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강해 79. 부활의 목격자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1.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2.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3.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6.시몬 베드로는 따라와서 무덤에 들어가 보니 세마포가 놓였고
7.또 머리를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쌌던 대로 놓여 있더라
8.그 때에야 무덤에 먼저 갔던 그 다른 제자도 들어가 보고 믿더라
9.(그들은 성경에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신 말씀을 아직 알지 못하더라)
10.이에 두 제자가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니라
우리가 믿고 있는 기독교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 믿음은 성경의 진리를 굳건하게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독교 신앙은 맹목적이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수행을 통해 어떤 경지에 이르고자 하지 않습니다. 또는 현실을 도피할 수 있는 특별한 비결을 제공하지도 않습니다.
기독교신앙 또는 기독교영성은 철저하게 현실에 뿌리박고 있으며 논리적이며 합리적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은 잘못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신들이 믿고 있는 바, 즉 신앙의 내용들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아직까지 내 신앙은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상황과 감정과 환경에 따라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선배들은 어떠한 사람의 신앙을 점검하려고 할 때 질문을 통하여 그들의 고백을 확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나는 믿습니다.” 라고 할 때 여러분들은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위에 기독교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탄생한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이 이 사실을 증거하면서부터 생겨났습니다. 그들의 증거를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며 예배하기 위해 부활하신 날에 모였고 그것이 기원이 되어 지금도 주님의 부활의 날, 줄여서 주일에 이렇게 예배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고백하는 것인가 하면, 나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신 다는 것을 믿는 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믿지 못할 사실을 신앙으로 받아들이는 차원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실제로 역사 가운에 일어난 것을 믿는 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죽으신 것과 부활하신 것을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기록한 증인들의 기록 즉,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함께 나누고 있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한 요한의 기록입니다. 그는 가장 가까이서 예수님을 섬겼고 또한 가장 가까이서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가 확신한 것은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20: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2천 년 전에 갈보리언덕에서 처참하게 죽어간 한 젊은이, 그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라는 사람인데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우리의 구원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신앙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내가 이것을 확실하게 믿고 있는데 여러분들도 이 글을 읽고 믿음을 가져 생명을 얻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증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살펴보았습니다. 중요했던 것은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성경대로 죽으셨다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수천 년동안 증거한 그대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성경대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운명하시자 그의 시신을 가져가 장사지낸 것은 아리마데 사람 요셉(*누가복음 23:50-51, 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과 산헤드린 공회원이었던 니고데모였습니다. 19장 40절에 보면 그들이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예수님을 쌌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 근처 동산에 묻게 됩니다. 각 나라마다 또 지방마다 장례법이 다릅니다. 제가 대전에 와 보니까 사람이 죽으면 매장하는데 이때 시신을 관에서 꺼내서 묻게 됩니다. 위쪽 지방에서 관 채 묻는 것과는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몰약이라는 나무에서 채취한 향품을 시신에 가득 바르고 세마포로 둘둘 말았습니다. 19장 39절에 보면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리트라쯤 가지고 왔다고 하는데 그 양은 30Kg가 조금 안되는 양이니까 상당한 양을 바른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돌무덤에 안치하게 됩니다. 돌무덤이라는 것은 돌산에 굴을 파고 시신을 넣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돌문으로 무덤문을 닫게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치되셨던 것입니다.
본문 20:1절을 보니까 때가 안식 후 첫날입니다. 안식일은 토요일이니까 안식 후 첫날은 일요일입니다. 아직 어두울 때니까 해가 뜨기 전 새벽이었던 것입니다. 한 여인이 예수의 무덤을 찾습니다. 그는 막달아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예수께 향품을 바르기 위해서 갔던 것입니다.
그가 무덤에 도착하여 보니 무덤을 닫고 있던 돌이 옮겨진 것을 목격합니다. 그녀는 누군가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제자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립니다.
2절에 보니까
“시몬 베드로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그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되 사람들이 주님을 무덤에서 가져다가 어디 두었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다 하니”
그녀는 예수님께 부활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 훔쳐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두 제자가 무덤으로 달려가기 시작합니다. 요한은 당시의 상황을 상당히 구체적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3절, 4절을 보시면
“3.베드로와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무덤으로 갈새
4.둘이 같이 달음질하더니 그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더 빨리 달려가서 먼저 무덤에 이르러“
5.구부려 세마포 놓인 것을 보았으나 들어가지는 아니하였더니
요한의 그곳에 도착하자마자 구부려 무덤 안을 보았습니다.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세마포였습니다. 그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고 있을 때 뒤따라온 베드로는 무덤 안으로 직행하였습니다. 그가 본 것은 무엇입니까?
