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26. 물위를 걸으시는 예수님/2016.9.11
요한복음 6:16-21
16.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17.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18.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19.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이르시되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대
21.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배는 곧 그들이 가려던 땅에 이르렀더라
요한복음 강해 26번째 시간입니다.
이 시간 요한복음 6장 16-21절의 말씀을 가지고 물위를 걷는 예수님 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먼저, 우리는 요한복음을 처음 시작하면서 이 책이 영적인 의미를 풍성하게 담고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 사용된 구조나 단어 사건의 배열등이 모두가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풍랑 이는 바다를 걸어오신 사건은 다른 표적들에 비해 비교적 짧게 기록되어 있지만 그 영적인 의미는 풍성합니다.
먼저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
요한복음에서 바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요한이 쓴 묵시록인 요한계시록에 보면....21장에
새하늘과 새땅의 환상을 보는데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우리가 앞으로 거하게 될 새하늘과 새땅에는 바다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와 같이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바다가 없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듭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 바다는 저주와 심판을 상징합니다. 이렇게 바다가 저주와 심판을 의미하게 된 것은 노아 때의 홍수사건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인류의 죄안이 만연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심판의 도구로 하늘의 물을 내리게 하심으로 바닷물이 창궐하여 모든 인류가 수장되게 됩니다.
또한 홍해 사건을 기억해 보십시오
애굽의 군사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추격해 올 때 하나님께서는 홍해의 바닷물로 애굽의 적군들을 심판하십니다.
이러한 사건들로 바다는 우리가 생각하는 낭만적인 것이 아닌, 심판과 저주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유족들에게 바다는 결코 낭만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암흑이고 두려움이고 슬픔입니다. 마치 그런 것과 같습니다.
또 하나, 오늘 본문에 기록된 단어를 보면 마태, 마가 복음과는 차이가 있는데, “영접”이란 단어와 “곧”이라는 단어입니다. 21절입니다.
마태,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니” 라고 기록한 것을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였다고 말합니다. 또 “영접” 하자마다 곧 목적지에 도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석을 보면, 영접한 것과 동시에 목적지에 도착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통해 본문의 사건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물위를 걸으실 수 있는 능력 있는 분이시다’라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을 염두해 두고 본문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많은 이들이 당신을 쫓아오자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본문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왜 주님은 주님을 쫓겠다고 따라온 사람들을 기쁘게 품에 안아 주시지 않고 산으로 피하셨을까요? 지난주에 살펴본 바와 같이 유대인들은 유대신학의 민속 메시아사상에 근거한 정치적 메시아, 경제적 메시아, 군사적 메시아를 원했기에 주님을 찾아 왕 삼으려 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렇게 세상 것을 원해서 자신을 따르는 자들의 왕으로 오신 분이 아니시기에 그들을 피해서 산으로 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냥 산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 기도하러 산으로 피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4장 22-2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니라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본문의 사건은 이렇게 예수님께서 산으로 기도하러 가신 후, 일어난 사건입니다.
