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7-10-25 17:57

요한복음 강해 76.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는 십자가

joywoori
댓글 0

요한복음 강해 76. 하나님의 주권안에 있는 십자가

 

요한복음 19:1-16
1.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2.군인들이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자색 옷을 입히고
3.앞에 가서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손으로 때리더라
4.빌라도가 다시 밖에 나가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라 하더라
5.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6.대제사장들과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하는지라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7.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8.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9.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10.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11.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12.이러하므로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유대인들이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3.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우리는 지난 시간 예수님을 십자가로 몰고 가는 유대인들의 잔혹함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도 존재하는 죄의 평범성임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본문도 계속해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가는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아무런 죄가 없는 예수를 결국 십자가형으로 죽이는 빌라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심문과정에서 무죄임을 판단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이 저토록 분개하고 정치적 재판으로 죽이려고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의 무죄를 선고한 후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38절에 후반부에 보시면,
“38b.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39.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 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그런데 잘 보시면 빌라도 역시 간교한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가 만일 무죄라면 놓아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려고 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여론을 힘입어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유월절 명절에 죄수 한명을 사면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자신이 그러한 결정권을 가진 자라고 말하면서,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를 놓아주려는 행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분노를 더욱 자극시키는 간교한 발언이었던 것입니다. “내가 예수를 놓아주랴”가 아니라 “내가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랴”는 것은 가뜩이나 분노한 유대인들의 심기를 건드릴 뿐만 아니라, 그들을 경멸하는 발언이기도 합니다.
 
빌라도는 이렇게 흥분된 유대인들이 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제안을 한 것은 이 재판을 통해 자신이 얻을 이익을 챙기려는 의도로 이해됩니다.
유대인들은 당연히 예수가 아니라 바라바를 놓아주라고 요구합니다. 바라바는 민란 주동자였고 강도였습니다. 당시 로마의 식민정치에 대항하는 소규모의 민란들이 자주 일어났다고 합니다. 바라바는 민란을 주동하였고 그 과정 가운데 사람을 죽인 일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라바를 놓아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가 아닌 강도였던 바라바를 놓아줍니다. 이로써 이 재판의 공정성은 사라졌습니다.

다음으로 빌라도가 했던 행동은 예수를 채찍질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본문을 묵상하면서 처음에 빌라도가 어느 정도 합리적이고 공정한 입장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잘 보니까 그는 두 가지 생각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한편에서는 예수가 무죄이기에 놓아주어야 한다는 당위성, 공정함과 또 한편에서는 이 재판을 통해 자신이 얻게 될 이익 사이에서 왔다갔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시고 본문을 보실 필요가 있습니다.

 

19장 1절
“이에 빌라도가 예수를 데려다가 채찍질하더라”
당시 로마에서 죄수에게 행했던 채찍질의 형태는 세 가지 였습니다.
경범죄를 지은 사람에게 행하는 가벼운 매질의 형태로 ‘푸스티가티오’가 있었고 좀 더 중한 죄를 지은 자들에게 행하는 ‘플로겔라티오’ 그리고 가장 지독한 채찍질로는 십자가 처형의 예비단계로 집행되는 ‘베라베스티오’가 있었습니다. ‘베라베스티오’는 죄수의 옷을 벗기고 기둥이나 말뚝에 묶은 뒤 여러명의 고문자들이 죄수의 살점이 갈가리 찢겨 피를 흘릴 때까지 계속 때리는 고문입니다. 이때 사용된 채찍의 끝은 못이나 뼈조각 또는 사슬 모양의 납조각이 연결되었는데 여기에 맞게 되면 살점이 뜯겨 나가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아마도 1절에서는 ‘베라베스티오’의 채찍질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때까지는 십자가형을 구형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베라베스티오는 십가가 구형 이후에 집행됩니다.) 그럼에도 어느 정도 유대인들의 분노를 잠재울 정도의 매질을 했을 것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은 가시나무로 관을 엮어 예수의 머리에 씌웁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입고 있던 자색옷을 걸쳐 입힙니다. 그리고 손에는 나무막대기 하나를 쥐어 주며 우스꽝스러운 왕의 모습을 만듭니다. 그리고는 예수의 얼굴에 침을 뱉고 손으로 때리면서 조롱하기 시작합니다.

빌라도는 이정도 되었다 싶었을 때 예수를 데라고 관정 밖에 있는 유대인들에게로 나옵니다. 아침 일찍 모인 유대인들의 무리는 그 수를 더해갔을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오병이어 사건 때 있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나사로가 부활할 때 그것을 목격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불과 한주 전에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며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호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금 폭도가 되어 예수를 구경하기 위해 그곳에 있습니다.

