죽으러 온 왕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생각하는 구원은 너희의 삶의 어려움들을 해결해 주고 삶의 풍요를 가져다주는 그러한 구원자를 기대하지만, 나는 죽으러 온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있어 진정한 구원이란 죄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죄로 말미암아 받게 될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의 구원이기 때문에 그것을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받아야 될 그 심판을 대신 받아야하기에 그것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에 내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온의 딸아,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장면에 집중하길 원합니다.


한편에서 자신들의 기대와 소망을 담아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있는 사람들, 그리고 또 한편에서 이제 몇 일후에 참혹하게 죽을 것을 알고 오시는 예수님의 모습.

여러분! 때로는 우리 삶에 예수님께서 우리의 기대와 소망과는 전혀 다르게 찾아오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백마 타고 오실 승리의 예수님을 기대했는데 그분은 초라한 모습으로 우리 인생에 다가오십니다. 우리는 성공을 기대했지만 주님은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을 기대했지만 주님은 질병의 고통을 주시기도 하시고 죽음으로 인한 이별을 맛보게도 하십니다. 자녀들의 형통함을 기대했지만 주님은 그 자녀로 인해 피눈물을 흘리게도 하십니다.

그럴 때, 여러분 어떻습니까? 두렵습니다. 그 고통스런 현실이 계속될 것만 같아 두려운 것입니다. 또한 주님을 신뢰하고 믿고 기다리며 기도하는데 여전히 변화될 것만 같지 않는 미래가 두려운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분이 십자가로 나갈 때 그를 구원자로 믿고 따랐던 자들이 두려워할 것을 알았습니다. 특히 예수님 곁에서 그분을 따랐던 제자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가까이 모셨던 그들, 그들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잡혀가고 채찍에 맞고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에 오르실 때 그것을 보면서 얼마나 두려웠을 까요? 예수님 손에 못이 박히고 십자가에 달려 그 고통 속에 매달려 계실 때 그들은 또한 얼마나 두려웠을 까요?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 가운데 두려움의 현실들은 계속될 수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따랐던 수많은 무리들은 떠났고 제자들마저도 흩어져 버립니다. 예수님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구원자가 아님을 알고 나서 그들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립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후의 성경의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느순간부터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두려움의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심각해져 갑니다. 예수를 주로 믿는 다는 것 때문에 붙잡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원형경기장의 사자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흩어졌던 제자들은 모였고 그들은 예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요?
두려움에 떨며 흩어졌던 제자들과 무리들이, 어떻게 다시 모이게 되었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메시야라고 전하며 그분을 예배하기 시작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감람산에서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은 진정한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확고하게 믿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바로 담대함을 주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시온의 딸아 두려워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서 얻으실 그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잠깐 두려움가운데 있을 수 있겠으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광으로 가는 과정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찾아온 헬라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23절과 24절입니다.
“23.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24.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기 위해 오셨지만 그 뒤에 있을 영광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밀알처럼 땅에 심겨져 죽음으로 마침내 많은 열매를 맺히는 것처럼, 자신의 죽음 뒤에 찬란한 영광이 있을 것을 보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고난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대와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모든 것들이 우리를 영광으로 이끄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침내 우리를 그 영광의 자리까지 끌로 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때로는 실패도 주시고 질병도 주시고 이별의 아픔을 겪게도 하십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땅이 소망을 붙잡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그 영광을 위해서라면 하나님은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볼때는 실패이고 좌절이며 절망이지만, 우리가 영광의 자리에 섰을 때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었구나. 그것 때문에 나와 내 가족이 영광의 자리에 서게 되었구나! 그때는 완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하늘소망 – 소망의 바다
나 지금은 비록 땅을 벗하며 살지라도
내 영혼 저 하늘을 디디며 사네
내 주님 계신 눈물 없는 곳, 저 하늘에 숨겨둔 내 소망 있네
보고픈 얼굴들 그리운 이름들 많이 생각나
때론 가슴 터지도록 기다려지는 곳
내 아버지 너른 품 날 맞으시는 저 하늘에 쌓아둔 내 소망 있네
주님 그 나라에 이를 때까지 순례의 걸음 멈추지 않으며
어떤 시련이 와도 나 두렵지 않네
주와 함께 걷는 이 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