또 하나 장소 게네사렛 호수에서 5,6키로 노를 저어 갔으니 호수 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시간적 배경입니다. ‘16절에 보면,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그때가 해가 저문 시각이었으므로 배를 타고 가기에는 무리가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그들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들이 있는 곳은 갈릴리 바다 동남쪽입니다. 그리고 가버나움은 북서쪽입니다. 그쪽으로 가려고 배를 띠우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배가 1986년 갈릴리 북쪽 해변에서 발견되어 이스라엘의 이그알 알론센터라는 전시관에서 본적이 있습니다. 길이가 8.2m 폭 2.3m 높이 1.2m의 크기입니다. 그러한 배를 타고 노를 저어 가고 있었습니다. 17절에 보니까, “이미 어두었다”라고 언급함으로 그들의 항해가 다소 순탄치 많은 않을 것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횃불을 통해 가는 길을 밝히고 하늘의 별의 보면서 방향을 잡았을 것입니다. 캄캄한 밤에 배를 타고 가는 제자들, 그런데 성경은 “예수는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아니하였다”고 언급합니다. 이러한 배경 설정은 제자들의 상태가 현재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미 어두었고, 아직 예수는 그들에게 오지 않은 것입니다”
마가복음 6장에 당시 시간이 밤 사경 그러니까 새벽 세시 이후였습니다. 그러니까 거의 밤을 새워 풍랑과 싸운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나오는 큰 바람은 원어로 ‘아네무 메갈루’인데 초속 14미터이상의 강풍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지금 엄청난 강풍 속에서 작은 배를 타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마가복음 6장 44절을 보면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 타고 앞서 건너편 벳새다로 가게 하시고”
주님의 명령으로 바다를 건너기 전에는 바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다를 건너는데 갑자기 바람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기대하는 것이 내 인생의 폭풍이 가라앉고 잔잔하고 평온한 태평성대가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쫓아 그분께 순종했더니 잔잔했던 바다에 오히려 풍랑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풍랑을 통해 제자들에게 무언가 진리를 깨우치고 하늘의 비밀을 알리시길 원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되면 이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배워야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비밀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기위해 때론 우리 인생에 폭풍과 같은 사건들과 상황들이 사용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주님은 제자들을 폭풍 속으로 손수 몰아넣으시고 산위에서 제자들을 계속 지켜보고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지금 제자들과 이 기록을 읽게 될 교회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치시기 위해 일부러 그런 상황을 만드신 것입니다.
그 상황을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지금 갈릴리 바다 남동쪽 광야에서 북서쪽인 가버나움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다에 풍랑이 일어납니다. 그 풍랑에 빠지면 모두가 죽습니다. 그런데 풍랑은 더욱 거세졌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물위를 걸어 나타나셔서 풍랑을 잔잔케 하시고 제자들은 그 즉시 가나안 땅에 도착하게 됩니다.
지난 주 말씀드린 것처럼 지금 제자들은 요단 동편 광야에서 요단 서편 가나안 지역으로 향해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기에서 세상으로부터 가나안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새로운 출애굽을 그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풍랑을 통과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제자들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홍수와 풍랑에 빠져죽게 될 자들이 어떻게 해서 생명력을 회복하고 가나안으로 입성하게 되는지를 친절하게 물위를 걸으시는 사건으로 설명해 주고 계십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다 시피 성경에서 물, 바다, 홍수는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를 상징합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에서는 그것이 백성들의 굶주림으로 그려졌습니다.
그 굶주림이 예수님이라는 하늘의 떡으로 풍성하게 채워지는 모습으로 구원을 설명한 것이 오병이어의 기적입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주와 심판의 바다에 폭풍이 일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이 죄인이기에 그 속에 다 빠져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두가 빠져 죽어야 할 그 물위를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물에서 당신들의 제자들을 구해내셨습니다. 여기에서 제자들은 폭풍의 바다 속에서 건져진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풍랑 속에서 자신들의 힘으로 그 풍랑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데 잘 안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갈릴리 바다에서 잔뼈가 굵은 프로 어부들입니다. 그런데 초저녁부터 새벽 세시까지 밤새도록 노를 저었는데도 풍랑 속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저쪽에서 주님께서 그 물위를 걸어서 오셨습니다. 제자들을 놀랬지만 얼른 그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풍랑이 잔잔해지고 자신들이 탄 배가 저희의 가려던 땅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20절
“내니 두려워 말라”라고 번역된 단어는 ‘에고 에이미’입니다. 영어로는 I am who I am 바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주님은 지금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으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물을 밞으시고 그 백성들을 구원해 내고 계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21절의 ‘영접’이라는 단어는 요한복음 1장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에서의 영접과 똑 같은 단어입니다. 요한은 일부러 동일한 단어를 써서 이 그림 속에서 구원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창세기의 그림으로 그리면 이러합니다.