 

빌라도는 그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
5절을 보겠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가시관을 쓰고 자색 옷을 입고 나오시니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되 보라 이 사람이로다 하매”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아 온몸에 피와 멍으로 고통당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은 포박되어 끌려나와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는 자리에 섰습니다.
빌라도가 말합니다.
“보라 이 사람이로다”

 빌라도의 말은 이 정도면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토록 죽이고 싶어 하는 예수라는 청년을 이 정도 때리고 조롱했다면 되지 않았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런 죄가 없는 자를 이정도 했으니 이제 그만 하자는 것입니다. 

가장 앞자리에서 서서 예수를 지켜보던 대제사장과 아랫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그들은 이정도로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는 십자가형에 죽이라고 소리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기 전에는 풀리지 않을 것이었습니다.

 

빌라도가 말합니다.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의 모습은 여전히 모호합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형을 집행할 수 없었습니다. 사형권은 공식적으로 로마에 있었기에 그의 말은 이제 자신은 더 이상 유대인들의 문제로 골치 썩고 싶지 않으니 죽이든 살리든 너희 맘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할 바는 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물러서지 않습니다.
7절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으니 그 법대로 하면 그가 당연히 죽을 것은 그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함이니이다”

유대인들은 레위기 24:16절의 ‘여호와의 이름을 훼방하는 그를 죽일지라’ 그리고 ‘거짓선지자를 죽이라’는 신명기 13장의 말씀을 들어 자신들의 법으로 그는 당연히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가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그들이 예수를 죽이고 싶어 하는 진짜 죄목이 들어납니다. 그것은 예수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유대인들에게 신성모독이며 참람한 죄였던 것입니다. 그들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을 덧붙인 것은 예수를 정치적 재판으로 죽이려는 간교함이었던 것입니다.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합니다.


8절에 “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더욱 두려워하여”
그는 관정에서 예수를 독대하며 심문할 때 그의 모습 속에서 그 어떤 권위를 느꼈을 것입니다. 그분은 죄수로 끌려왔지만 당시의 최고의 권력 앞에서도 당당했습니다. 그분의 눈빛과 말투 속에서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이려는 이유가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고 하니까, 혹시나 하는 두려움이 생긴 것입니다. 
당연히 아니겠지만 만일 진짜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두려움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끌로 다시 관정으로 들어갑니다. 예수에게서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9절에
“다시 관정에 들어가서 예수께 말하되 너는 어디로부터냐 하되 예수께서 대답하여 주지 아니하시는지라”
너는 어디로 부터냐? 도대체 네 신분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네가 저들이 말하는 것처럼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냐? 아니면 도대체 너는 누구냐? 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침묵하십니다. 이러한 침묵은 사실 하나님의 아들임을 인정하시는 침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십니다.
이에 조급해진 빌라도가 대답을 재촉하며 말합니다.
10절 “빌라도가 이르되 내게 말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도 있는 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그 어떤 권위에도 끌려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놓을 권한도 있고 십자가에 못 박을 권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셨습니다. 자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가 빠지는 것도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1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 준 자의 죄는 더 크다 하시니라”

빌라도는 결국 예수에게서 아무런 죄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12절에 “빌라도가 예수를 놓으려고 힘썼으나” 이것은 빌라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판단은 당시 인간법의 객관적 합리적 기준을 의미합니다. 예수는 결코 죄인이 아니었다는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알 고 있었습니다. 예수를 어떻게 하면 십자가형으로 죽일 수 있는지. 그것은 예수를 로마에 반역을 선동하는 자로 몰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고소한 것입니다. 때문에 만일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게 되면 로마의 왕인 가이사의 충신(friend of Caeser)이 아니라고 탄원할 것이라고 위협합니다. 이 위협이 왜 빌라도에게 그토록 두려운가? 그는 당시 로마황제 디베리우스의 충신 세자누스의 줄을 잡고 있었습니다. 당시 식민지 총독의 직은 로마황실로 들어갈 수 있는 교두보였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조용히 몇년만 견디면 로마황실로 가게 될 것을 고대하고 있던 터였습니다. 그러던 중 자신이 의지했던 세자누스가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처형되는 일이 얼마 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이 일을 잘못처리하게 되면 자신의 지위도 흔들릴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이 모를 리 없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로마의 반역자를 살려주었다는 탄원을 할 것이라고 위협한 것입니다.

이에 빌라도 예수를 십자가형으로 심판하게 됩니다.