세마포가 놓였고 또 머리를 쌌던 수건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시신의 몸은 세마포로 쌓고 얼굴은 가지지 않고 머리에는 다른 천으로 감싸게 되는데 그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 성경의 원어적인 표현을 보면 어떤 장면을 표현하고 있는가 하면, 세마포와 수건이 가지런히 그곳에 놓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몸을 쌓던 세마포는 마치 시신이 증발된 것처럼 그대로 놓여있었고, 수건 또한 또 다른 쪽에 가지런히 놓여있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세 명의 목격자가 각각 주목하여 본 것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목격자 막달라 마리아가 본 것이 무엇입니까? 돌문이 열린 것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 목격자 요한은 세마포가 놓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 번째 목격자 베드로는 세마포와 함께 수건이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신을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 시신을 훔쳐간다고 했다면 무엇 때문에 세마포를 벗겨내고 머리를 싼 수건(수다리온)을 벗겨내어 가지런히 놓고 갔겠습니까? 그 긴급한 상황에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에서 파견된 군병들이 혹시 예수의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갈 것을 대비하여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이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법적으로 어떤 일의 사실 여부를 가릴 때 물적 증거와 정황증거를 채택하지 않습니까? 여기 물적 증거가 이렇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빈 무덤이며 그 속에 놓여있는 세마포와 수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이 모든 것은 설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부러 돌문을 열어놓으셨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의 장면을 기록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돌문을 열라고 하셨고 세마포로 둘둘 쌓여 있던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주변 사람들에게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며 그를 덮고 있고 세마포를 풀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죽은 나사로가 살아난 것을 기억하도록 일부러 이렇게 해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도 그리고 요한과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기절하셨다가 다시 깨어났다고 주장하며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목격자들은 예수가 창으로 옆구리가 찔려 물과 피를 흘리셨고 그 죽음이 확인되었음을 증언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누군가 시신을 훔쳐갔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서 파견된 군인들이 그렇게 허술한 자들이 아닙니다. 특히 마태복음의 기록을 보면(마27:63-66)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빌라도에게 저가 살아있을 때에 사흘만에 살아난다고 했으니 혹시 제자들이 시신을 훔쳐갈 수 있다고 말하자, 빌라도는 경비병을 보내 무덤을 굳게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당시 로마에서 파견된 군인들의 군인가 그렇게 허술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경비병의 근무태만으로 시신이 도둑맞으면 그들은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경비병들이 열린 돌문과 예수의 시신이 없어진 것을 보고 대제사장에게 보고하자 유대장로들이 모여 의논하고 군인들에게 돈을 많이 주고 시신을 누군가 훔쳐갔다고 말하라고 시킵니다.
아마도 당시 빌라도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지도자들이 시신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인력을 동원하여 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며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기 전에 말했던 사흘 만에 부활한다는 것이 사실로 알려질 경우 겆잡을 수 없이 혼란해질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신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했던 베드로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겠습니까? 그를 비롯한 제자들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기 전에 예수의 부활을 믿고 증거하는 자들을 잡아 옥에 가두고 고문하고 죽이는 일을 하던 사람입니다. 그의 생각에 십자가에 처참하게 죽어간 한 젊은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사도가 됩니다. 그러다가 결국 목베임을 당하여 순교하게 됩니다. 이러한 그의 삶의 변화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실 때 다 흩어져 도망하고 숨어버린 자들이 어느 순간부터 모이기 시작하였고 그것도 일요일에 모여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기념하여 예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의 날에 모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의 조롱과 핍박 그리고 로마정권의 서슬 퍼런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예수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예배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활의 몸으로 여러 제자들을 만나셨고 사백여 형제들이 모여있을 때 나타나셔서 그들 모두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일도 있었습니다. 바울의 기록입니다.
고린도전서 15:3-10
3.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6.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7.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이제 온통 산이 가을 단풍으로 인해 아름답습니다. 한때 푸르렀던 나뭇잎들이 자연의 질서 속에서 마지막 빛을 다하고 이내 떨어져 어디론가 흘러갈 것입니다. 그리고 겨울이 되면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을 남길 것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 봄이 될 때 새싹이 피어나고 또 꽃이 만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때 죽은 듯 있었던 나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연을 통해서도 예수님의 부활의 흔적들을 남겨놓으신 것입니다. 너희가 해마다 이것을 보면서 어떻게 부활을 의심할 수 있는가 하는 하나님의 싸인이 자연만물에도 흔적으로 남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는 부활의 예수님은 우리가 예배하고 순종하고 사랑해야 할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인생이 끝나고 부활하지 않았다면 예수는 단지 비참하게 죽어간 좋은 사람정도일 것입니다. 우리가 죽은 예수를 기념하거나 예배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확증하셨습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요한은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로서 특별히 예수님을 살갑게 대했습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석에서 예수님의 의지하여 누워있을 정도로 친밀했던 것입니다. 그가 밧모섬에 유배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시가 임합니다. 그때 그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되고 그분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때 그의 반응을 요한계시록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2:17
17.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18.곧 살아 있는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부활의 예수님의 영광 앞에서 감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엎으려져 죽은 자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기에 우리의 생명을 다바쳐 드리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두 번째 우리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죄로 말미암아 시간이 지나면 병들고 썩어질 것입니다.
아무리 의술이 발전한다고 하여도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영혼은 어떻습니까? 우리의 영혼은 썩지 않습니다. 아무리 노년의 나이라고 할지라도 그 영혼은 청년의 때와 같고 오히려 더 깨끗하고 순순한 영혼을 간직한 분들도 많이 계십니다.
죽음은 우리의 몸과 죽음이 분리되는 순간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저 영원한 천국으로 올라가지만 육신은 땅에 묻히던 화장되어 뿌려질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재림하시는 날 우리의 영혼은 부활의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부활의 육신은 더 이상 쇄하거나 병들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몸은 영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력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이 땅에서 몸의 장애 또는 정신적 장애로 고통 받았던 자들도 그때가 되면 온전한 부활의 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가장 복된 것은 그렇게 부활한 새로운 몸으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고전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abcXYZ, 세종대왕,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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