홍수로 다 죽어가는 세상에서 노아의 여덟 식구가 주님을 상징하는 방주로 들어갔더니, 요한복음의 표현대로 하면 ‘영접했더니’ 그들은 안전하게 그들의 가려던 땅에 도착하여 죽음을 모면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오병이어의 떡을 먹고 세상 것으로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달라고 쫓아온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나를 먹는 길 밖에 없다’ 다른 말로 ‘나를 믿는 자만이 영생을 얻고 진정한 안식과 행복의 땅에 들어갈 수 있다’라는 가르침을 실물로 교훈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림이 바로 물위를 걸으시는 주님과 폭풍 속에서 두려워 떠는 제자들의 그림인 것입니다. 주님은 그 그림에서 역시 앞의 그림과 똑같은 메시지를 담아 스스로의 힘으로 풍랑을 헤쳐 가며 노를 저어 ‘가려던 땅’에 가고자 하는 자들에게 다른 말로 인간의 행위와 인간의 힘을 의뢰하여 행복과 만족에 이르려 하는 자들에게 ‘너희들의 힘으로는 절대 약속의 땅. 행복과 만족의 땅에 도달할 수 없으니 나를 의지하고 나를 믿어라, 오직 그 길만이 너희가 가려는 안식의 땅, 행복의 땅, 평화의 땅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는 것을 교회들에게 친히 알려주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가 깨닫게 되는 진리인 것입니다.
나의 힘과 노력과 경험을 의지하여 세상을 살아갈 뿐만 아니라 행복이라는 목적지에 가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길은 이 세상의 자랑이나 육신의 정욕의 충족이나 세상의 힘의 획득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회복되어지는 영생의 복 속에서만 행복하고 만족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라 봐도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행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은혜로 영생을 주시겠다는 예수님을 원하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영생을 안중에도 두지 않습니다. 그저 눈에 보이고 만질 수 있는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만을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기적들을 통하여 그렇게 세상의 복만을 구하려는 자들에게 ‘너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왜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나에게서 원하느냐? 라고 나무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바로 그러한 우매한 인간들의 대표로 나서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4장:27-31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주님께서 “내니 두려워 말라”고 ‘에고 에이미’ 내가 바로 너희를 구원할 하나님이시다. 그러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저도 물위를 걷게 해주세요‘라고 요구합니다.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물위를 걸어보는 것이 뭐 그리 중요합니까? 일단 살아야지요.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 우리를 구원해주세요‘가 아닌 ’주님 저희도 폼 나게 물위를 걷게 해주세요‘ 하고 요구합니다. 그건 다분히 이생의 자랑이나 세상의 정욕에 기인한 요구였습니다.
여러분! 기독교는 부와 명예를 얻어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주님 아니면 아무런 희망이 없고 더럽고 추악한 죄인일 뿐입니다. 이 죄악의 바다, 폭풍의 바다에서 저 좀 살려 주세요’하고 자신의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장중으로 숨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예수님의 힘을 이용해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물위를 걷던 베드로, 그는 물에 빠지고 맙니다. 베드로는 세상 것을 얻기 위해 주님을 쫓는 오병이어의 현장에 있던 자들과 배위에서 여전히 세상의 떡에만 관심을 갖고 있던 제자들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저주의 바다, 심판의 홍수에 빠지게 될 것임을 성경은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에도 노아의 홍수의 원인을 설명하면서 그곳에 네피림의 용사, 세상의 왕이라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들 때문에 심판의 물이 하늘에서 쏟아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네피림과 용사와 세상의 왕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유일한 목적은 세상의 왕이 되는 것이고 다른 이들에게 용사가 되어 자신을 자랑하는 것뿐입니다. 오로지 그 목적을 위해 삽니다. 그게 아담이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처럼 되고 싶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위에 진노의 물을 쏟아 부으시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것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비록 눈에 보이지 않아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에 그것을 실체로 받아들이는 믿음을 발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세상의 왕을 삼으려 하는 자들을 피해서 그 시험을 이기기 위해 기도하는 자리, 산 속으로 들어가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의 인생은 풍랑 이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항해에서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달 할 수 있는 길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오직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여 자연의 질서까지도 복종케 하실 수 있는 하나님, 그 분이 우리에게 오시는 길 밖에는 없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분을 믿을 때 죄로 말미암는 심판과 저주의 바다에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위해 사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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