13절부터 보겠습니다.
“13빌라도가 이 말을 듣고 예수를 끌고 나가서 돌을 깐 뜰(히브리 말로 가바다)에 있는 재판석에 앉아 있더라
14.이 날은 유월절의 준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15.그들이 소리 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그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이르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16.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빌라도의 이 조롱 섞인 말들을 보십시오. 유대인들을 향하여 “보라 너희 왕이로다.” 하며 유대인들을 조롱하는 것입니다. 또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그는 마치 이 상황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2천년 당시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사건을 요한의 기록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인류역사상 가장 불의한 재판이 진행되었습니다.


첫 번째 의인을 죽이고 죄인을 풀어주는 재판이었습니다.
두 번째 자신들의 죄를 감추기 위해 그 죄를 들추어내신 의로운 자를 죽이는 재판이었습니다. 세 번째 이에 권력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눈을 감아버리는 재판이었습니다.

이러한 인간에 의해 자행되는 불의한 재판 속에서 우리가 놓치니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상황을 누가 주도해 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누가 예수를 십자가로 몰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입니까? 아니면 빌라도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상황을 주관해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8장 9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예수께서 잡혀가시는 과정속에서도 그의 제자들이 안전할 수 있다는 대목에서 등장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붙잡히심이 하나님의 계획과 뜻 가운데 되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18장 32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빌라도에 잡혀 십자가로 가는 길이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응하여 지는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19장 11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를 해할 권한이 없었으리니”
예수께서 빌라도를 통하여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도 결국 하나님의 권한 가운데서 되어진 일임을 언급한 대목입니다. 

 

이제 이 모든 과정이 주도하고 있는 분은 누구인가가 분명해 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주권가운데 그분의 뜻이 펼쳐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십자가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흘리는 예수를 바라보며 동정하는 낭만적 시각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멜깁슨 감독이 ‘패션오브 크라이스트’에서 보여주는 인간적 고통을 불쌍히 여기고 눈물을 흘리는 낭만적 시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지금 하나님의 뜻이 시행되고 있다고 보여줍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수난 과정을 디테일하게 그리지 않고 담담하게 몇 문장으로 처리하고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성경은 이 사건을 통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 사건의 의미를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 자신의 아들을 비참한 십자가로 몰고 가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인간 죄의 잔혹함을 드러내셨습니다.
아무런 죄도 없으신 분을 십자가로 몰고 가는 유대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의 자화상을 보아야 합니다. 자신 안에 숨겨진 죄가 드러나자 회개의 자리에 서기는커녕 죄를 폭로해낸 예수를 죽여 자신의 죄를 감추고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려는 모습, 지금도 우리 주변에 흔히 일어나는 일 아닙니까? 내 자신도 그 속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왜 때때로 화내고 분노합니까?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 아닙니까?
저는 뒤늦게 자녀를 양육하며 제 자신의 악함을 발견합니다. 연약함이라고 포장하시만 사실 악함이었습니다. 우리의 분노는 약한자에게 흘러갑니다. 가정에서 또는 직장에서 가장 약한 자를 희생양을 만들어 놓고 우리의 짜증과 분노를 풀어내는 악함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는 바로 우리의 희생양이 되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한 원망,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대한 분노, 내 자신에 한계에 대한 실망, 이 모든 것을 풀어줄 대상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서는 못하니까 집단과 여론 뒤에 숨어 풀어내 버린 것입니다. 예수를 죽이며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며 침 뱉으며 죽어가는 자를 향하여 조롱하며 풀어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나이고 당신입니다.

그 속에서 예수는 침묵하시며 그 모든 고통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왜일까요?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 ㅂ1
그렇게 십자가로 나가셔서 자신을 조롱하는 자들까지 품에 안으사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십자가로 나가는 과정을 통해서 죄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의롭고 정당한가를 보여주길 원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이제 곧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온 인류의 그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 죄인들에게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그때 억울해 하거나 부당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가 십자가에서 분명하게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로 몰고 가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보면서 그 하나님을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해야 합니다. 인간의 대부분의 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빌라도처럼 인간들의 여론과 세상의 권세를 두려워 하지만 정작 그 모든 것 위에 있는 하나님의 권위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쉽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두려워하는 것은 경외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분이 너무 크시기에 그 능력과 지혜 앞에 그분의 거룩함과 의로우심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피조물들에게는 두려움을 다가오는 것입니다.

눅 23:27-30
27.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여러분! 하나님이 얼마나 두려우신 분이십니까? 그의 아들까지라도 십자가의 처참한 죽음으로 죽일 정도로 무서운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죄를 결코 간과하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추적하여 다 심판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뒤로 숨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